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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가 직접 신을 만날 때 세상의 반응>의 줄거리:
내가 직접 신을 만날 때 이 세상 존재감은 제로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세상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철저히 극도로 분노합니다. 그리고 직접 신을 만난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할 때 의아해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반응의 형태는 그런 나를 미친 것으로 여기거나 무관한 것으로 여기면서 무시합니다.
내가 직접 신을 만날 때 세상의 반응
(사도행전 22:1~30)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직접 신을 만날 때 세상의 반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직접 신을 만날 때 세상의 반응’
내가 유일한 참 신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에 이 세상은 크게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 번째는 극도의 분노입니다. 두 번째는 의아함과 열등감의 표출입니다. 세 번째는 미쳤다고 여겨서 무시하거나 상관치 않으려 합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류의 반응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종교는 기독교와 천주교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지난 시간에 종교는 하늘에 관한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에 속한 체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흔히 종교에 열성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이지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종교 자체가 세상에 속한 것이기에 결국 종교인 또한 비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날마다 몸부림치며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한 모두가 다 이 세상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사람을 대하는 방식 또한 정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4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이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부류의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21~28장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유대인들의 탄압을 계기로 사도 바울이 감금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유대종교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의 충돌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은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종교생활과 하나님 나라는 천적관계에 있음이 본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박해해서 감금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였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고 선민의식을 무시하고 성전을 우습게 여기고 율법과 모든 관습들을 철폐하려 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유대종교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나타나야 하는 일입니다. 산속이나 사막처럼 인적이 끊긴 곳에서 홀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하늘이나 신에 관한 언어로 만들어진 종교라는 체계가 존재함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종교생활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사도행전의 22~28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변호를 합니다. 그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경험과 유대종교인으로 살았던 이력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자기변호를 듣던 유대종교인들은 증오심을 견디지 못한 채 격노합니다. 22절을 보면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 분노가 직접 신을 만난 사람에 대한 세상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유대종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다메섹 경험과 이력을 듣고 이토록 분노하였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는 그 이유가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발언을 보면 유대종교를 배반하거나 유대종교의 율법과 규정과 관습 등을 비난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3절을 보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과거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 또한 다메섹 경험 전까지는 열과 성을 다해서 유대종교를 섬겼던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종교 내에서 상위 1%에 속했던 엘리트로 유대종교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 것은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참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밝혀졌으며, 자신이 그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을 증언합니다. 바울의 자기변호를 듣던 유대인들은 이 증언에 이르러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극도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 분노의 이유는 바로 바울이 개인적으로 참 신이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참 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신이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진리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모든 답을 얻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공자나 석가모니나 무함마드가 사도 바울처럼 참 신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면 세상에 유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존에 그토록 중시했던 유대종교에 대한 지식과 열심 그리고 관습과 가르침과 체계는 모든 의미를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참 신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만나게 된 것이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며 예수님과의 동행을 통하여 어떤 문제도 더는 문제가 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됨에 있어서 유대종교의 어떤 요소도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유대종교의 존재감은 제로가 되어버립니다. 바울이 참 신이신 예수님을 만난 곳은 성전이나 회당이 아닌 다메섹 도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길바닥에서 진리이시고 구원이시며 인생의 모든 문제의 궁극적 답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종교적 수련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기도원이나 부흥회나 성전의 기도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종교적인 절기나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탄압하러 가던 중에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예수님께 우호적이지도 않았고 믿음을 갖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참 신이신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 대한 심판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종교가 참 신과의 만남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셈입니다. 유대종교에 열심인 사람들은 도저히 이 발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참 신과의 만남에 종교의 존재감이 제로라면 세상에 종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에 열성인 사람들은 모순적이게도 직접 신을 만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참 신을 만났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련을 일으키며 극도의 분노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종교 밖에서 이루어진 참 신과의 만남을 인정하는 순간이 곧 종교의 말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14~15절을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에서 벗어난 사도 바울의 사명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에 눈이 멀었던 바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나고 눈을 뜨게 됩니다. 이때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아나니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받아 바울에게 전하는데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참 신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러한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이방으로 나가 예수님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종교에 열심이었던 자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대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된 언어의 체계로써 유대종교를 구축하고 계승해왔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개인적인 만남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자들의 핑계일 뿐입니다. 