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C)
그들은 온실에서 테라스로 이어지는 커다란 계단 앞에 도착했다. 도리언이 유리문을 닫고 들어가자, 헨리 경이 고개를 돌려 졸린 듯한 눈으로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도리언을 아주 많이 사랑하니? 그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풍경만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나도 알아요."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다는 건 치명적이야. 인간을 매혹하는 것은 불확실성이야. 안개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거든."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글래디스, 결국 모든 길은 같은 지점에서 끝나기 마련이야."
"어떤 지점이요?"
"환멸이지."
"난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환멸을 느꼈어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덕분에 공작 부인의 칭호를 얻은 거야."
"딸기 잎93 물이 나요."
"네게 어울려."
"사람들 앞에서나 그렇죠."
"딸기 잎이 그리워질 거야." 헨리 경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잎 하나라도 버릴 생각은 없어요."
"먼머스가 들어."
"늙으면 귀가 멀어요."
"그가 질투한 적은 없니?"
"질투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헨리 경이 뭔가를 찾는지 주변을 흘끔거렸다. "뭘 찾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네 딸기 잎 장식에서 떨어진 단추." 그가 대답했다. "넌 그걸 떨어뜨렸잖아."
그녀가 웃었다. "난 아직 가면을 쓰고 있어요."
"그 가면 덕분에 네 눈동자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그가 대답했다.
그녀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치아가 진홍색 과일에 박힌 새하얀 씨앗처럼 보였다.
도리언 그레이는 2층 자기 방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온몸의 섬유질 하나하나가 욱신거릴 만큼 공포감을 느꼈다. 갑자기 삶이 그로서는 짊어질 수 없는 섬뜩한 짐이 되어버렸다. 야생동물처럼 덤불 속에서 총에 맞아 죽은 불행한 몰이꾼의 끔찍한 죽음 또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헨리 경이 우연히 내뱉은 냉소적인 농담에도 기절할 지경이었다.
5시에 도리언은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르고는, 그에게 런던으로 가는 야간 급행열차를 탈 수 있도록 짐을꾸리고 8시 30분까지 현관 앞에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는 셀비 로열에서 하룻밤도 더 묵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불길한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햇빛 속에서도 죽음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숲 속의 풀잎이 피로 물든 곳이었다.
그는 핸리 경에게 짧은 편지를 남겨,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으러 런던으로 가고 있으니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대신해서 손님들을 대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봉투에 그 편지를 넣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하인들이 들어와 우두머리 사냥터지기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들여보내." 그는 잠시 망설인 다음 차갑게 말했다.
남자가 들어서자마자 도리언은 서랍에서 수표책을 꺼내 자기 앞에 펼쳤다. "손튼, 오늘 아침에 일어난 불행한 사고 때문에 왔을 테지?" 그가 손에 펜을 쥐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리." 사냥터지기가 대답했다.
"그 불쌍한 친구가 결혼은 했나? 딸린 식구는?" 도리언이 따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곤궁한 처지에 내버려두어선 안 되지. 얼마가 됐든 자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돈의 액수를 보내주겠네."
"나리, 우리는 그자가 누군지 모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뵌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도리언이 냉담하게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자네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나리.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선원처럼 보였습니다, 나리."
사냥터지기의 말이 떨아지는 순간 도리언의 손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도리언은 심장박동이 갑자기 멎는 것만 같았다. "선원이라고?" 그가 소리쳤다. "분명 선원이라고 말했나?'
"예, 나리. 선원 따위로 보였습니다. 양쪽 팔에 문신도 있고, 이런 저런 모양새로 보아 그런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더 알아낸 것 없나?" 도리언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 그의 이름이 적힌 물건이 없었나?"
"그저 약간의 돈과 6연발 권총이 있었습니다. 나리, 하지만 어디에도 이름 같은 건 없었습니다. 거칠어 보이긴 했지만 얼굴은 꽤 괜찮게 생겼습니다. 저희는 선원이나 뭐 그런 일을 하는 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도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서운 희망이 고동치며 그의 마음을 스쳤다. 그는 그 희망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시체는 어디에 있지?" 그가 소리쳤다. "어서 말해! 지금 당장 시체를 봐야겠어."
"자작 농장의 빈 마구간에 있습니다. 나리. 그런 시체를 자기 집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시체는 불운을 가지고 온다고들 하거든요."
"자작 농장이라고! 당장 그리로 가서 나를 기다리게. 마부들 중에 아무에게나 내 말을 가지고 오라고 전하게. 아니, 됐네. 내가 직접 마구간으로 가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테니."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리언 그레이는 말을 타고 긴 가로수 길을 전속력으로 힘껏 내달리고 있었다. 나무들이 행렬을 지은 유령처럼 휙휙 지나가는 듯했고, 황량한 그림자들이 그가 가는 길을 가로질러 몸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암말이 흰색 문기둥에서 갑자기 방향을 트는 바람에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져 나갈 뻔했다. 그는 채찍으로 말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말은 어스레한 공기를 가르며 화살처럼 달렸다. 돌맹이들이 말발굽에 밟히며 튕겨 날아갔다.
마침내 그는 자작 농장에 도착했다. 두 남자가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안장에서 뛰어내려 두 남자 중 한 명에게 고삐를 던졌다. 가장 멀리 떨어진 마구간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시체가 그곳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마구간 문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는 빗장에 손을 얹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살리거나 망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순간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이윽고 문을 밀치고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맨 끝 한쪽 구석에 쌓아놓은 부대 천 더미 위에 허름한 셔츠에 파란색 바지를 입은 남자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의 얼굴 위에는 얼룩진 손수건 한 장이 덮여 있었다. 그 시체 옆에는 병에 꽃은 조악한 한 자루 양초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도리언 그레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도저히 자기 손으로 손수건을 치울 수 없을 것 같아서 농장의 하인 한 명을 소리쳐 불러 들어오게 했다.
"저걸 얼굴에서 걷어보게. 얼굴을 보고 싶어." 그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문기둥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농장의 하인이 손수건을 치우자, 도리언은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그의 입술 사이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덤불숲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바로 제임스 베인이었다.
그는 시체를 바라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좀 안전해졌네요...^^
이 생에서 자신의 죄가 가려지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본능이나
영의 문제에서도 자신의 죄가 용서되어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비슷하군요
그러나 결국 영생으로의 구원은 오직 사랑과 믿음 그리고 마지막 소망(아버지 집으로의 귀향)에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