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추 태 (B)
"아니, 잠깐만 기다리시오." 표도르는 방안으로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저도 할말을 다 하게 해주시오. 저쪽 암자에서는 모두들 저에게 무레한 놈이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건 다름이 아니라 제가 꽁치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친척 미우소프 씨는 자기 말을 Plus de noblesse qe sinaerite(성실하게보다는 품위 있게)표현하기를 좋아하지만, 저는 그 반대로 Plus de sinaerite que de noblesse(품위 있게 보다는 성실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품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잖소, 폰 존? 실례지만 원장님, 저는 어릿광대이고 또 그래서 어릿광대짓만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명예를 존중할 줄 아는 기사(騎士)이기 때문에 기탄없이 제 소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올시다! 그런데 미우소프 씨의 가슴속에는 상처 입은 자존심 이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도 실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저의 소신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아들 알렉세이가 여기서 도를 닦고 있으니까요. 저는 그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들의 일이 염려됩니다.
하기는 염려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저는 광대짓을 하면서도 모든 것을 듣고 또 모든 것을 남몰래 보아 왔습니다만, 이제 여기서 최후의 1막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도대체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쓰러져 가던 사람은 이미 쓰러져 버렸고 또 일단 쓰러진 사람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래도 좋은 겁니까? 저는 다시 일어나고 싶습니다. 거룩하신 신부님들, 저는 신부님들에 대해 격분하고 있습니다.
참회라는 것은 위대한 비밀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암자에서는 모두들 무릎을 꿇은 채 커다란 소리로 참회를 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큰소리로 참회를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참회는 귀엣말로 하라고 옛날 성인들은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야만 참회는 신비로운 성례가 되는 것이고, 또 예전부터 그렇게 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짓을 했습니다' 라고 말합니까....... . 아시겠어요, 어떻게 이러이러한 짓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게다가 때로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말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추태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이지 당신들하고 함께 있다가는 틀림없이 편신교도[鞭身敎徒, 13, 4세기에 나타난, 교회. 성직.신비를 부정하는 광신적 기독교의 일파]가 되어버릴 겁니다,..... 저는 곧 기회 있는 대로 종무원(宗務院)에 상신서를 써 보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아들 알렉세이는 집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여기서 몇 마디 첨가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체로 표도르는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민감한 편이었다. 언젠가 한때(이 수도원뿐만 아니라 장로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다른 수도원에 대해서도) 악의에 찬 헛소문이 떠돌아 마침내는 대주교의 귀에까지 들어간 일이 있었다. 그 소문은 장로가 지나치게 존경을 받아서 수도원장의 위엄이 손상될 지경에까지 이르렀을뿐만 아니라 특히 장로는 참회의 성례를 남용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들이었으므로, 이 고장뿐만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도 자연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데 표도르를 사로잡아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면서 어딘지 모를 더러운 구렁텅이 속으로 자꾸만 그를 끌고 들어가는 어리석은 악마가 이 케케묵은 비난을 지금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표도르 자신은 이 비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만족할 만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 장로의 암자에서는 누구 하나 무릎을 꿇거나 큰소리로 참회를 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표도르 자신이 그런 장면을 목격했을 리도 없었으므로 그저 어쩌다 기억에 떠오른 낡은 헛소문이나 비난을 뇌까린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늘어놓고 나자 자기 자신도 어리석은 헛소리를 하였다고 느껴졌으므로 곧 자기가 한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아니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변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는 앞으로 한 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지껄일수록 이미 입 밖에 내놓은 허튼소리에 다시 그와 유사한 허튼소리를 추가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이미 비탈길을 내닫기 시작한 사람처럼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렇게 비굴하다니!" 하고 미우소프가 외쳤다.
"용서하십시오." 갑자기 수도원장이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온갖 말을 다하고 나중에는 더러운 악담까지 늘어 놓도다. 우리는 그 말을 참고 듣나니, 이는 곧 그리스도의 채찍으로서 나의 허영심을 고치기 위해 보내 주신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도 귀중한 손님이신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표도르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쯧쯧! 위선에다 케케묵은 말씨로군! 케케묵은 말씨에 케케묵은 몸짓하며! 낡아빠진 거짓말에 이마가 땅에 닿는 형식적인 절! 그따위 절쯤은 다 알고 있어요!
