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卿宰
睦叙欽 碑銘[趙絅]
贈左贊成梅溪睦公神道碑銘 【幷序】
贈議政府左贊成梅溪睦公諱敍欽,字舜卿,號梅溪,其先嶺南泗川人也。上之元年庚寅,公拜同知中樞府事,上疏辭以老病不克任事。下該部,故相韓興一方都大戎,啓曰:“睦敍欽痼疾,固不可煩以職事。顧其年八十,不可無優老之典。” 上迺命加階資憲,爵知中樞府事,兼耆老所堂上。
壬辰三月二十四日,卒于靑坡里第。訃聞,上悼愴罷朝,命有司錫弔與祭。夏,葬于楊之海等村道峯山足午向之原,從先兆也。其冬,公孤處善等五人具公世系、歷官、懿行、壽年、子姓、孫支爲狀,命其孫林馨,以請墓隧之碑于不佞漢陽趙絅。絅起而拜手曰:“不佞當仁祖朝,忝長南宮,與公均茵而坐,居恒念前糠之恥,而抑幸同陞也。古語有之,‘同官爲僚’,同僚之誼,惡可以一死一生有間?況公行應銘法,蔡中郞無愧郭有道碑,於是乎在,不佞何幸當之?”
按狀,睦遠有代序。有諱德昌,以閤門祗侯顯于高麗,入我朝,諱進恭,事獻廟,位民部左侍郞,號名臣。其後四傳諱世秤,卽己卯善類之一,世號玄軒先生,己卯善類擧不免蘭漆之焚割,獨先生超然文罔外,素履保貞,君子以爲徐孺子後一人。是生諱詹,歷事明、宣兩朝,爲吏曹參判,於公爲皇考。再娶東萊君鄭湖后孫謇之女,生丈夫子三人,公及二季曰長欽、大欽,俱以文學進,先公鳴,用其貴,累贈參判公至領議政,妣貞敬夫人。
公自髫齔,氣專而容寂,襮順而裏方,涵濡庭訓,長而愈篤,親戚閭里咸稱焉。癸巳,丁議政公憂,時夷德無厭,民死亡無弔。公方居延之焚次,能自祗力,治喪以禮無愆,聞者稱說。丁酉,除濟用參奉不就。經六年,拜內侍敎官,考滿,陞主北部簿,轉版曹郞辭。丙午,由秋部郞知楊口縣,未瓜坐罷。庚戌,登謁聖第,自是年至壬戌十有餘載,遷官不翅數十銜,而勞勩肯䋜則如赴樂地,膴仕美職則畏避退處如怯夫然。由是濁世訾垢不得浼公。
癸亥,仁祖大王正宗祊,初政選擇宣諭御史,公膺是命往北關,墨吏茅靡,民獲蘇醒。還拜成均直講,改兵曹正郞,俄陞司藝,轉軍資監正。甲子适叛,大駕幸公山,公從。自行在拜廣州牧,之任僅數月,民安之。無何,廟議定城南漢,以爲文吏不可,易以武弁,公遂移守南陽。秋用扈聖勞賜緋。乙丑,拜僉知中樞府事、知製敎,俄分鍾城符,病不赴,又拜泰安郡守。
戊辰,無賴賊任之後見告密者,遂上變,雜引諸名宰,公亦不免對理,先王洞燭卽釋。未幾,拜舒川郡守。元舅具宏新拜統制使,欲以軍政見能,稱承上旨,檄三道舟師合操南海中。公上疏極言水卒居送之弊,不如各於其道會操便,上嘉納。統營合操遂寢,三道軍民戶歌。辛未,拜同副承旨。壬申,陞右副辭遞。甲戌,拜左副,仍陞東壁。
乙亥,遷騎省參議,旋拜左承旨。時有摘倡逐主司儒生充軍海西事,公啓曰:“儒生縱有罪,律非其律。” 上乃悟,命改律。丙子,又遷騎省參議,移拜左承旨,辭遞,家居久。冬,西事急,朝紳家城外者多不及從衛,人多未晢大駕駐所,故遑遑路岐。公曰:“人臣之義,要見君父而後決所從。” 遂趣馬入南漢。公見孤城受圍踰月,朝暮且陷,閫外之臣無一人赴難者,慷慨流涕,乃抗疏請斬將帥之逗遶者。明年,大駕還都,拜公爲右承旨,又賞羈靮勞,授公嘉善。歷同知中樞府事,拜襄陽府使,府卽東海之隱居邑也。民羯羠不均,歲且大侵,公盡心力賑饑,聚邑中子弟之秀者,隷業丙舍,貧不能自食者,與之糧,尤貧不能行冠昏者,厚乞以資,歲未周,化大行。
戊寅,坐事罷,久未敍,李相景奭在臺時上箚理之,卽命敍。其夏,拜松都留守。其治大都如理郡規模,尤加潔廉,減廚傳,省誇嬉,新學校,增學廩,表善竹橋,修花潭書院,忠臣、孝子、烈婦之旌閭頹圮者,擧皆釐整,耆老嗟歎。
癸未,象胥輩忌公不利於己,橫挑客怒絀公。公始政於廣,終政於松,其所設張擧措,不亶儒雅而已,時露剛柔茹吐之風,公果世儒輇才之徒哉?冬歷京兆左、右尹。甲申,兼副摠管、同知義禁。澤堂李植秉銓,語人曰:“余觀國乘,睦公自少至老無點瑕,筆端是非亦不及,誠一代完人,棄擲宂散可惜。” 遂擬公諫長。丙戌,移拜禮曹參判。丁亥、己丑,荐拜同知中樞府事。至庚寅,宿恙轉痼,其承優老之恩,則闕廢支體時也。享年八十二。
