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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보석학, 유다>의 줄거리:
바보석학(idiot savant)이란 자폐증 환자들 중에 전반적으로는 정상인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나 특정 분야에 대해서만은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폐증에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폐증의 가장 기본적인 증상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두번째 자폐증 환자로서 유다는 일종의 바보석학입니다.
바보석학(idiot savant), 유다
(창38:20~30)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바보석학(idiot savant), 유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바보석학(idiot savant), 유다’
여러분! ‘인간 카메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미국의 천재 화가로 불리는 스티븐 윌트셔(Stephen Wiltshire)라는 사람입니다. 인간 카메라라고 불리는 이유는, 뉴욕에 헬리콥터 관광이 있는데 이분이 20분 동안 헬리콥터를 타고 뉴욕 전경을 바라보고 내려와서 삼일 동안 무려 화폭이 5m가 넘는 캔버스에 20분 동안 본 뉴욕시의 그림을 그려내는데 빌딩의 높이나 창문의 모양까지 정확하게 그대로 그렸다는 것입니다. 5m가 넘는 캔버스에서 빌딩의 높이가 맞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옆 빌딩과의 높이의 비율을 보면 아는데 그 비율이 같도록 그린 거예요. 분명히 천재 화가죠. 독창적으로 그리기보다는 무엇이든지 몇 초만 보면 세밀하게 그려내는데 이 분이 자폐증에 시달리는 분이었어요.
또 한 예를 들면, 메리 렘키라고 하는 엄마가 한 밤중에 음악 소리가 들려서 라디오를 켜놨나 싶어 사방팔방 돌아다니다 내려가 봤더니 14살 된 자기 아들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엄마는 자기 아들, 레슬리 렘키(Leslie Lemke)에게 단 한 번도 피아노를 가르쳐 본 적이 없어요. 피아노에 앉아서 바이엘이나 소나타 같은 것을 치도록 배우게 한 적이 없는데 TV에서 나오는 영화에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장면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한 번 듣고는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없는 레슬리 렘키가 연주해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분도 역시 자폐증에 시달리는 환자였습니다.
레인 맨(Rain man)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실제 모델이 있습니다.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자폐증 환자가 ‘킴 픽(Kim Peek)’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예를 들어 1890년 1월 2일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으면 몇 초 만에 월요일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몇 억 자리의 계산을 불러주면 몇 초 만에 계산을 해내고, 그 넓은 미국의 모든 도시의 우편번호를 다 외웁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에도 1만 여권의 책을 다 통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킴 픽을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페이지를 읽고, 왼쪽 눈으로는 왼쪽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도 역시 자폐증 환자예요.
이런 경우를 일컬어서 바보석학(idiot savant)이라고 합니다.
Idiot은 놀리는 뜻이 아니라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고, Savant는 불어에서 나온 것 같은데 영어와는 다르게 석학이라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보석학인데 이 말이 어감이 이상하므로 요새는 사람들이 자폐적 석학(Autistic savant)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인 유다가 바로 바보석학이라는 것입니다.
자폐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는 자가 유다였습니다.
이 바보석학 유다가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어서 바보석학 홍길동, 바보석학 아무개로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 창녀로 변신한 며느리 다말을 못 알아보고 동침한 후에 화대로 양을 주기로 했는데, 그 창녀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시켜서 찾다 못 찾고 맙니다.
23절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라고 합니다.
더 이상 들춰내어 찾지 않기로 합니다. 할 만큼 했다는 유다의 성격이 나오죠. 자기 마음속에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스스로 만족하면 되고 어쨌든 그 창녀가 자기 자리를 떠나서 못 준 것이니 그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가지고 끝내라며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석 달 후에 사람들이 와서 당신 며느리 다말이 과부의 처지에서 행음해서 임신을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끌어내서 불살라 죽이라고 합니다. 다말이 끌려 나가며 그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시아버지에게 전달해 주라고 하면서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들의 주인으로 인해서 내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라고 합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유다가 다말을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령을 한 뒤에,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뭘 들고 와서 펼쳐놓는데 자기 물건들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유다인데 자기 물건이 확 펼쳐지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더구나 이 물건들의 임자 때문에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소름이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이야기가 다 드러났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26절에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합니다.
