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바에즈
존 바에즈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전통 민요와 발라드, 그리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흑인 영가와 백인 영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녀의 초기 앨범들은 대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 또는 미국의 서민층에서 널리 불려졌던 노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차용한 이러한 포크(Folk) 음악들은 동시대 사람들(Folk)에 의해 불려진 시대의 정서와 삶의 애환, 꿈과 이상이 생생히 담긴 지극히 인간적인 노래들이다.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란 삶의 순수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며 개인은 물론 집단 의식의 총체적 표출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도구였다. 때문에 그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장을 가장 인간적인 향취가 물신 풍기는 포크 음악을 통해 펼쳐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에서 기교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실리는 하이톤의 소프라노 보컬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동시에 따스한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기운을 가득 내뿜는다. 이것은 바로 그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그 영혼의 울림에 동화되며 그 안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존 바에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The River In The Pines'나 'Donna Donna', 'Mary Hamilton' 등의 전통 발라드에서 60년대 저항운동의 찬가 'We Shall Overcome', 그리고 'Poor Wayfaring Stranger'와 'Diamonds & Rust' 등에 이르는 수많은 명곡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강한 친화력과 포근히 가슴을 감싸오는 매력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존 바에즈는 41년 1월 9일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멕시코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고,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역시 희곡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가족들이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이사함에 따라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몇 년간을 보내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생활했다.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했으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56년, 비폭력주의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2세의 강의를 들은 그녀는 그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에 만난 간디주의 철학자 아이라 샌드펄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58년 MIT에서 강의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메사추세츠주로 이사를 하는데,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보스톤의 한 커피하우스에서의 포크 공연은 결국 그녀를 포크 뮤지션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은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 오데타 등에 의해 새로운 부흥을 이루게 된 포크 음악의 중심지였고,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희곡을 공부하던 그녀는 전공 수업보다는 그곳의 포크 뮤직 씬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클럽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존 바에즈가 정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59년 케임브리지의 포크뮤직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포크 뮤지션인 빌 우드를 만나 곧 함께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빌과 테드 알레비조스라는 뮤지션과 함께 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발표하며 레코드 데뷔를 이루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의 눈에 띈 그녀는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주간의 그 공연은 그녀의 생에 있어 중요한 기회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포크 싱어 밥 깁슨이 같은 해 7월 11일 개최된 제 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자신의 백업보컬로 세운 것이다. 존 바에즈의 예정되지 않았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의 재능은 쉽사리 눈에 띄었다. 결국 그녀는 이듬해인 60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정식으로 참여하였고,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12년간의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기간 동안 그녀는 여덟 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하며 60년대의 포크 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그녀의 동생인 미미 바에즈(Mimi Baez) 역시 이후 남편인 리처드 파리냐와 함께 듀엣 미미 앤 리처드 파리냐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에서 처음으로 밥 딜런을 만났다. 이후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신의 숱한 콘서트를 통해 딜런을 여러 차례 소개했고, 이 두 연인들은 곧 60년대 미국 포크 씬의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61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바에즈는 곧 첫 전국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반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을 위한 정책을 주장했다. 이 투어는 62년 10월 [In Concert]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앨범 차트 10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 앨범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실린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다. 63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개최된 제 1회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과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그녀는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피트 시거,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한 이때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실황은 [Newport Broadside]와 [The Evening Concert Vol. 1]으로 발매가 되는데, 이 앨범들은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8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흑인 공민권을 위한 데모 행진에서 그녀는 25만의 청중 앞에서 'We Shall Overcome'을 불렀고, 이 곡은 곧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90위와 65년 영국 차트 26위에 올랐다.
밥 딜런이 라이너 노트를 쓴 [In Concert, Part 2](63)는 미국 차트 7위에 올랐고, 6개월 후에는 영국 차트 8위를 기록한다. 특히 이 작품에는 버밍햄의 마일즈 대학에서 녹음된 저항가요 'We Shall Overcome'이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군비 증강의 일환으로 높은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수입의 60%를 원천징수 세금으로 빼앗기게 된 존 바에즈가 거기에 불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물론, 텍사스에서 있었던 반인종차별주의 시위에 참여한다. 그 외에도 그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고 흑인 공민권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는 등 저항의식을 가진 실천가와 영혼의 음악을 들려주는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완전한 어쿠스틱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그리고 영국 차트 3위에 오름으로써 영국에서의 최대 히트작인 된 [Joan Baez 5]가 발매되었고, 그녀의 애창곡 66곡과 에릭 폰 슈미트의 삽화가 곁들여진 베스트 셀러 [The Joan Baez Songbook]이 출간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필 오크스의 곡 'There But For Fortune'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65년의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에 노미네이트 된다. 65년 봄 바에즈와 딜런의 연인 관계는 끝을 맞이했고, 5월에는 미국 밖에서 행해진 최초의 큰 공연인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도노반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Farewell, Angelina]가 발표되었다.