嘗聞公考議政公得年亦七十九,與沈聽天守慶、宋西郊贊俱入洛社會,一時艶稱,公又趾美,豈非世間希覯事哉?蓋公之父子相繼享遐齡與其家法行事之篤實,略與宋之陳文惠公同,而爵位差不及,若其子姓之顯隆、孫曾之難盡記,有過之,無不及焉,良由世德之畜厚而發大。然公之逢將承應者,亦豈少哉?
孟軻氏有言曰:“居下位而不獲於上,民不可得而治矣。獲於上有道,不信於友,不獲於上矣。信於友有道,事親不悅,不信於友矣。” 信哉是言也!觀公屢涖州郡,而事有害於民者,無不盡言,言輒見讎,可不謂獲於上乎?近世砥行標節,咸推鄭休翁先生爲第一。公與休翁爲莫逆交,休翁許公不汚邪世。休翁之終也,以寡妻幼女托公,公乃以四郞室其女,經紀其家,若敖之鬼,賴以不餒,可不謂信於友乎?幼壯事議政公,盡溫凊之道,仕宦奉大夫人,致滫瀡之養,可不謂悅於親乎?其他內行之修,兄弟之和樂,宅堇容馬,衣堇蓋形,訓諸子若功令,惡朋比如惡臭。擧公孝悌忠信之推與,公可謂淸眞篤厚君子者矣。
夫人安東權氏,贈兵曹判書晫之女,配君子無違德,門內親族皆師柔順。先公甲戌十一月二十六日卒,春秋六十二,葬與公同墓而鬲焉。始視公秩贈貞夫人,后用第三男兼善參原從一等,贈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ㆍ世子貳師ㆍ知經筵春秋館事ㆍ五衛都摠府都摠管,又視公秩,贈夫人貞敬夫人。
男五人。長處善,某官,娶知中樞府事鄭應聖女。嗜善,某官,娶監司兪昔曾女。兼善,文科,某官,娶右贊成閔馨男女。志善,進士,娶副提學鄭弘翼女。來善,文科,某官,初娶監司李命雄女,後娶通德郞尹昌言女。女二,黃道亨,郡守,權跋,幼學。孫男十一,林奇,處善出;林馨,嗜善出;林英、林儒,兼善出;志善、來善,各生男尙幼。孫女、外孫、曾、玄幾四十餘人,多不載。銘曰:
有位有年,有弟有子。
算之古今,詘不多指。
天敷錫福,于公之備。
公緖遙遙,發軔自泗。
入國朝來,蟬聯珪組。
粤維玄軒,實公皇祖。
德以衛身,贏以壽胤。
議政嗣興,齒爵竝峻。
云誰無子?戩穀斯尠。
洛社几杖,橋梓相嬗。
孝哉惟公!訓襲休迎。
於義若渴,於利若驚。
於家事治,雍雍和樂。
亦旣抱孫,蹌鷟趨鸑。
人莫敢扳,公門之盛。
豈惟其盛?行世致敬。
我銘樂石,庸鴻厥慶。
증 좌찬성 매계 목공 신도비명병서 〔贈左贊成梅溪睦公神道碑銘 幷序〕
증 의정부 좌찬성 매계(梅溪) 목공(睦公)의 휘는 서흠(敍欽),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이며, 그 선조는 영남(嶺南) 사천(泗川) 사람이다. 상의 원년 경인년(1650, 효종1)에 공이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상소하여 늙고 병들어서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직하였다. 해당 부서에 내려 논의하게 하니 당시 병조 판서를 맡고 있던 고(故) 상신(相臣)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목서흠(睦敍欽)은 고질이 있으니 진실로 직무로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여든이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에 자헌대부를 가자하고 지중추부사의 관작을 내리고 기로소 당상을 겸하도록 명하였다.
