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억으로 공장을 짓고 1억은 챙겨라
불타버렸던 제강전기 제어실이 복구되면서 제철소는 정상을 회복했다. 자연스럽게 복구반은 승전을 자축하듯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해체되었다. 부장대우 복구2반장은 다시 정비부 차장으로 강등했다. 비상복구반 조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부장 승진 서열은 당겨졌다고들 했다. 회사는 알아서 쉬라는 듯이 휴가를 주었지만 정비부의 자리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며칠 쉬고 바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제철소는 살아서 굉음을 토해내지만 내 몸은 말이 아니었다. 체중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상근무 기간에는 워낙 긴장한 탓에 못 느꼈지만 이제 맥이 풀리니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 며칠을 쉬고 출근하려고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했다. 옆에서 잡아주지 않았으면 쓰러졌을 것이다. 하루 더 쉬라는 가족의 권고를 받고 회사에 연락하고 다시 출근복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비상근무를 하는 사이에 인천에서 동생과 함께 거주하시던 어머님이 손자도 보실 겸 내려와 계셨다.
잠결에 고부간에 하는 소리가 ‘인천에 잘 있었으면 이런 고생도 안하고 가족도 헤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게 말이에요. 주야장창 밤이고 낮이고 불려 나가 걱정이 됩니다’라는 아내의 소리, ‘S대학을 나와도 여기 아니면 밥 먹을 곳이 그렇게도 없느냐’는 어머님의 소리,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어머님은 아내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 졸업당시 교수들이 한국도 앞으로 선배들이 첩첩이 쌓인 한국전력에 입사해 조업운전만 하는 것 보다 일본의 도시바, 히다찌, 미스비씨 같은 중전기회사나 마쓰시다, 쏘니 같은 가전전기 회사로 들어가 자기 창의력을 발휘하는 게 자기성장을 꾀할 수 있다고 하시던 때고 개인적으로도 돈이 필요해 4학년 2학기 초에 처음 모집한 회사에 응시했다. 그게 이천전기(전 일본 Toshiba 한국공장)이었다.
당시 가형은 석탄공사 은성광업소(문경군 가은면 소재)에서 노무직을 맡고 계셨다. 가족이 대구, 인천, 문경 세곳으로 나누어지는 것 보다 모우자는 뜻으로 산골로 다시 들어갈 수 없으니 인천으로 옮기고 생활비를 공동부담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운이 좋아 UN기금으로 후진국 기술자양성 코스로 전력기기 설계분야기술연수도 다녀 와 그 덕으로 설계과장으로 승진되고 주택은행이 개설되자 주택자금 융자에 회사의 급여 가불까지 해서 대학졸업 6년만에 살 만한 문화주택으로 50평대지에 20평짜리 빨간 벽돌집도 마련했다. 내 생애 첫 집이라 공을 많이 들였다. 앞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담 벼락 쪽으로는 흙을 쌓아 화단도 조성했다.
설계했던 제품들의 시운전으로 가끔 지방출장을 다닐 때 수도권에 비해 묘목들이 엄청나게 싸다는 걸 알았다. 특히 광주 일산방직 출장때 새벽에 전남 광주천변을 산책하다 우리 키 만한 백 목련과 자 목련, 라일락이 너무 싸서 장거리 버스의 한좌석을 더 구매하여 옮겨와서 화단과 대문 양쪽에 심었는데 2-3년 자라더니 목련들이 봄을 알리는 꽃들이 피고지면 뒤이어 라일락이 향기를 뿜어 내었다.
4대강(낙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 유역 수위조정 설계를 하면서 한국에서는 생소한 계장(計裝, Instrument control)에 바람이 들어 이런 집을 두고 포항제철 계장분야로 오면서 미혼인 동생이 서울에서 취업하고 있어 어머님은 동생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그 집에 남으시고 혼자만 내려왔다. 이렇게 또 이산가족이 된 걸 어머님은 인천에서 사귀던 며느리 탓으로 보시는 것 같았다.
