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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시리즈 주제: 하나님의 경륜 2
제목: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0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에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설교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했지만 그 내용은 성경이 들려주는 서사시와 판타지에 대한 언급과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는 존재로서 교회의 존재의미와 사명에 대한 개략적인 언급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편 2편 7절을 소개하고 마쳤다. 이런 식의 설교는 언제나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그 내용을 하나씩 반복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깊어지고 우리의 확신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것이 교육의 유익이며 목표다.
이번 주에는 지난 주 설교의 핵심을 요약하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때 신천지 같은 이단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를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근본정신과 지표를 확고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이것은 공직자로서 우리의 업무와 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추구점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끝으로 나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 있는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 주기도문을 개략적으로 살피고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그 대리인적 소임, 그리고 우리의 존재목적과 소명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지난 주에 이어 15분 안에 설교를 마치려면 우선 설교안을 잘 정리하고 그것을 익숙하게 숙지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설교에서 내가 언급하려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성경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 즉,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하늘과 땅에 대한 것이며, 그 둘은 결코 떼어질 수 없다.
2.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 성전이며, 그곳에서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는 사람이 인간이다. 인간을 성경은 왕이며 제사장으로 소개한다.
3.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될 때 최초의 축복선언이 성취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지표이며 목표다. 생육, 번성, 그리고 충만이다.
4.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이 보여주는 판타지를 명확하게 배우고 바라고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5.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 기도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 있는 사람이 드리는 모범기도문이다.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리면서 원형의 인간으로 만들어져 갈 것이다.
설교 개요
1. 성경 서사시 –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
2.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 있는 사람
3. 주기도문, 왕 같은 제사장의 기도
***
1. 성경 서사시 –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이야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어린이들은 물론 나이가 들어도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야기를 글로 쓴 것을 동화나 소설이라고 부르며, 소설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이야기를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드라마나 연극 또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는 전국민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으기도 합니다. 어떤 영화는 국민의 사분의 일이 보았다고 해서 천만관객을 모았다고 합니다.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영화도 결국 어떤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정말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통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광고도 합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그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분명히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듭니다. 그 이야기 속의 어떤 인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같은 편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드라마의 경우에 결말이 다가오면 시청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요청하면서 이야기에 개입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성경도 결국은 거대한 이야기, 즉 서사(敍事, narrative)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서사로서 성경을 파악할 때 그 수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이 생생하게 우리의 삶에 다가오며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은 하늘과 땅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창세기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집니다. 성경 이야기는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늘과 땅의 이야기는 그 둘이 하나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의 지휘부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세우시고 그것을 땅에 펼치십니다.
그래서 하늘을 잊어버리고 사는 세상을 세속화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인간사의 이야기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땅의 일이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리의 이야기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그 뜻을 배제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집을 나간 아들이 낭패를 당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늘의 뜻을 외면할 때도 낭패를 당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우리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인구증가를 억제하자는 운동을 벌이다가 이제 인구가 줄어 국가소멸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결국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하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르며 자신을 돌아보며 살겠다고 다짐한 윤동주 시인을 우리는 추모합니다.
반면에, 하늘만 바라보면서 땅의 일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에 교회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늘을 잊고 사는 것이 문제라면 땅을 포기하고 하늘만을 목적으로 사는 것도 성경을 많이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는 이유는 결국 땅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병들면 이렇게 세상의 일에 대하여 혐오하고 눈감아 버리며 오로지 하늘과 내면의 세계에만 몰입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과 땅은 결코 서로 떼어져서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쩌면 성경 이야기가 처음부터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곳은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9, 표준새번역 성경
2.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 있는 사람
성경이 하늘과 땅의 이야기입니다만, 그 하늘과 땅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짝이 되어 운행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말하는 하늘과 땅은 처음부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최종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것이 그림으로 선명하게 제시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1~2
성경이 하늘의 도시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와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에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결혼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동양에서도 결혼은 음양의 조화로 묘사됩니다. 훈민정음도 그 창제 원리를 설명할 때 천지인의 조화로 모음이 만들어졌다고 소개합니다. 한때 휴대전화 자판에 천지인을 사용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조화 속에서 살아왔고 그 둘이 하나 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판타지입니다.
판타지(fantasy)라는 말은 공상이나 환상이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마음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제가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니 그리스어로 거슬러 가고 결국 산스크리트어(바누, bhānú-)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웹스터사전이 소개하는 판타지의 최종 어원은 아베스터어로 바누(Avestan bānu- "beam of light")였습니다. 그 뜻은 한 줄기 빛입니다.
판타지는 마음을 비추는 한 줄기 빛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칠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한폭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마음에 그려진 그림이나 이미지를 상상이나 공상 또는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창조성과 관련됩니다. 또는 비전이나 꿈으로 표현됩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람에게는 단지 눈에 보이는 사물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조작하고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일을 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꾀를 쓰면 맘모스도 넘어뜨릴 수 있고 땅도 기름지고 비옥하게 가꿀 수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그림으로 전수될 때 그것을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판타지를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는 결국 성경 판타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어 그런 그림을 그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고 했는데 그 빛이 바로 성경 판타지를 그려주는 빛줄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판타지는 하늘과 땅이 결혼하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집이며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 원형은 에덴동산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땅에 자신의 처소를 만드시고 사람을 부르셔서 하늘의 빛과 지혜를 비추어 주어서 땅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땅을 향하여 축복하는 존재입니다. 천지인의 조화를 바르게 펼치는 존재가 본래적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3. 주기도문, 왕 같은 제사장의 기도
기독교회는 원형의 인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릅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소개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형상을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본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두고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음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원형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원형의 인간은 참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암송하여 기도하는 주기도문입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다스립니다. 그렇게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다스리는 사람을 성경의 용어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베드로전서 2:9).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을 가리키는 성경의 용어입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을 바라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땅과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양식, 죄, 시험, 악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이것으로 기도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예배하고 통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저도 신앙생활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신앙이 필요한가 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의 생각도 들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죄를 용서받으며 신의 보호를 구하기 위하여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가이드와 윤리적인 지침을 구합니다. 바르게 살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영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래나 사후에 다가올 심판이나 두려운 일을 피하기 위하여 일종의 보험으로 신앙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의 목적에서 본질에 해당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잘 가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자 가이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어느 새 원형의 인간, 참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을 바라보며 그런 사람을 사모하던 아이가 마침내 그 동네에서 그 바위의 얼굴을 한 지도자로 살아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