임진년(1652) 3월 24일에 청파리(靑坡里)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알려지자 상이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고 담당 관사에 조문하고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여름에 양주(楊州)의 해등촌(海等村) 도봉산(道峯山) 자락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이 있는 곳이다. 그해 겨울에 공의 아들 처선(處善) 등 5인이 공의 세계(世系), 관력(官歷), 행적, 수명, 자손 등의 내용을 자세히 정리하여 가장(家狀)을 만들고 공의 손자 임형(林馨)을 시켜 한양(漢陽) 조경에게 신도비문을 요청하였다. 나는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인조조(仁祖朝)에 예조 판서로서 공과 함께 정무를 보았다. 항상 무능한 내가 앞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함께 조정에 오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옛말에 ‘함께 벼슬하는 사람을 동료〔同官爲僚〕라 한다.’고 하였는데 동료의 우의가 어찌 생사가 갈렸다고 해서 차이가 있겠는가. 더구나 공의 행적은 명(銘)을 지을 만하여 채 중랑(蔡中郞)이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부끄러움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이 일을 맡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였다.
가장을 살펴보건대, 목씨(睦氏)는 오랫동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휘 덕창(德昌)은 합문 지후(閤門祗侯)로 고려 시대에 알려졌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진공(進恭)이 헌묘(獻廟 태종)를 섬겨 지위가 민부 좌시랑(民部左侍郞 호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명신으로 불렸다. 그 후 4대를 전하여 휘 세칭(世秤)은 바로 기묘 선류(己卯善類) 중의 한 분으로, 세상 사람들이 현헌(玄軒) 선생이라 불렀는데 기묘 선류가 모두 난초가 불타고 옻나무가 베어지는 화를 당하였으나 선생 홀로 법망의 밖에 초연히 벗어난 것은 소박하게 본분을 지켜 정고(貞固)한 행실을 보전했기 때문이니 군자가 서유자(徐孺子) 이후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이 분이 휘 첨(詹)을 낳았는데 첨은 명종과 선조를 차례로 섬겨 이조 참판이 되었으니 공의 부친이다. 재취(再娶)인 동래군(東萊君) 정호(鄭湖)의 후손 건(謇)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사내 셋을 낳았는데 공과 두 아우 장흠(長欽), 대흠(大欽)이다. 모두 문학으로 진출하여 공보다 먼저 떨쳤는데, 그들이 귀하게 됨으로써 여러 번 추증되어 참판공은 영의정에 이르고 비(妣)는 정경부인이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운이 전일하고 태도가 차분했으며 겉은 유순하고 속은 방정했는데, 가정교육이 몸에 배여 자랄수록 더욱 독실하니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의정공(議政公 목첨(睦詹))의 상을 당하였는데 당시는 오랑캐의 탐욕이 끝이 없어 백성이 사망해도 조문할 상황이 아니었다. 공은 바야흐로 연안(延安)의 불탄 집에 있었는데 스스로 삼가 힘써 예제에 어긋남 없이 상을 치르니 이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칭찬하였다.
