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자본을 고용한다!
1990년대 후반의 청년 시절에 나는 교회 형제들 대여섯 명과 함께 봉천동 반지하방 2개를 월세로 얻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의 헬라어 ‘바실레이아’라는 이름으로 형제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았다. 매일 밤 함께 모여 기타를 치며 찬양하고 성경을 읽은 후에 서로 묵상과 삶과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교회와 나라와 세계를 위해 기도했다. 또 초대교회 유무상통의 코이노니아를 본받아 자기 가진 돈을 모두 한 서랍에 넣고 각자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나누어썼다. 그러다가 공동체의 돈이 떨어지면 돈을 벌기 위해 나는 가끔 일용 노동(속칭 노가다)을 나갔다.
나는 일을 나가면서 네비게이토 전도지(브릿지)인지 CCC 전도지(사영리)인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전도지를 챙겨 갈 때가 있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용 노동자들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그 전도지로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고 대구 사람으로 어릴 때 가출하여 홀로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일용 노동으로 돈을 벌고, 그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일용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문제는 몇 해 전에 병이 들어 일용 노동을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는 절망적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처지가 너무 불쌍했다.
그에게 전도지를 한 페이지씩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고, 그의 양해를 구하고 그를 위해 그 자리에서 기도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내가 그에게 그가 원한다면 내가 있는 형제공동체에서 같이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것 같고, 그는 초면인 내 제안을 부담스럽게 여겨 거절했던 것 같다. 그가 지금 살아 있을까? 몸에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몸으로 일용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과연 어떤 해결책을 주어야 할까?
당시 나는 일용 노동을 나갈 때, 새벽에 일어나 서울대입구역에 있는 한 인력 사무소에 걸어가서 일감을 얻으면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공사 현장으로 갔다.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 번 돈의 10%를 주고 주민등록증을 되찾았다. 당시 일당이 보통 5만원이었으니, 5천원을 그 인력사무소에 주었다. 일을 나가면 어느 때는 좀 쉬운 일도 있었지만, 때로는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위험한 일은 몇 층짜리 외벽에 타일을 붙이는 작업이었는데, 그 타일 하나의 무게가 20kg이었을 것이다. 두 손으로 그 무거운 타일을 든 채 외벽을 둘러싼 수평 철봉에 두 발을 딛고 수직 철봉에 몸의 무게 중심을 밀착시켜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타일을 붙여나가야 했는데, 철봉에 몸을 맬 밧줄도 없었고, 철모도 없었다. 한마디로 곡예였기 때문에 떨어지기 쉬웠고,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거나 최소한 중상을 입을 것이 명백했다. 게다가 그 날은 하필이면 새벽에 보슬비가 내려서 철봉이 미끄러웠다.
나는 철봉에 올라가서 타일을 들고 외벽에 붙이기 위해 몇 번 시도해보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지켜보던 십장이 그 타일 하나의 값이 내 일당의 몇 배가 된다고 계속 말하면서 그 타일을 떨어뜨려 깨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했다. 그는 내가 떨어지는 것보다 타일이 떨어지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나는 결국 그 작업을 못하겠다고 십장에게 말했다. 십장은 내게 화를 내며 욕을 했다. 그러나 나도 이런 작업인 줄 전혀 모른 채 온 것이라고 항변했다. 나를 인력 사무소에서 거기까지 차에 태우고 온 사람이 어떤 작업인지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십장은 내가 서툴게 작업하다가 그 비싼 타일을 깰까봐 염려도 되었기 때문에 결국 다른 일을 내게 시켰다.
그리고 기억나는 힘든 일은 건물 밖에서 4층까지 층계로 벽돌이나 모래를 지고 올라가는 일이었다. 지금도 120kg에 달하는 벽돌 수십 장을 한 번에 지고 올라가던 어떤 분을 기억한다. 그 경이로운 분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위였다. 나도 한번 도전해 보았는데 층계 위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포기하고 그 절반인 60kg을 짊어지고 오르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어떤 사람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고통을 무릅쓰고 일을 해서, 또 어떤 사람은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해서, 그 일당 5만원 가운데 5천원을 인력사무소에 낸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그 인력 사무소에 가서 여러 사람들 틈에 앉아 있는데, 그 소장(사장)되는 나이 많은 남자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들 먹여 살리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가 막혀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당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생하지 어떻게 당신이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생한단 말이냐?’
이것이 당시 내 생각이었고,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생각을 헨리 조지도 했다.
헨리 조지에 의하면, 경제 현상의 본질은 겉보기와 정반대로, 자본이 노동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가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 한 목적도 바로 노동자의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주창한 지대조세제 곧 토지평등권 개혁이 실현되면,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가 전부를 받게 된다. 이처럼 헨리 조지는 노동 중심의 경제 철학을 견지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주의자들도 노동 중심의 경제 철학을 역설한다. 협동조합의 본질은 자본의 기능을 노동이 이용하는 도구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본질적 속성은 협동조합의 자본을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진정한 기능을 노동이 이용하는 도구로 한정시키고 그만큼 대가를 취하도록 한다는 점이다.”(스테파노 자마니·베라 자마니, 49쪽).
또한 호세 마리아(José María Arizmendiarrieta, 에스파냐, 1915-1977, 신부, 협동조합기업 ‘몬드라곤’ 창설자)가 강조한 것처럼, 협동조합주의자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을 이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부 사람이 자신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회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괴물이다. (…) 협동조합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자본주의자와 구분된다. 즉 후자가 자신에 봉사하는 사람을 키워내기 위해 자본을 이용하는 반면, 전자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을 이용한다.”(윌리엄 F. 화이트·캐서린 K. 화이트, 353쪽).
이와 같이 노동이 자본을 고용(이용)한다는 노동 중심의 경제 철학을 매개로, 토지 평등권 개혁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은 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공통된 노동 중심의 경제 철학을 중심으로 두 운동이 목적의식적으로 연대할 때, 이 둘은 서로를 활성화시킬 것이다. 토지 평등권 개혁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은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요컨대 거시적 차원의 토지 평등권 개혁과 미시적 차원의 협동조합 운동이 함께 가야 하는데, 토지 평등권 개혁과 협동조합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 철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이 자본을 고용한다는 노동 중심의 경제 철학이다. 토지 평등권 개혁과 협동조합은 모두 실제로 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다.
참고문헌
스테파노 자마니·베라 자마니 지음, 송성호 옮김,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 북돋움, 2012.
윌리엄 F. 화이트·캐서린 K. 화이트 지음, 김성오 옮김,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 해고 없는 기업이 만든 세상』, ㈜역사비평사, 2012.
사진: 몬드라곤 협동조합, 호세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