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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2장 34-41절
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믿지 아니하니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알리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는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그대로 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자 하실 만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칭하는 모든 자의 죄 짐을 짊어지시고 죽으셔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다른 두 위격과 분리할 수 없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을 취하신 이후 분리할 수 없이 연합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죽음에서는 그의 인성이 버림받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합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죽음에서는 그의 신성이 마치 잠시 동안 숨어계시 듯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심으로 그런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내 마음이 괴롭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괴롭기 때문에 피하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죽으시기 위해 왔고 죽으실 때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죽음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세상 임금을 심판하고 쫓아내는 일로 있습니다. 물론 사단은 한 번도 하나님보다 위에 있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치 자신이 세상 임금인 것처럼 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마지막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에 대한 권세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사단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 또한 땅에서 들리는 것으로 죽는다고 알리십니다. 그의 죽음의 결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데, 이때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때 ‘모든’은 제한 된 의미, 그러나 혈통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제한 된 의미가 아니라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까지를 포함한 제한 된 ‘모든’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알리실 때 무리들이 질문합니다. 34절입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뵈옵기를 청하면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가 말씀하실 때 무리들이 모여 듣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무리들은 헬라인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유대인 무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특별히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신 말씀과 관련해 질문하게 됩니다. 율법에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가 들여야 하리라고 하느냐? 쉽게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아는 영원한 분이신데, 당신은 왜 죽음을 말하느냐는 겁니다.
일단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율법은 모세의 율법으로 이해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구약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4절에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하면서 인용한 구절이 있었는데, 이때도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인용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할 때 이런 내용은 시편이나 선지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0편 4절을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 9장 7절은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도 말씀합니다. 다니엘 2장 4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지금 저들은 이런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지금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온 자신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저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부활을 전제한 죽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한 제사장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설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런 과정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시자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 자신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저들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지만 전체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일부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인용하시지만,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만 말하지 않고 그의 고난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은 그런 말씀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원성만 가지고 나와 예수님의 말씀에 맞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다른 부분을 흐리게 만든다면, 그러면서 점점 한 부분에 대한 강조만 하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삭제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으로 말씀을 대적하는 꼴이 됩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이 그런 오류를 범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두 번째 시험 부분에서 사단은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에 대하여 말씀으로 반박하십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소위 ‘오직 성경’만 있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이 ‘전 성경’의 참된 이해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말씀만 인용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인용된 말씀의 뜻,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전체 성경 이해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예정론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의 의무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부분을 예정론으만 풀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예정론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예정론이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과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의무조차 소홀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성경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인데, 물질만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 가감하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지금 무리들이 그런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어리석음은 그들의 바람이 영원한 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고난보다는 영광에, 죽음보다는 생명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부활,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죽음은 그런 측면에서 부활을 전제로 한, 생명을 전제로 한 죽음인 것입니다.
저들은 ‘이 인자는 누구냐’고 묻는데, 저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빈정거리듯 모욕하는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인자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메시아가 죽임을 당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고 있는 인자,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너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35절과 36절로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빛이라고 설명합니다(요1:4). 그것도 생명의 빛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에 앞서 세례 요한은 이 빛을 증거 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고, 또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했습니다(요1:6-8).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함을 기록합니다(요1:5). 어떤 면에서 이 내용의 반복이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표적과 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보여주지만 믿지 않습니다. 물론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는 무리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작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차이로 인하여 빈정거리듯 모욕하고 있는 것이 저들입니다. 심지어 저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차이는 결국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여’(요12:13)라고 외쳤던 저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라고 외치게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빛이신 자신이 너희 가운데 있는 동안에 믿을 것을 말씀합니다. 자신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되지만, 믿지 않는다면 어둠에 붙잡히게 될 것이고 어둠에 다니면서 결국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가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너무 어두워서 가야 될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게 된다, 이리 저리 헤매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어둠에 다니는 자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길을 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놓으신 하나님과 상관없는 길을 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는 동안 믿으라고 하실 때 이것은 그의 승천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빛이 사라지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빛은 사도들에 의해 증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거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있는 동안 믿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빛이 가리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표적 중에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곁에 있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무엇을 줘서 믿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금 숨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왜 저들이 믿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37절과 38절입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많은 표적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과 함께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하기도 했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기도 했고,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지만, 표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믿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표적을 보이신 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표적을 보이신 것은 차고도 넘칩니다. 