정유년(1597)에 제용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년 뒤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고 임기가 만료되자 북부 주부(北部主簿)로 승진하였으며 호조 낭관으로 옮겼으나 사직하였다.
병오년(1606)에 형조 낭관을 거쳐 양구 현감(楊口縣監)이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알성시에 등과하여 이해부터 임술년(1622)까지 10여 년 동안 수십 번 넘게 관직을 옮겼는데 고달프고 힘든 자리는 즐거운 곳에 달려가듯이 하였고 녹봉이 후한 벼슬과 좋은 자리는 겁쟁이처럼 두려워 피하고 물러났다. 이 때문에 남을 헐뜯는 혼탁한 세상이라도 공을 더럽힐 수 없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대왕이 종묘사직을 바로잡자 정치를 시작하는 초기에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왕명에 응하여 북관(北關)으로 가니 탐관오리들이 바람에 쓰러지는 풀처럼 순종하였고 백성은 소생하게 되었다. 돌아와서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얼마 뒤에 사예로 승진했다가 군자감 정으로 옮겼다.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어가가 공산(公山 공주(公州))으로 행차하자 공이 호종(扈從)하였다. 행재소(行在所)에서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백성이 편안하게 여겼다. 얼마 되지 않아 묘당에서 남한산성을 축조하는 문제를 논의하여 결정하고서 문관은 불가하니 무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여 공이 마침내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옮겼다. 가을에 성상을 호종한 공로로 당상관이 되었다.
을축년(1625)에 첨지중추부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또 태안 군수(泰安郡守)에 임명되었다.
무진년(1628)에 무뢰배 임지후(任之後)가 누군가 밀고하려는 것을 알아채고 마침내 고변하여 이름난 재신(宰臣)들을 이리저리 끌어들였는데 공도 심리에 회부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나 선왕께서 통촉하여 즉시 석방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천 군수(舒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원구(元舅) 구굉(具宏)이 새로 통제사에 임명되자 군정(軍政)으로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여 상의 뜻을 받든다고 하면서 삼도(三道)의 수군에 격문을 보내 남해에서 합동 훈련을 하려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수군이 이동하는 폐단이 있으니 각각 자기 도에 모여 조련하는 편리함만 못하다고 극언하니 상이 훌륭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통제영의 합동 훈련 계획이 마침내 무산되자 삼도의 군민(軍民)이 집집마다 노래를 불렀다.
신미년(1631)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임신년(1632)에 우부승지로 승진하였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갑술년(1634)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이어서 동벽(東壁)으로 승진하였다.
을해년(1635)에 병조 참의로 옮겼다가 곧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당시 주사(主司 시험관)를 쫓아낼 것을 주도한 유생을 적발하여 해서(海西)에 충군(充軍)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설령 유생에게 죄가 있더라도 합당한 처벌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깨닫고 형률을 다시 정하도록 명하였다.
병자년(1636)에 또 병조 참의로 옮기고 좌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된 뒤 오랫동안 집에 있었다. 겨울에 서사(西事 병자호란)가 위급할 때 도성 밖에 거주하는 조신(朝臣)들은 대부분 미처 호종하지 못하고 사람들 대부분이 어가가 머무는 곳을 확실히 몰랐으므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도리는 군부(君父)를 뵌 뒤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한다.”