실러의 <<군도群盜>>에서 처럼 '입술에는 키스, 심장에는 비수' 식이군요, 신부님들, 저는 거짓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실을 원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꽁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이미 제가 언명한 대롭니다! 신부님들, 왜 당신들은 정진(精進)을 하고 계십니까? 어째서 당신들은 거기에 대한 보상을 천국에 기대하고 계십니까? 정말 그런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나도 정진을 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신부님들, 수도원에 틀어박혀 남이 주는 빵을 드시며 천국의 보상을 기다리기보다는 인간 세계에 나가서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덕행을 쌓는 게 어떻습니까? 하지만 그쪽이 더 어려울 겁니다. 어떻습니까, 원장님, 저도 꽤 재치 있는 말을 할 줄 알지요.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떤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그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팍토리의 오래 묵은 포도주에다가 옐리세예프 형제상회(兄第商會)의 벌꿀 술이라......... 아니, 이거 신부님들도 대단하시군! 꽁치 요리하곤 차원이 다른걸! 신부님들이 술병을 다 늘어놓다니, 헤,헤,헤! 도대체 이런 걸 누가 여기 가져왔습니까? 이건 러시아의 농민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번 한두 푼의 돈을 자기 가족이나 국가의 요구는 제쳐 놓고 이리로 가져온 겁니다! 거룩하신 신부님들, 당신네들은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계시는 거예요.
"이건 정말 너무 지나치군!" 하고 이오시프 신부가 말했다. 파이시 신부는 끈기 있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미우소프는 밖으로 달여나갔다. 킬가노프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럼 신부님들, 저도 미우소프 씨를 따라가겠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여긴 오지 않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빌어도 오지 않겠어요. 제가 천루블이나 기부했으니까 당신들은 또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겠지만 헤,헤,헤! 천만에요. 더 이상 내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흘러가 버린 제 청춘과 제가 받은 모든 모욕에 대하여 복수를 하는 겁니다."
그는 스스로 꾸며낸 감정의 발작에 못 이겨 주먹으로 쾅 식탁을 내리셨다. "이 초라한 수도원도 내 생애에 있어서는 뜻 깊은 곳이었소! 이 수도원 때문에 나는 쓰라린 눈물도 많이 흘렸소! 내 미치광이 여편네가 나한테 반항하게 된 것도 실은 당신네들 때문이었소. 종교회의에서 나를 저주하고 이 근처에 그 소문을 퍼뜨린 것도 당신네들이었소! 좋아요, 신부님들! 지금은 자유주의 시대, 기차와 기선의 시대란 말이오. 천 루블은 고사하고 백 루블, 아니, 단돈 백 코페이카도 나한테서는 나오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 수도원이 그의 생애에서 무슨 특별한 뜻을 지닌 적도 없었거니와 또 그는 수도원 때문에 쓰라린 눈물을 흘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꾸며 낸 눈물에 감동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그것을 믿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겸격의 눈물까지 흘릴 뻔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수도원장은 그의 악의에 찬 거짓말을 고개를 숙이고 듣고도 또다시 타이르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에게 떨어지는 모욕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내고,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미워하지 말며,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말씀대로 행하고 있소이다."
"쯧 쯧 쯧!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꼬대 같은 헛소리만 늘어놓으니! 신부님들,마음대로 지껄이시오. 난 가겠습니다. 내 아들 알렉세이는 아비의 권한으로 여기서 영원히 데려가겠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아들 이반아, 너도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해도 괜찮겠지? 폰 존, 자네도 여기 남아 있을 필요는 없겠지! 곧 우리 집으로 오게나. 우리 집은 재미 있으니까. 1베르스타도 안 될 걸세. 기름기 없는 수도원 식사 대신 카샤를 바른 돼지고기를 내놓을 테니 함께 들도록 하세. 코냑도 나오고, 리큐르도 나올 테니,.......딸기 술도 있지,....... 이봐, 폰 존, 행운을 놓치지 말게!"