요한복음 안에서만 보더라도 오병이어와 같은 표적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그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알리셨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은 눈 뜬 자가 스스로 증거 하는 것처럼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들을 향하여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고 본다고 생각하는 자는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는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한다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반드시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내용들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표적을 보인다고 해서, 수없이 많은 이적을 보인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표적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사건을 자신의 서신을 통해 기록합니다(벧후1장).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변형되신 모습을 친히 보았고, 또한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도 직접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성경이라고 말합니다(벧후1:19). 실제로 표적 중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표적 중에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먹이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보다 더 큰 이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모든 이적과 표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해하도록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성경 기록의 핵심입니다. 이 성경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에게 보이시면서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만큼 인간의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하여 그렇게 강퍅한가? 하나님에 대하여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이사야 53장 1절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부분입니다. 앞서 저들은 메시아의 영원함만을 말했지만 구약은 메시아의 영원함만이 아니라 메시아의 고난도 말씀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이사야 53장입니다. 1절에 앞서 이사야 52장 13절에 보면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 말씀만 보면 무리들이 좋아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하심, 그러면서도 존귀하게 되는 것! 그러나 이사야 53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존귀함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2절을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또 3절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존귀하면 귀하게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1절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물론 믿는 자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믿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는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9-13) 간단히 말하면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주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은 믿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기능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고 주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은혜만이 아니라 죄까지도 하나님께 원인이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9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18-23) 우리의 논리는 언제나 이런 쪽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 그 주권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특히 긍휼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완악함에 대해서는 하나님 탓인 양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반면 우리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결코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억지로 짓게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함께 타락한 자 되었다고 할 때 타락한 본성을 통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스스로 죄를 지을 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은 무엇입니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입니다. 당장 진노를 보이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죄를 죄로 벌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로마서 1장에서부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롬1:24), 또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롬1:26), 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저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죄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냥 내버려 두시는 방식입니다. 즉 긍휼의 그릇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그들은 그 스스로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방향을 가는 겁니다.
죄를 죄로 벌하시는 방식은 이것만 있지 않습니다. 왜 저들이 믿지 못하는가?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사야 6장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39절과 40절입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그냥 내버려두셔도 되지만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는 것도 죄를 죄로 벌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인용은 이사야 6장에 있는 말씀인데, 인용된 말씀은 10절이지만 9절과 함께 보면 이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9절의 경우는 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듣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가? 보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믿지 않는가? 저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되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아니라, 그들의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신 것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라는 겁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어리석음과 혼미함으로 치심으로 그들의 악의에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이 친히 저들의 눈을 멀게 했다, 하나님이 친히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죄의 저자, 하나님이 죄의 승인자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때문에 참 생명이 제시될 때 그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죽음을 고집한 것은 다른 자가 아니라 그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은혜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악됨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내 탓이 아니라 하나님 탓으로 돌리려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완악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부패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1절로 오면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사야 6장 1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6:1-3) 물론 이사야가 본 것은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실체로 본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보았다면 출애굽기 33장 20절의 말씀처럼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는 말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어쨌든 이사야는 환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그가 누군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8절에서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라고 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십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이시지만, 그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충만히 계시되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소명을 받았는데, 그 소명이 무엇인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것을 말하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지만 그 말씀의 효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잘 되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복음을 증거 할 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변화되는 모습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본질에 있어 더해지거나 덜해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할 때 하나님을 우리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긍휼의 그릇을 통해서만 나타내지 않고,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도 나타내십니다. 믿는 역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때 믿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염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반계시의 충분성을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당연히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상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더더욱 핑계할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 무리가 그러합니다. 저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경우는 말씀 자체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구약이긴 하지만 동일한 율법이, 동일한 복음이 구약 성경을 통해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하는 자가, 또한 듣는 자가 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왜곡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의 전통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눈과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놀라운 표적들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셨지만 눈은 감아 버렸고 귀는 닫아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죄로 벌하시되 보아도 볼 수 없는 자로, 들어도 들을 수 없는 자로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한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확증할 분명한 표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이적까지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 모든 말씀을 배척했던 겁니다.
이런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완악한 마음으로 있는 것은 아닌가? 주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다른 사람만을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뿌려질 때 길가 밭이나 돌짝 밭, 그리고 가시떨기 밭의 모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 말씀의 결실이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결정권이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찾으시지만 그가 친히 하나님을 찾는 자로 이끄셔서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자들을 어떻게 외면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렇게 이끄신다고 할 때 강퍅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