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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상실의 주체: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매국노(을사오적, 정미칠적) 및 무능한 왕실·위정자들과 일제의 합작품이었습니다. 민중에게는 이 과정에 대한 의사 결정권(선거권이나 참정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권의 부재: 독일/러시아 시민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국가 권력에 대해 정치적 주권자로서 책임을 지지만, 일제강점기 한국민은 피지배 식민지인으로서 국가 주권 자체를 박탈당한 상태였습니다.
2. 한국 민중의 역사적 평가와 책임의 범주
한국 민중에게 '국가 파탄을 막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내부적 한계와 비판적 책임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① 피지배층 전체에게 '공모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 자발적 저항
독일과 러시아 민중 상당수가 기득권이나 민족주의적 열망에 매몰되어 독재자의 침략 행위를 방관·동조했던 것과 달리, 한국 민중은 망국 전후부터 지속적인 저항 주체로 기능했습니다.
의병 전쟁 및 만세 운동: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전국의 의병 전쟁, 1919년 3·1 운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민중은 자발적으로 주권 회복 투쟁에 나섰습니다.
친일 매국노에 대한 민중의 단죄: 당시 민중은 이완용 등 친일파의 집을 불태우거나(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응징 등) 친일 관료들을 직접 단죄하는 등 국가 파탄의 세력에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부산일보
② 구한말 조선 민중과 위정자의 역사적 책임 (구조적 한계)
근대적 시민 의식의 부재: 성리학적 신분제 질서에 갇혀 근대적 국가관과 민주적 주권 의식을 빠르게 제고하지 못했던 사회적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분열: 봉건적 수탈에 신음하던 민중(동학농민혁명 등)이 국왕과 조정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이는 근대화 및 자강(自强)운동이 국가적 역량으로 결집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③ 일제강점기 내부의 '부역(친일) 책임'
일제강점기 전체 민중을 '가해자'로 볼 수는 없지만, 식민 통치 기구에 자발적으로 협력하거나 이익을 도모한 친일 부역자 및 적극적 동조자들에게는 엄중한 반민족적·정치적 책임이 따릅니다.
단순 생계형 순응을 넘어 일제의 침략 전쟁(학병·징용 권유 등)을 선전·선동하거나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이들은 식민지 민중 내부의 명백한 가해 책임자들입니다.
3. 책임 비교 요약
구분나치 독일 / 푸틴 러시아 국민구한말 & 일제강점기 한국 민중
| 권력의 성격 | 자국 내 내부 독재 체제 | 외세(일제)에 의한 강점 및 식민 통치 |
| 민중의 지위 | 주권을 가진 정치적 주체 (투표/방조) | 주권을 박탈당한 피지배 식민지인 |
| 주된 책임의 성격 | 정치적·방조적 책임 (독재자와 침략 전쟁을 선택·방치함) | 구조적 근대화 지체 책임 및 일부 부역자들의 친일 책임 |
| 역사적 행동 | 체제 순응, 제국주의 전쟁에 적극/소극 동조 |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자발적 국권 회복 저항 |
결론
조선 말기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 근대적 주권 의식 형성의 지체라는 측면에서 당대 사회 전체의 역사적 반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독일이나 러시아 국민처럼 "자신들이 선택하거나 방조한 권력이 타국을 침략하고 독재를 휘두른 것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정치적 공모 책임"을 한국 민중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 민중은 국권 상실의 원인이기보다는 피해자이자, 피탈된 국권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한 주체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