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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쯤 전이었나, 차를 몰고 휴게소 광장에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건물 곳곳에 대자보가 붙어 있고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굳어 있었다. “맞아. 조합원들이 농성중인 노조 사무실에 공권력이 투입됐다는 기사를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지….” 우동을 말아주는 아가씨도, 주방의 아주머니도, 주차장을 청소하는 아저씨도 모두 ‘단결’, ‘투쟁’ 구호가 새겨진 붉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호도과자를 사면서 머리띠를 맨 아주머니에게 “꼭 이기셔요”라고 말하니, 아주머니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찾아갔다. “지나다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격려차 들렀습니다.” 젊은 여성 두 사람이 앉아 있다가 밝은 얼굴로 일어나더니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손이라도 마주잡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이어서 선뜻 손을 내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서 몇 마디 나누다가 어줍은 인사를 마지막 말로 남기고 황급히 노동조합 사무실을 나왔다. “꼭 이기세요. 어려움이 많으시겠지만….”
망향휴게소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가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르곤 했다. 사무실 벽의 칠판에 “휴게소 내 조합원 근무처 순회중입니다. 위원장 백”이라고 써 있는 날이면 휴게소를 몽땅 뒤져서라도 위원장을 만났다.
망향휴게소 노동조합 위원장 이경순(31)씨는 인터뷰 부탁을 몇달이나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응하면서 “노동조합 이야기는 빼달라”고 했다. 자신이 노동조합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국의 노동조합을 찾아다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이경순씨만큼 하기도 힘들다. 몇년 동안 지켜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경순씨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족으로부터 독립했다. 인근 동네에 “소문이 짜한” 부잣집이었지만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소녀의 오기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굴레처럼 만들어 자신에게 씌웠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혼자 살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최소한의 살림이어서 생활비보다는 학비가 훨씬 더 큰 부담이었다. “하루 24시간 내내 여유가 없었어요. 당연히 몸도 말랐었지요. 167cm 키에 몸무게는 45kg밖에 안 됐으니까.” 보통 사람에게는 ‘꿈 많은 학창 시절’이었을 그 무렵을 회상하다가 이경순씨는 “왜 사람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어요?”라면서 눈을 내리깔았다(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어릴 적 이야기를 길게 한 뒤, 이경순씨는 실제로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이경순씨에게 너무 미안하다).
의식주 해결하는 일터를 살맛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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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되기도 전에 정식 발령을 받고 취업했다. 누구나 최우선 순위로 가고 싶어했던 대기업이었다. 2년 남짓 근무했을 때, 직장의 상사가 자신의 잘못을 나이 어린 여직원이었던 이경순에게 덮어씌웠다. 그 꼴을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대판 싸우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나왔다.
“휴게소에 취업한 것은 순전히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기 때문이었어요. 처음에는 2, 3년 동안만 눈 딱 감고 일할 생각이었어요.” 이경순씨가 휴게소 식당에서 행주를 들고 식탁을 훔치는 모습을 본 고등학교 은사님은 손을 마주 잡고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이나 울다가 갔다.
나중에는 ‘카운터’를 보다가 ‘주임’이 되었는데, 회사가 부도나더니 운영권이 잠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넘어갔다가 민영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와중에 사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설립했고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 이후 파업·구속으로 이어진 피눈물나는 일들을 나는 도저히 글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한 가지만 말하자. 노조의 전임 위원장이 직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입히는 존재라고 파악되었을 때, 이경순씨는 조합원들과 회의를 한 뒤, 전임 위원장을 불러 담판을 지었다. “당신은 더이상 위원장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집에 가라”고 했고(실제로는 이곳에 옮길 수 없는 더 심한 표현이었다), 위원장은 그날로 짐을 쌌다.
“휴게소에서 앞으로 몇년쯤 더 일할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 이경순씨는 “정년퇴직할 때까지요”라고 답한 뒤 야무지게 덧붙였다. “그런 곳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2년 전, 망향휴게소가 전국 100여개 휴게소들 중에서 임금·복지부문까지 총망라한 경영평가에서 유일하게 대상을 받았을 때, 이경순씨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었다. “절더러 ‘어용’이라고 해도 좋아요. 처음에 왔을 때는 정말로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회사를 6년 만에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거예요. 이제는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기 싫어해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 울 때 모습 보면 되게 예뻐요. 눈이 커져요. 호호.”
이경순씨가 ‘어용’이 아니라는 것은, 망향휴게소에 고속버스가 거의 들르지 않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조합의 요구에 의해, 회사가 고속버스 기사들에게 적극적인 유치작전을 펴지 않겠다는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그렇게 요구한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상상력에 맡긴다.
파업·구속의 시련, ‘어용’이라 해도 좋다
휴게소에 들르는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냐고 부탁했다. 이경순씨는 뜻밖에도 길게 답했다. “백화점에 가면 사람들은 입구에서부터 그 화려한 분위기에 주눅들어 얌전해지잖아요. 우리가 백화점만큼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양복 잘 빼입은 놈들이 더 ‘싸가지’ 없다는 거 아세요? 다른 사람을 내리깔고 보는 순간 자신의 위치도 낮아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우리 휴게소 직원들은 전국 최고 수준이에요. 짜식들이, 사람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나이가 꽉 차다 못해 한참 넘쳐버린 이경순씨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제 제발 결혼 좀 하라”고 다그치지만, 이경순씨는 자신의 일터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하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그 일과 결혼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어느 신부보다 행복해 보였다. “활활 타는 불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로 끝까지 남을 거예요. 그거면 족해요.” 그 불씨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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