이들이 실제로 좋아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핑계를 감추고 있었던 자들에게 유대종교의 도움 없이 개인적으로 참 신과의 만남을 이루었다는 바울의 증언은 위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유대종교의 지식이나 관습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유대종교와 무관하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으며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종교는 온 천하에서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한 마디도 직접적으로 유대종교를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에게 참 신과의 만남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유대종교의 존재감이 휴지처럼 버려지고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극도의 분노를 보였던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사람들은 참 신과의 개인적 만남을 용인하지 못하고 의아함과 열등감을 표출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곧 참 신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천국으로 데려가셔서 지금 마주하고 계시는 참 신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동안에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열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에 의아함과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참 신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침을 흘리며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가 제로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상태를 확인해볼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가치들에 대해 어떠한 느낌을 갖고 있는가를 확인해봄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해짐이 점점 더 두터워질수록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형무형의 가치의 존재감이 점점 더 사라지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는 있으나 없으나 나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중에 생각과 말과 행동도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모습을 의아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아함이 깊어질 때는 열등감이 나타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종교인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참 신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남으로써만 이루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은 세상 앞에서 당당합니다. 설령 임금님 앞에 서더라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의사의 진단과는 상관없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당당함은 교만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공손과 진심어린 예절을 다 지키면서도 당당함은 가려지지 않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임금님이 신하인 나를 볼 때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의사가 환자인 나를 볼 때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리고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당당함은 재벌의 자부심 앞에서도 절대 가려지거나 숨겨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를 못 나왔을지라도 학박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참 신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순간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감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정치적 권위의 존재감, 종교적 권위의 존재감, 전문분야의 권위의 존재감 등이 다 제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회적 반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예절을 지키고 친절을 베풀며 전문가의 제안에 따르고 기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직접 만나고 있는 참 신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결과입니다.
어떤 전문가일지라도 나를 창조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전문가는 신을 만나지 못하지만 나는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이기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신하가 임금 앞에서, 비전문가가 전문가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 재벌 총수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교만할 수는 없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의 마음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신하가 임금님을 긍휼히 여길 수 있으며,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긍휼히 여길 수 있으며, 가난한 자가 재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이 당당함의 기운을 이해할 수 없기에 의아함과 열등감을 표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을 만난 사람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미쳤다고 여겨서 무시하거나 상관치 않으려 함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참 신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기에 세상의 가치에 좋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볼 때는 의아해하고 이윽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할 때에 세상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잘못된 것이고 미친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굳이 관심을 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잘라냅니다.
앞으로 살펴볼 26장에 가면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재차 증언합니다. 이때 베스도 총독의 반응은 유대인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에 분노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베스도 총독은 똑같은 말을 듣고도 바울을 그저 미쳤다고 여깁니다. 베스도 총독은 그가 가진 권력으로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총독이 누리는 가치들에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자신을 옳음의 기준으로 놓고 사도 바울을 미쳤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참 신으로 증명되셨습니다. 우리는 참 신이신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지켜야 될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정체성은 한 가정의 남편이고 아빠이기 이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과장이고 부장이기 이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잊지 않을 때 나의 마음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에는 어떤 종교의 도움도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를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방해가 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종교인들로 인하여 5년 동안을 감금당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종교는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에 가두고자 하는 감금의 체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세상에서의 나의 유일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잊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신을 만난 증거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됨으로써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에 대해 세 가지 유형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며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오직 참 신을 만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을 따라 십자가 작정을 하고 십자가 생활화를 위해 몸부림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참 신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뵐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세상에서 나타나게 될 세 가지의 반응에 대해 알았사오니 이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