하고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공은 고립무원의 성이 한 달 넘게 포위되어 함락되기 직전인데도 위난을 구하러 달려오는 장수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고, 상소를 올려 적과의 싸움을 피하며 머뭇거리는 장수를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청하였다. 이듬해 어가가 도성으로 돌아오자 공을 우승지에 임명하고 또 호종한 공로를 포상하여 가선대부의 품계를 수여하였다.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양양부는 바로 동해의 외진 고을이다. 백성의 성질이 사납고 순하지 않으며 또 큰 기근이 들었지만 공이 전심전력하여 기근을 구제하고, 고을의 빼어난 자제들을 모아 병사(丙舍)에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으며, 가난하여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자에게는 양식을 주고 더욱이 가난하여 관례나 혼례를 치를 수 없는 자에게는 비용을 후하게 지원해 주니 한 해가 되기도 전에 교화가 널리 행해졌다.
무인년(1638)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 파직된 뒤 오랫동안 서용되지 못했는데, 당시 대간으로 있던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이 차자(箚子)를 올려 변호하니 즉시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그해 여름에 송도 유수(松都留守)에 임명되었는데 군(郡)을 다스리는 것처럼 큰 도회지를 수월하게 다스렸으며, 더욱 더 청렴하고 절약하여 주전(廚傳)을 줄이고 과시하고 노는 행사를 줄이며, 학교를 신설하고 학름(學廩)을 늘리며, 선죽교(善竹橋)에 표석을 세우고 화담(花潭) 선생을 모신 서원을 중수하였으며, 충신, 효자, 열부(烈婦)의 정려 중에 무너진 것을 모두 보수하니 부로(父老)들이 감탄하였다.
계미년(1643)에 역관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공을 꺼려서 청나라 사신의 노여움을 마구 돋우어 공을 내치게 했다. 공은 광주(廣州)에서 정사를 시작하여 송도(松都)에서 마쳤는데 그 시행과 조처가 전아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억세어도 삼키고 부드러워도 뱉는 기풍을 드러내었으니 공이 과연 무능한 속유(俗儒)의 무리겠는가. 겨울에 한성부 좌윤과 우윤을 지냈다.
갑신년(1644)에 부총관과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조 판서로 있던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국사(國史)를 살펴보건대 목공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하자가 없고 사관의 비판도 없었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완전한 인물이다. 한직에 버려지니 애석하다.”
하고, 마침내 공을 대사간에 의망(擬望)하였다.
병술년(1646)에 예조 참판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정해년(1647)과 기축년(1649)에 거듭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경인년(1650)에 이르러 지병이 더욱 고질이 되었는데,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를 입은 것은 운신이 자유롭지 못할 때였다. 향년은 82세이다.
언젠가 듣건대 공의 부친 의정공이 79세까지 사셨는데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 서교(西郊) 송찬(宋贊)과 함께 낙사회(洛社會 기로소)에 들어가니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공이 또 부친의 영광을 계승하였으니 어찌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자가 대를 이어 장수를 누리고 그 가법과 행적이 훌륭하기로는 대체로 송(宋)나라의 진 문혜공(陳文惠公)과 같은데, 작위가 조금 못 미친다. 하지만 그 자손이 현달한 것과 손자, 증손이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점은 더 나으니 진 문혜공보다 못할 것이 없다. 이는 진실로 대대로 덕을 많이 쌓아 크게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이 계승하여 부응한 것이 또한 어찌 적겠는가.
맹가씨(孟軻氏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는 데 방도가 있으니, 벗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지 못할 것이다. 벗에게 신뢰를 받는 데 방도가 있으니, 어버이를 섬겨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면 벗에게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옳구나!