‘그가 옳도다.’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하면 주기로 해놓고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옳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고 다말이 두 아들을 낳는데, 그중에서 베레스가 유다를 이어서 예수님이 태어날 혈통에 들어가서 족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가정을 꾸며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인 엘과 둘째인 오난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낳은 어머니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패륜을 통해서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처음부터 유다가 제대로 길을 갔다면 다말과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둘렀을까요?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직후에 집을 떠나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유다의 나이가 21세가량으로 학자들이 추정을 합니다.
요셉이 17살이었으니 20대 이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요셉과 유다 등 11명의 아들들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막 태어났기 때문에 연년생이 아니라 몇 개월 차이로 태어난 아들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11번째 아들이고 유다가 4번째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차이가 17살과 21살 정도였을 것입니다. 뭣 하러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 이삭은 60에 결혼을 하고, 아버지 야곱은 77세에 집에서 쫓겨나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했으니까 77~78세에 결혼을 약조한 것이고, 80이 넘어서야 첫 결혼을 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서두르지 않았다면 다말이 20~30살 차이가 났더라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결혼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 며느리 다말과의 패륜 사건이 패륜이 아닌 정상적인 결혼이 되었을 것이고, 수아의 딸과의 결혼은 원래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수아의 딸의 이름은 나타나지도 않고 두 아들은 죽었고, 셀라라고 하는 셋째 아들은 그 뒤로 이름이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유다의 리더십이 문제였는데, 이 유다의 리더십이 바로 ‘바보석학, 유다’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리더십이 있어요. 선민의 역사 속에서 리더십을 보인 것은 유다가 처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도 리더십은 보이지 않았고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과의 차이는, 야곱이 축복을 향해서 주도권을 쥐려고 싸운 사람이라면, 유다는 그야말로 리더십이 있었는데, 리더십의 핵심내용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형제들이 요셉을 팔 때, 모든 형제들의 마음은 다 감정에 휩싸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창 37:26절에서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라고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할지를 생각하는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을 미워하는 것은 똑같은데 그 미워함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표현하려 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를 화형 시키라고 할 때도,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자기에게 있음을 알았을 때에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년이 시아버지를 속이고 창녀 짓을 했다’라고 화를 냈을 텐데,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하며 합리적으로 대응을 합니다. 탁월한 리더십입니다.
이 리더십은 무엇이 적절하고, 의와 올바름을 향한 갈급함이 속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리더십인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좀 더 올바른 삶에 대한 열망과 좀 더 적절한 삶의 열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한 삶이 이런 혼돈과 패륜 속에 빠진 이유가 자폐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38장 앞부분 7~10절에서 수아의 딸이 낳은 아들인 엘과 오난이 죽을 때에 두 번 반복해서 나온 이야기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38장에서 유다와 연관되어서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자폐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고, 자폐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내 안에 갇혀있음으로 옆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2~3살이 되어서 사회성의 처음 단계인 의사소통이 눈을 맞추면서 시작됩니다.
눈을 맞추며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사회성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폐적 증상이 나타날 때에는 눈을 맞추지 않습니다. 억지로 눈을 맞추면 그 눈의 초점이 공허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나를 억지로 보게 해도 보고 있지 않아요. 그냥 멀리 딴 곳을 보는 것과 같고, 이게 바로 내 안에 갇혀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자폐증이 대부분 뇌 손상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좌 뇌의 손상에서 비롯되는데 그럴 때에 우 뇌가 극한적으로 발달해서 천재적인 소질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자폐적 석학(Autistic savant)들이고, 그 이전에는 바보석학(idiot savant)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유다의 문제는 “여호와가 보시기에”라는 말을 두 번이나 나왔고, 아브라함과 할례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내 행동을 완전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3번의 행동이 있다면 그 중에서 가장 완전한 3번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 완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행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산다는 이야기이고, 하나님 앞에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내 마음에 대해서는 내 육체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선민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했다’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가 나를 보고 계시는 것은 끊임이 없습니다. 내 육체보다도 내 마음에 가까이 계시면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분과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2~3살 아이들의 원초적인 행동처럼 눈을 마주치는 겁니다. 옆에 무엇이 있든지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인데 이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유다의 리더십이 왜 바보석학이고 자폐증에서 비롯되는 것이냐?