그는 큰 소리로 외쳐대면서 몸짓도 요란하게 밖으로 나왔다. 바로 이 순간에 라키친이 밖으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알료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자기 아들을 보자, 아버지는 멀리서 소리쳤다. "오늘 중으로 아주 집으로 돌아 오너라. 베개랑 이불이란 다 가지고 냄새 하나라도 여기 넘겨서는 안 돼!"
알료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서 말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표도르는 벌써 마차에 올라 있었고, 뒤따라서 이반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없이 마차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는 알료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는 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의 에피소드를 보충해 주기라도 하는 듯한,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갑자기 지주 막시모프가 마차의 발판 옆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다. 라키친과 알료샤는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는 너무 바삐 서두른 나머지 참지를 못하고 아직도 이반의 왼쪽 발이 얹혀 있는 발판에다 잽싸게 자기의 한쪽 발을 올려놓고는 마차를 붙잡고 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나도, 나도 함께 갑시다!" 그는 깡총깡총 뛰면서 이렇게 외쳐댔다. 즐거운 듯이 방정맞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은 행복감에 젖어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사양치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데려가 주시오!"
"거것 봐, 내가 말한 대로지 뭔가," 표도르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제 거기서 빠져 나왔지? 어떻게 폰 존식 솜씨를 발휘했기에 식사를 물리치고 빠져 나올 수 있었느냐 말이야? 자네도 꽤 낯가죽이 두껍군 그래! 내 낯가죽도 두꺼운 편이지만 자네한텐 정말 두 손 들어야겠는 걸!
자, 뛰어 들어오게, 어서 빨리! 얘 바냐(이반의 애칭). 태워 주어라. 재미 있을 게다. 발치에라도 앉혀 주면 되니까. 괜찮겠지, 폰 존? 차라리 마부와 함께 마부석에 올라타겠나?........그래, 마부석에 오르게, 폰 존!"
그러나 이미 마부석에 자리잡고 앉아 있던 이반이 갑자기 말없이 막시모프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막시모프는 2미터 가량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가 나자빠지지 않은 것은 정말 우연일 수밖에 없었다.
"가자!" 이반은 화난 소리로 마부에게 외쳤다.
"아니, 너 왜 그러니? 왜 그래? 왜 저 사람한테 그렇게 하는 거지." 표도르가 호통을 쳤으나, 마차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이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도 참 이상하구나!" 2분 가량 잠자코 있다가 표도르는 곁눈질로 아들을 흘겨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자신이 이 수도원의 모임을 꾸미고, 또 다른 사람들을 선동해서 찬성하도록 해놓고, 이제와서 왜 화를 내는 거냐?"
"실없는 소리 그만 하시죠." 이반은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표도르는 다시 2분 가량 침묵을 지켰다.
"이런 땐 코냑을 마시면 좋지" 하고 그는 격언이라도 외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집에 가면 너도 한 잔 해라."
이반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표도르는 다시 2분 가량 기다린 후, "알료샤는 아무래도 수도원에서 데려와야겠다. 너한텐 몹시 불쾌할테지만 말이다. 존경하는 카알 폰 모르" 하고 말했다.
이반은 상대방을 멸시하는 듯이 어깨를 흠칫 해보이고는 외면을 하고 한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첫댓글 작가 토스토에프스키의 위대한 걸작이란 말이 새삼 실감납니다.
그 간 글을 올리며 감탄,감탄했습니다. 작중 인물 한 사람,한 사람의 성격 묘사 때문입니다. 세 아들과 아버지의 성격에서 모두 나를 발견했습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할 수 있을까를 이 작품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짐작되어 앞으로의 여정이 흥미롭습니다.^^ 댓글 꼭 달고 들 나가시면 힘이 되겠습니다.^^
내 안의 본성에 눈 뜨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지키려할 때 더욱 추악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동감입니다^^
예,..모나리자님. 동감입니다.
늘 댓글 남겨주셔서 고마워요^6
그냥 재미있어요.^^
ㅎㅎ
재미있지요?^^
너무 재미 있어 눈이 아픈줄도 모르고 워드를 친답니다.^^
ㅎㅎ 그리스도의 채찍이라고 받아들이는 수도원장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예,..수도원장,..ㅎㅎㅎ
흥미가 진진합니다.
오늘 날의 수도자와 다를게 아무것도 없어요.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상은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