살펴보건대 공은 지방관을 여러 번 맡았는데 백성에게 해로운 일이 있으면 남김없이 말하지 않은 적이 없고 말할 때마다 받아들여졌으니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근세에 행실을 닦고 절의를 세운 인물로는 모두 정휴옹(鄭休翁 정홍익(鄭弘翼)) 선생을 제일로 추대한다. 공은 휴옹과 막역한 사이인데 휴옹은 공이 사악한 세속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인정하였다. 휴옹이 임종할 때 공에게 자기 아내와 어린 딸을 부탁하였는데 공이 넷째 아들을 그 딸과 맺어주어 그 집안을 경영하여 후사가 끊긴 귀신이 이에 의지하여 굶주리지 않게 되었으니 벗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의정공을 섬겨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효도를 다하였으며 출사해서는 맛있는 음식으로 대부인(大夫人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였으니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외에 평소 집안에서의 행실은 훌륭했고 형제간에 화락했으며, 집은 겨우 말 한 마리가 들어올 정도였고 옷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였으며, 법령처럼 엄하게 자식들을 가르쳤고 악취처럼 붕당을 싫어하였다. 사람들이 추중하고 인정하는 공의 효도와 공손, 충성과 신의를 거론하면 공은 맑고 참되며 독실하고 돈후한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증 병조 판서 탁(晫)의 딸이다. 군자의 배필로 덕에 위배되는 점이 없었으며 일문의 친족들이 모두 유순함을 본받았다. 공보다 앞서 갑술년(1634) 11월 26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이다. 공과 합장하되 간격을 두었다. 처음에는 공의 품계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가 후에 셋째 아들 겸선(兼善)이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참여했기 때문에 공에게는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고, 또 공의 품계에 따라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이 추증되었다.
아들은 다섯이다. 장남 처선(處善)은 모관(某官)인데, 지중추부사 정응성(鄭應聖)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기선(嗜善)은 모관(某官)인데, 감사 유석증(兪昔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겸선(兼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모관(某官)인데, 우찬성 민형남(閔馨男)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지선(志善)은 진사인데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내선(來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모관(某官)인데, 전처는 감사 이명웅(李命雄)의 딸이고 후처는 통덕랑 윤창언(尹昌言)의 딸이다. 딸은 둘인데, 군수 황도형(黃道亨), 유학(幼學) 권발(權跋)에게 출가했다. 손자가 11명인데 임기(林奇)는 처선의 소생이고, 임형(林馨)은 기선의 소생이며, 임영(林英)과 임유(林儒)는 겸선의 소생이고, 지선(志善)과 내선(來善)도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손녀, 외손, 증손, 현손이 거의 40여 명 가까이 되는데 많아서 다 기재하지 않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지위도 있고 장수도 누렸으며 / 有位有年
훌륭한 아우와 자식을 둔 이 / 有弟有子
고금을 통틀어 헤아려 봐도 / 算之古今
손에 꼽을 정도로 많지 않네 / 詘不多指
하늘이 복을 내려 주어 / 天敷錫福
공이 많은 복을 받았네 / 于公之備
공의 계보는 아득하여 / 公緖遙遙
사천에서 시작하였네 / 發軔自泗
본조에 들어온 뒤로는 / 入國朝來
끊임없이 고관이 나왔네 / 蟬聯珪組
아, 현헌 선생은 / 粤維玄軒
실로 공의 조부시니 / 實公皇祖
덕으로 몸을 지키고 / 德以衛身
남긴 복으로 아들이 장수했네 / 贏以壽胤
의정공이 계승해 일어나 / 議政嗣興
장수를 누리고 작위도 높았네 / 齒爵竝峻
누군들 자식이 없겠는가마는 / 云誰無子
복록을 누리는 이가 적은데 / 戩穀斯尠
기로소에 들고 궤장 하사받는 영광을 / 洛社几杖
부자간에 서로 이어받았네 / 橋梓相嬗
효성스럽다 공이여 / 孝哉惟公
가르침과 미덕을 계승했네 / 訓襲休迎
의리를 보면 목마른 듯 구하였고 / 於義若渴
이익을 보면 놀라는 듯 멀리하였네 / 於利若驚
집안일이 잘 다스려져 / 於家事治
화기가 넘쳐 화락했네 / 雍雍和樂
또한 손자를 안았는데 / 亦旣抱孫
봉황 같은 자태를 지녔네 / 蹌鷟趨鸑
남들은 감히 미치지 못하리 / 人莫敢扳
융성한 공의 가문에 / 公門之盛
어찌 성대하다 뿐이겠는가 / 豈惟其盛
세상 살며 공경을 다하였네 / 行世致敬
내 좋은 돌에 새길 명을 지어 / 我銘樂石
그 경사를 널리 알리노라 / 庸鴻厥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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