형제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고, 의사소통의 기반 위에서 자기 의견을 형제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춰야 하니 자폐증과는 관계가 없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의 의사소통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회성이 탁월해서 그 사람들에게서 배우기도하고 듣기도하고 어우러질 때에 나타나는 리더십의 특징이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사람은 원래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뜻에 담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생각의 체계가 없어야 해요.
생각의 체계는 이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가 가장 특징적으로 하고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동생을 죽여서 이익이 없으니 차라리 팔아버리자 하고, 다말이 패륜을 저질렀지만 옳다고 분별합니다. 여기서 리더십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감정에 합리성을 더해서 합리성으로 감정을 조절해나가는데, 이 리더십이 사람과의 소통은 굉장히 원활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소통이 안 되는 것을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자폐증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자폐증이고, 그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 중에서 탁월한 바보석학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는 탁월한 리더십을 보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바보석학입니다.
진짜 바보석학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어서 영적인 자폐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자폐증 환자라고 말할 때는 소통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 자폐증 환자들이 올바른 인간의 모습에 훨씬 가깝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소통이 됐습니까? 안 되니 바리새인과 충돌하고 대제사장과 충돌합니다.
왜 사람과 의사소통이 안 됩니까?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폐증의 경우를 마귀가 뒤집어 놨어요.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잘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특정회사의 오리털 파카를 입으면 다 따라합니다. 여기도 그 브랜드, 저기도 그 브랜드, 저 같았으면 그 브랜드가 찍혀있는 부분을 가위로 오려버렸을 거예요. 저는 25년 된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독보적이에요. 사회성이 없어요. 그런데 사회성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도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는 가운데 허락되어지는 것들을 먹고 입으세요. 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것을 따라 입고 다닙니까? 다른 사람이 들고 다니는 것을 들고 다녀야 되겠어요? 제 마음 같아서는 매직으로 상표를 다 까맣게 칠해버렸으면 좋겠어요. 안 창피해요?
이 바보석학, 하나님과의 소통은 단절되어서 자기 안에 갇혀있으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리더십을 보입니다.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새 출발을 하려고 했던 삶이 혼돈과 공허로 끝나고 패륜의 상태로 끝나고 맙니까?
하나님과 눈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자폐적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담을 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가 생각하는 올바름의 길을 따랐습니다. 형제들과 같이 있으면 안 되겠기에 집을 나가고 형제들을 떠났는데, 그 올바름에 대한 탁월한 분별력에 의해서 추구된 삶이 결국은 혼돈과 패륜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능합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눈을 맞춥니까?
하나님의 시선이 이 지구상에서 어디에 가있습니까?
하나님의 시선은 오직 한 곳, 당신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곳에 가 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과 시선이 맞는 거예요. 옆에서 자식이 죽겠다고 할지라도, 자폐증 환자처럼 자식과 의사소통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위하여 하나님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인데, 하나님의 시선이 십자가에 계신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터졌는데 그 상황과 의사소통하며 자폐증 환자가 아닌 것처럼 하지 말고, 세상에 대해서는 자폐증 환자인 것처럼, 먼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시선을 맞추고, 하나님과의 자폐증을 걷어버리는 겁니다. 마귀가 설정해 놓은 하나님과의 자폐증을 제거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하나님과 시선이 맞게 됩니다. 이 세상과 소통이 안 되고 심지어는 가족들과 소통이 안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유다의 경우와 같은 혼돈과 공허에 빠지지 않습니다. 차곡차곡 결실을 맺어가며 마음의 곳간을 채워가게 될 것입니다.
바보석학, 유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적인 평면적 차원에서는 먼저 자폐증 환자가 되어야 되고,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시선이 일치해야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계획을 따라 움직이게 되고,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유익이 되는 행동을 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귀가 설정한 자폐증 세계 내에서 바보석학들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며 사는 유다와 같은 잘못 된 삶의 태도가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 근본적으로 근절되게 해주시고, 하나님과의 시선이 끊임없이 마주쳐서 마귀가 설정한 자폐증을 극복한 선민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