저녁에 어머님이 부르셨다. ‘S대를 나와도 여기 아니면 밥 먹을 곳이 없느냐?’고 고부간에 하시던 말씀을 직접 하셨다. 좀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너무 힘들었다. 철강설비는 최신 설비인데 우리의 능력은 그 보다 한참 아래였다. 정비를 한다고 도면을 들여다보고 따라가다 보면 Black box가 나온다. 입력과 출력만 비교해서 정상이 아니면 버리고 무조건 새로 바꾸어야 했다. 주먹만 한 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에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버리지도 못하고 기술력이 올라가면 수리해 보겠다고 껴 앉고 있었지만 그것도 하나 둘이지 계속 쌓여만 갔다. 그래서 고장이 났다면 예비품이 있는지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가끔 블루칼라들이 발로 한번 찼더니 좋아졌다면서 농담을 했지만 사실이었다. 촘촘한 배선이나 터미널 단자에 먼지나 이물질이 끼여 고장이 발생했을 때 진동을 주면 그게 떨어져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어느 부분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몰라 가슴만 앓는다. 어떨 때는 고장이 나서 하루 종일 주물럭거리다가 원인도 모르게 정상으로 복구되어 밤새 잘 가동하다 그 다음날 낮에 또 고장이 난다. 각국에서 공급한 설비의 고장상태를 분석하다 한 일년 뒤에 알았지만 전력기계 자동제어 부품이 기온과 상대습도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았다. 당시 설비는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차관선에 따라 공급국가가 정해진다. 같은 압연계통이지만 열연은 일본, 후판은 오스트리아, 냉연은 독일설비였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물어볼 데도 배울 데도 없이 장님처럼 설비를 주물럭거리는 이런 일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가 걱정스러웠다.
그 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공대 출신이라도 제철소는 금속공학이 주 전공이었다. 공대 동기생 7명중 금속이 셋, 전기가 셋, 광산이었다. 주전공분야는 설비가 확장되면서 자리도 생겨나 승진이 빠르지만 전기분야는 기계분야 다음이지만 그것도 정비부장과 동력부장 두 자리 뿐이다. 대개 동력부장은 전기분야가 맡았고 정비분야는 기계분야가 맡았다. 기라성 같은 전기분야 선배들이 동력부장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전기분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제철소에서 주전공이 아니면 한계가 있었다.
또 하나 자녀들의 대학입시를 걱정해 고교진학만 하면 대부분이 혼자 남고 가족은 서울로 이사해서 이산가족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포항은 너무 외졌다. 처음 입사했을 때 경주-포항간 도로가 비포장이었고 포항역전도 비포장이었다. 고속버스마저 처음은 경주로 들어와 다시 일반버스를 타고 와야 했다. 서울에서 장장 5시간이다. 어머님을 뵈러 가거나 처가 집 행사때는 하루 종일 올라가 그 다음 날 내려오면 너무 피곤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포항에서 일찍 떠나는 게 좋고 더 오래 있을수록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저녁에 집사람도 서울로 다시 가자고 했다. 약국을 해서라도 당분간 생계는 책임지겠다며 이러다 간 과부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집사람조차 그런 생각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좀 함께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밤낮이 없는 그런 생활은 반복되었다. 40여개가 넘는 단위공장에서 고장이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공작정비본부장(기계) 보좌역으로 부장 발령이 났다. 보좌역은 단위부서 책임자가 아니라 조금 편한 것 같았지만 전기분야 정비책임자의 자리는 여전했다. 그 다음은 선배 동력부장들처럼 회사를 떠나는 일만 남았다. 금속분야는 동기가 둘이나 부장이 되었다. 계속 기전분야는 도태되고 금속분야만 승진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회사를 떠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외 기술연수 덕택으로 전력기계 설계와 계장설비 전문가에 포철 이력이면 취업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학교와 선배들을 통해서 자리를 구했다. 전직장에서는 바로 오라고 했지만 주주간의 분쟁이 심해서 좀 그랬다. 석유 화학 콤비나트 분야에서 계장(計裝)전문가를 찾았지만 이 역시 그 공장의 주역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중전기 분야에 신규 진입하겠다는 2개의 재벌회사와 연결이 되었다. 한쪽은 대 재벌이어서 기존세력과 화합문제가 좀 있고 그 보다 작은 규모회사에는 공장건설과 운영부터 맡기겠다고 했지만 둘 다 지방이었다. 아무래도 공돌이는 공장따라 지방에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이리 저리해서 오너와 마주 앉았다. 오너는 점잖게 우리가 중전기분야에 진입하려고 하는데 협조해 달라고 했다. 오너와는 중식으로 끝났다. 다른 측에서는 추진반장이라는 중역을 또 만났다. 대기업 답게 직책과 급여조건을 제시하며 마치 직원이 된 것처럼 이야기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대기업은 기존세력과의 화합문제가 걱정스러웠다.
