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주인과 종은 서로 다르다(主從相異)
갈라디아서 4:1-7
원한경 씨 (언더우드)
1932. 2. 28. 배재 졸업생 기념예배 때
主從之相異問之甚異, 而諸君出世當擇何者. 主乎從乎? 主從之分別當在於何也? 或曰金錢也, 地位也, 然甚不然, 或曰命令者主也, 隨從者從也, 此亦不然, 吾主亦終身服從. 或曰以言語分別云, 此亦不然, 制度上有權利云, 亦不可也. 主幼以後吾不謂僕也, 僕不得主人之事也. 僕者不繫念主人之事也. 吾家有幾男, 一男洒掃, 父問之曰何也? 男曰母云今夜有客來, 房內不潔故洒掃云, 此男有可爲主人之性矣. 吾父在世時, 有一夫人在吾家三十餘年矣. 深知主人之意而善從事, 故主人不聞干涉, 此夫人可爲主人矣. 主降世爲人子, 恪勤在職, 不愧爲神之子. 主亦使人爲神之子, 不命令而自爲也. 爲主者不可不負責任也, 不善之中尤有責任, 善就之中責任不生焉. 有錯誤而後有責任之感, 今日爲僕者多矣, 用自由者主乎從乎? 任高而後有自由, 人皆如此思之, 余欲飮酒而不能, 爲僕者可能, 余欲毆打人而猶不能, 僕可能矣. 余命子曰勿詤勿鬪, 子曰何故也? 爾觀我問而自別也. 海上艦破之時, 船員可救而艦長不能避死, 欲取滿足者, 不能爲僕. 家男欲求錢而余與紙幣不受, 長男爲此, 少男卽與他欣悅, 學校卒業時, 有落第生來校曰 余入卒業生中, 何幸矣. 此生滿足在何也, 不欲爲主人之事矣. 余命子往彼爲某事則, 子更來請雇乎? 必不爲也, 何也? 爲主故也. 命家子植樹皆植之, 使長美化, 皆有此欲望, 故不請雇金故也. 余出世欲受雇金錢者, 不能爲主人也. 諸君卒業後, 當此復何往何處乎? 往何處則皆有責任有自由矣. 勿欲取笑, 勿欲安逸, 各有責任, 各有自由, 幼時有監督, 而諸君之前無監者, 有自由矣. 余入何班敎役時, 有一生見小說, 然余不責者,何也? 各有責任故耳. 君往何處有弟見打於他, 則見而過之乎? 朝鮮人見打於他人, 君可見過乎? 且見人無故見打於人, 則見而過之乎? 此則各有責任乎, 我屬何人也? 余屬于主也. 欲知人之怨憂則爲主乎爲從乎? 余幼時父主負水, 余問之父, 曰馬夫不負故自負矣. 時馬夫欲馬夫矣. 母校養諸君者, 欲作善任矣.
주인과 종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묻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주인이 되겠습니까, 종이 되겠습니까? 주인과 종의 구별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이는 돈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지위에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틀렸습니다. 어떤 이는 명령하는 이가 주인이고, 그 명령에 따르는 자가 종이라고도 합니다. 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종신토록 복종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언어로써 구별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혹은 제도상에 권리가 있어야 된다고도 합니다마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일에 생각이 매어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 사내 아이가 몇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내 아이가 집안을 쓸고 닦고 있었습니다. ‘왜 그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어머니께서 오늘 밤에 손님이 온다고 하시기에 방안이 더러워서 소제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내아이는 주인이 될 수 있는 성질을 가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떤 부인이 우리 집에 와서 삼십 년을 있었는데 주인의 뜻을 깊이 터득하여 일을 잘 해 나갔으므로 주인이 특별히 간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부인은 가히 주인이 된 것입니다.
주께서 세상에 인자로 강림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써 부끄러움이 없이 정성스럽게 직분을 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는데 명령을 하지 않고 스스로 하게 하였습니다. 주인이 된 자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하지 못하게 되면 더욱 책임이 있고, 잘 해 나가면 책임이 생기지 않습니다. 착오가 있게 된 뒤에는 책임이 있게 됩니다.
오늘날 종이 된 자가 많습니다. 자유를 이용하는 자가 주인입니까, 종입니까? 높은 지위를 맡은 이후에 자유가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술을 마시고 싶지만, 종이 된 자는 마실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남을 때리고 싶어도 못하지만 종이 된 자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자식에게 명령하기를 ‘허튼 말 하지 말고 싸우지도 말아라’고 하니, 자식이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너는 나의 물음을 보고 스스로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에서 배가 파손될 때 선원들은 구해 낼 수 있지만 함장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족을 취하려고 하는 자는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집의 사내아이가 돈을 구하려고 하기에 내가 지폐를 주었더니 받지 않았습니다. 큰 아이는 이렇게 하였으나 작은 아이는 그것을 주니 기뻐하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 낙제생이 학교에 와서 이르기를 ‘내가 졸업생 가운데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학생의 만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인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가 다른 곳에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다면 다시 이곳에 와서 고용을 해달라고 하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일세. 왜 그런가 하니 자네는 이미 다른 곳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집에 있는 자식들에게 나무를 심으라고 하여 다 심었는데, 이는 그 나무들이 자라서 아름답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두들 이러한 욕망을 가졌으므로 품삯을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출세하여 품삯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졸업한 뒤에 다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어디를 가든 다 책임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남에게 비웃음을받지 말고, 안일을 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각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감독이 있지만 여러분 들 앞에는 감독하는 자가 없고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반(班)에서 교역을 할 때, 어떤 생도가 소설책을 보고 있었으나 나는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각각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느 곳에 가다가 동생이 남에게 맞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고 말겠습니까? 조선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면 당신은 그냥 지나치고 말겠습니까? 또한 어떤 사람이 까닭 없이 다른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고 그냥 바라만 보고 지나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각기 책임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에 속해 있습니까? 나는 주인으로 소속되어 있습니다. 남의 원통함과 근심을 알려거든 주인이 되어야 합니까, 종이 되어야 합니까? 내가 어릴 때 아버님께서 물을 지고 날랐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마부(馬夫)가 짐을 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마부는 마부 노릇만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모교에서 여러분을 길러낸 것은 좋은 임무를 만들어 주려고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