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배마실이 천주교신자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1984년 서울에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집전으로 시성된 이후였을 거다.
우리나라 최초 방인사제였지만 사제수품 받고 채 1년도 사목활동을 하지 못하고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인신부의 발자취는 어디를 막론하고 성지로 개발되었다.
골배마실도 산골짜기에 있지만 성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뱀마을로 불리다가 ‘배마실’ 로 어의전환이 되었다.
배마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골’이란 단어가 어두에 붙어서 ‘골배마실’ 이 되었다.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金濟俊 1796~1839, 이냐시오) 성인과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7살까지 솔뫼에서 지내다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金澤鉉)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 너머에 있는 ‘한덕골’이었다.
한덕골로 내려오기 전에 이보다 더 험준한 인근의 광파리골에 살았다.
그 후 한덕골에서 다시 인접한 굴암(구람)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 일대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골배마실 성지는 아직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골짜기이다.
주변에는 골프장이 많아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굳이 여기를 찾아오지 않는단다.
낙엽이 진 겨울 철 골배마실은 을씨년스러웠다.
바닥에는 얼음이 깔려 있으며 강추위를 녹이는 햇살만이 성인 신부님 동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성인신부님을 묵상하며 그 분의 짧았던 일생을 되돌아보았다.
성지담당신부님이 붙여놓은 당부의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팠다.
“순교자들이 지니셨던 하느님께 대한 숭고한 신앙적 열정을 되새기고 느끼는 시간을 가져라.
교회의 성소자들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을 약속하라” 고 기록해 놓았다.
순간 나는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봉착했다.
특별하게 내세울게 하나도 없었다. 레지오 단원, 성인교리봉사자 이게 전부이다.
열거하기조차 부끄러운 신앙의 자화상이다.
세상일에 빠져 신앙인을 잊어버린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어찌 보면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 아니었던가.
진정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이나 했는가.
골배마실이 아름답게 단장되지는 않았지만 성지순례 한답시고 찾아오는 우리들의 민낯을 신부님을 보셨을 지도 모르겠다.
오죽하였으면 부탁의 말씀이란 표지판을 달아놓았을까.
얼굴이 달아올라 추운지도 모르고 계단을 올라왔다.
순간 성당에서 성소회비를 내지도 않은 내가 부끄러웠다.
자랑할 거도 없는 내가 스스로 교만에 빠져서 살아온 거다.
차라리 김수환 추기경님처럼 바보라고 고백해야 했는데.
차에 올라 속으로 다짐해보았다.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리다.
기도는 성소자들의 밥이 아닌가.
그 분들은 기도를 먹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종이다.
인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지만 황량한 골배마실 성인신부님 생가터 비석 앞에서
순교성인들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적 열정을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성인 신부님의 옥중서간에 나오는 글을 묵상해본다.
“박해는 천주께서 주시는 시련입니다.
주님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세상 어려운 일은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한 담금질로 생각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복음을 묵상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하루의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