처음 뵈었던 오너께서 별장 같은데 서 다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서울까지 오면 교통편은 제공해주겠다는 것이다. 다시 마주 앉은 오너는 별 말씀 없이 식사만 함께하시고 그 다음날 골프를 치자고 했다. 그 당시는 연습장에서 두 달 정도 손을 익혀 포철 효자주택단지의 250야드가 넘는 드라이빙 렌지에서 건강상 겨우 채를 휘두르다 경주에서 몇 번 골프를 쳤던 수준이라 오너들과 함께 칠 수준은 아니어서 잘못 친다고 말씀드렸다. 오너는 누가 처음부터 골프 잘 치는 사람이 있느냐 며 임원이 되면 어느정도 칠 줄 알아야 한다며 못 쳐도 좋으니 한라운드 하시자고 했다. 서툰 골프를 보시면서 일만 하느라 골프를 못 쳤군 하셨다.
그렇게 포철에서 고생하지 말고 함께 꿈을 피워보자고 하셨다. 상무이사 공장장이라는 타이틀과 성공할 경우 주식에 대한 배려를 하겠다고 했다. 신규공장 건설에 전권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포항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대기업에서는 기존세력과의 화합이 잘 안될 경우 모든 게 간섭이 심해 성공해도 그게 내 공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아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 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레벨이 낮은 기업을 택했다.
집사람도 좋아했다. 내 건강도 심히 걱정스러웠지만 친구 하나 없는 외지에서 생활하는 것도 그렇고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자녀들의 대학입시 때문에 몇년만 지나면 선배동료들처럼 이산가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공작정비 본부장에게 사표를 내었다. 본부장은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따져 물었다. 전기분야로서는 제철소에서 한계가 있고 지금 일이 너무 힘들어 감당하기 어렵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지만 그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찾으러 와서 주택은 매물로 내어놓고 아예 가족과 함께 내가 지은 첫집인 인천 빨간 벽돌집으로 피신했다. 어머님도 함께 해서 아주 즐거워하셨다.
다시 오너와 만나 공장장 상무이사로 정식으로 근무하기로 했다. 오너는 '30억을 투자할 터이니 29억으로 공장을 짓고 1억은 챙겨도 좋다'고 뼈 있는 말씀도 하셨다.
그런데 급여와 대우는 다 해 드리지만 정식 인사명령은 포항제철에서 사직한후 1개월 지나서 하자는 것이었다. 오너가 포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지 않다면서 우선 사직을 하라고 했다. 현직을 빼 갈 경우 그룹 전체에 불이익이 오기 때문에 사직하고 쉬고 있는 상태에서 발령을 내겠다는 것이다. 순간 믿어도 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너의 말씀이 진지했고 어차피 사표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면 되리라 믿었다. 그 다음날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임원으로 전용자동차도 배정이 되어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했다.
정해준 빌딩에서 창업준비를 했다. 이미 부지도 정해져 있어서 현장까지 내려가 탐사했다. 그만하면 제대로 된 공장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업에 대한 업무적인 것은 그룹에서 알아서 할 것이지만 내가 할 일은 그 부지안에 공장 레이아웃과 그 안에 설치할 시설물과 직원들의 선발과 양성이었다. 숙련공이 희귀하던 때라 그들의 확보가 더 큰 문제였고 또 하나는 일본 어느 회사와 기술제휴를 맺던지 아니면 기술제휴없이 한전이 주로 수요로 하는 소형만 생산하면서 점차적으로 생산확대에 따라 기술제휴는 그 시점에 재론 하는가의 문제점이 생겼지만 우선 기술 제휴없이 하기로 했다.
그 당시 산업계는 중동 붐이 일어 평 엔지니어는 하루가 멀다 하지 않고 중동건설현장으로 빠져나갔다. 중동은 급여가 한국 근무시보다 3배를 받아 누구는 몇 년 만에 집을 샀다고들 하면서 엔지니어계에서는 중동찬스를 잡으려 해서 포항제철은 마치 공고나 대학을 갓나온 신입생을 받아 기술 양성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간부들도 그랬다 중동보다 한국전체가 산업화되면서 울산과 창원으로도 많이 빠져나갔다.
회사에서도 어디로 갔는지 행선지를 찾았던 모양이다. 퇴근해서 인천자택으로 돌아왔더니 포철비서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엔 전화가 귀해서 집에 전화가 없었다. 포항으로 가서 회장님을 뵙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사표수리를 결정 해야겠다는 마음에 포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