66년 초, 그녀의 초기 세 장의 앨범들이 미국 레코드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드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반전 시위와 흑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64명의 사형선고자들의 감형을 촉구하는 철야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67년 일본 공연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역자는 그녀의 정치적 언급을 오역하도록 CIA 요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철회하였고 CIA 측은 이 일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시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극렬한 반전운동 경력 탓이었다. 독립전쟁 참가자의 자손들 모임인 '미국애국부인회'에서 그녀의 공연 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존 바에즈는 30,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멋지게 응수했다.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녀는 이어 8월에 새로운 앨범 [Joan]을 발표한다. 10월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군 입소대 입구를 점거한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68년 3월 26일, 존 바에즈는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 리더이자 행동주의자인 데이빗 해리스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의 회고록 [새벽(Daybreak)]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다. 69년,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20개월을 복역해야만 했다. 존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하여 차트 36위에 올렸고, 8월에 있었던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71년에는 그녀와 데이빗이 함께 쓴 책 [Coming Out]이 출간되었으며 사운드트랙 앨범 [Carry It On]이 발매된다. 10월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쥘 다생과 그의 아내이자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참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 [Sacco And Vanzetti]는 존과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음악가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 작곡한 작품이었다. 이후 뱅가드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앨범인 [Blessed Are..]가 발매되었고, 밴드(Band)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싱글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 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노미네이트 되었다.
뱅가드 레이블을 떠난 그녀의 새 보금자리는 A&M이었다.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은 이제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녀의 음악 스타일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72년 5월 A&M에서의 첫 앨범 [Come From The Shadows]는 미국 차트 48위에 오른다. 앨범에서 커트된 싱글 'In The Quiet Morning'은 그녀의 동생 미미 파리냐의 작품으로 재니스 조플린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이 곡은 차트 69위를 기록한다. 74년 스페인어로 부른 앨범 [Gracias A La Vida]가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후 그녀는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튜지니아, 아르헨티나 등을 포함한 세계 투어에 들어간다. A&M 시절의 최고작인 [Diamond & Rust]는 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조지아 주의 아틀랜트시는 8월 2일을 '존 바에즈의 날'로 정하고 그녀에게 영예를 주었다. 그녀는 75년 10월부터 밥 딜런과 믹 론슨, 로저 맥귄, 자니 미첼 등으로 이루어진 롤링 썬더 리뷰와 함께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된 더블라이트 세트인 [From Every Stage]로 결실을 맺는다. 76년 말, 그녀의 자작곡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s]가 발매되었고 밥 딜런과의 두 번째 투어를 시작한다. 이듬해의 스페인 투어 도중 그녀는 40년간의 군부독재의 종말을 코앞에 둔 독재자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 생방송에 출연하여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79년, 그녀의 자작곡과 직접 그린 스케치들이 담긴 책 [The Songbook And Then I Wrote...]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 [Honest Lullaby]가 발매되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 음악 시상식에서 78년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다. 그해 그녀는 인권기구인 인본주의 국제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후 13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위원회의 첫 번째 행동은 미국 내 다섯 개의 메이저 신문에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의 내용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와 KRON-TV,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캄보디아 긴급 구조 기금을 결성하여 1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바에즈는 80년 정치적 행동과 음악의 보편성으로 앤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파리 노트르담 사원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발매되지 않았다. 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다. 이때의 투어는 이듬해에 [There But For Fortune: Joan Baez In Latin America]라는 영화로 TV에 방영되었다. 핵무기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 속에서도 그녀는 밥 딜런과의 LA 공연과 폴 사이먼과의 보스턴 공연, 잭슨 브라운과의 워싱턴 공연 등에 참가하였다.
83년의 유럽 투어를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Europe 83]이 유럽과 캐나다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랑스에서 골드를 기록했고, 아카데미 찰스 크로스 어워드에서 '83년의 베스트 라이브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또한 프랑스에서의 투어 중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여 12만 명의 군중을 모았고, 프랑스 최고의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우디 거스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인 [Hard Travellin''에 출연하였고 사운드트랙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85년, 그녀는 자신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클럽 47의 25주년 콘서트에 참여하여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한다. 이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등의 투어를 마친 뒤 69년 이래 처음으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한다.
이후 그녀는 꾸준한 사회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95년 4월에 뉴욕의 바텀 라인 클럽에서의 실황을 담은 [Ring Them Bells]는 화려한 게스트들과 그녀의 감성이 살아 숨쉬는 멋진 라이브 앨범이었다. 존 바에즈는 아메리칸 포크계의 전설로서, 저항정신을 지닌 모범적인 실천가로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창의력과 삶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2007. 2. 22(글 출처 : TONIBOX.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