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좋은 술집 주인과 충견】의 교훈 이상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조유가 지은 『반경(反經)』(동아일보사 간행)에 [맛 좋은 술집 주인과 충견]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의 고대 송나라 시대에 술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술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 집의 술을 사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래서 주인은 술장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 돈을 많이 벌자 주인은 도둑이 들까 두려웠다. 그래서 아주 충성스러운 명견 한 마리를 키웠다. 충견은 지나는 사람만 있으면 물어뜯을 듯이 짖어 댔다. 그 개는 그야말로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술을 사러 오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다. 손님들은 그 충견이 무섭고 성가시어 오다가도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그러자 준비한 술은 맛이 변해 팔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손님의 발길이 아예 뚝 끊어졌다. 주인은 점점 가난해져 갔다. 그러자 주인은 그 충견마저 키우기 어려워졌다. 주인은 오랫동안 손님이 끊어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충견은 주인을 사랑할 줄만 알았지 주인을 잘 먹여 살려야 자기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손님을 다시 맞이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군주가 신하를 등용할 때 충성심만 생각하고 신하를 최측근으로 등용하면 나중에 큰 사달이 난다. 그 산하는 군주에게 직언하는 신하나 구미에 맞지 않는 신하에게까지 군주를 지킨답시고 마구 따지고 대들며 공격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 신하로 인해 의리 있고 지략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주에게서 마음을 돌려 떠나버린다. 한 명의 간신에게 빠진 군주는 모든 의리 있는 신하를 잃고 결국 자기도 군주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차지철의 충성에 빠져 그를 두둔하다가 과거 충신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었다. 진시황은 조고의 충성에 빠져 그에게 전권을 맡기다시피 하다가 자기가 죽고 난 후 조고의 전횡으로 진나라를 망하게 했다. 전광훈 목사는 지금의 여당인 ‘국민의 힘’에게 과거 그래도 한 힘이 되었다. 보수를 외치고 보수를 지켜야 한다고 소리쳤으며 지금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과거 문재인 정권을 공격하는데 선봉에 섰었다.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그의 공격적 발언을 시원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의 여당 일부 인사들은 그가 하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여 함께 태극기를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광훈 목사의 시도 때도 없는 극단적인 말과 공격적 행동에 국민도 지쳐 있고 지지도도 떨어지고 있다. 이제 보수층의 사람들도 전광훈 목사에게서 떠나간다. ‘국민의 힘’은 그런 전광훈 목사와 결별하고자 하나 전광훈 목사는 자기의 힘을 과시하며 ‘국민의 힘’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제 ‘국민의 힘’에게 전광훈 목사는 계륵(鷄肋)이 되었다.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견문이 있는 식자(識者)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얕은 지식과 견문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유세하는데 소질이 어느 정도 있어서 일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그 지지에 도취 되었다. 그는 자기가 매우 많이 알며 자기의 견해가 가장 합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모겐소와 에설 퍼슨의 저서 『자아도취의 기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아도취의 신념>에 빠져 있었다. 그의 <자아도취의 신념>은 그를 지키는 충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견해와 주장, 신념에 어긋나는 그 어떤 사람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고 틀렸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논리와 지식만큼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의 그런 공격성에 진저리가 나서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는 듯하였지만, 하나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자아도취의 신념>에 빠져 있음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아도취의 신념>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지지자들이 등을 돌린 후였다. 그러나 끝내 자신이 <자아도취의 신념>에 빠져 있음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정당은 잘 짖어 대는 충견을 키우기를 바란다. 그 충견으로 인해 초기에는 지지자들이 후련해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그 충견의 막말과 <자아도취의 충성>에 질려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당의 지도자는 그 충성심에 빠지고 그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감싸 안는다. 그럴수록 대중은 그 정당에 등을 돌린다. 대중의 지지가 떨어짐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어리석은 충견(?)은 주인을 잘 지키기도 하지만 주인을 망하게도 한다. 권력은 광신적인 충성자에 의해 얻어지고 한동안 유지되기도 하지만 너무 오랜 기간 그 충견에 의지하면 권력은 그런 광신적인 충성자로 인해 무너지기도 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그것을 아주 잘 알았던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완전히 잡고 안정되자 붕망(朋亡)을 했다. 그야말로 자기에게 충성스러웠던 신하 중에서 권력을 남용하고 마구 짖어 대는 신하는 하나둘씩 제거했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며 충성스러웠던 신하 이숙번도 그렇게 내쳐 버렸다. 그렇게 했기에 세종은 더욱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었다. 한 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신념의 <자아도취>에 빠지면 신념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잘못된 신념은 자기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그 잘못된 신념으로 세상을 비판하고 타인을 공격한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침묵을 자기에 대한 지지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된 신념의 <자아도취>에 빠지면 대단히 위험해진다. 게르만족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지금의 독일을 위험하게 하는 원흉은 유대인이라고 강하게 믿은 히틀러는 수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였다. 히틀러에 충성스러웠던 아이히만은 그 선봉에 썼다. 그는 히틀러에게는 매우 충성스러운 충견이었으며 충견으로서의 자기 역할에 매우 성실했다. 그들이 한 일은 20세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인한 범죄였다. 현명한 군주는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들이 무엇을 즐기는가 보다는 백성들이 무엇을 싫어하는가를 더욱 주목해야 하며 어찌하여 자기를 따르는가 보다는 어찌하여 자기를 떠나는가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조유). 현명한 통치자(대통령)는 정치를 함에 국민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보다는 무엇을 싫어하는가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지지자들의 지지에 집착하기보다는 국민이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는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의 주장과 견해에 집착하기보다는 타인의 주장과 견해에 더 깊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야 더 합리적인 견해를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벗을 구할 수 있으며 존중받을 수 있다. 정치가든 개인이든 충견 노릇을 하는 그 위험한 <자아도취의 신념>에 빠지지 않아야 올바른 정치도 할 수 있고 자기도 바르게 세우고 지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