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평전 전3권 중 제1권
지은이: 조영래
(저자 약력)
* 고 조영래
지은이 조영래는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 재학중 한일회담반대, 삼성재벌 밀수규탄, 6^3456,1245^부정선거 규탄.
3선개헌반대. 공명선거쟁취 투쟁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사법시험 준비중 전태일열사 분신항거사건을 맞아 전태일정신
계승에 힘썼다.
1971년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고
민정학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여 6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였다.
1980년 수배해제 및 복권 후 1983년 변호사를 개업하여 1990년 12월 폐암으로
타계하기까지 인권변호와 민주화운동에 진력하였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객원편집위원을 지냈으며 사후 나온 저서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조영래 변호사 변론선집" 등이 있다.
이 아픔, 이 진실, 이 사랑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그럴듯한 말이 있지만, 참다운 인생, 참되기 때문에
가슴 찢어지게 아프고 목메이게 슬픈 인생, 죽음이 무덤이 아니고 무덤 속 어두움을
솟구치는 불길로 타오르는 인생은 예술보다 길다는 것, 아니 영원이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그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부끄러운 부끄러운 죄인이 되어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으로 목숨을 불살라
버리는 인생, 죽음에 몸을 던져 죽음을 폭발시켜버리고 새 희망으로 햇살쳐 오는
인생이 부활이라는 걸 우리는 믿습니다.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이야기는 6천만 겨레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풀어져
흐르는 맑은 강이 되어야 합니다. 앞을 죽음처럼 가로막는 절벽을 무너뜨리며 흐르는
민족사의 물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은 땅 속을 흐르는 이 물줄기
속 한 물방울로서.
1983년 3월 1일
서울 무너미에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회장 문익환
태일의 진실이 알려진다니
태일의 생에 대한 책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날 밤, 저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 죽음을 헛되어 말라"고 소리치며 숯덩이가 되어 쓰러진
태일이, 저의 손을 꼭 잡고 "어머니 담대해지세요. 어머니, 내가 못 다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하고 또렷이 부탁하던 음성이 귓전을 빙빙 맴돌아 가슴이
답답해서였습니다.
태일이 죽은 지 올해로 꼭 14년째. 십년이 한 바퀴 돌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정말
너무너무 세상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그때 생각을 하면 억누를 수
없는 게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태일이 그토록 제 한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찾고자 했는데 지금 과연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찾아졌는가 생각해볼 때, 또 10여 년을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던 노동조합마저 이제 사라져버리고 조합활동을 열심히 했던 노동자들도 그
열심히 한 덕택에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겪고 있는 지금 형편을
생각해 볼 때 만약 태일이가 다시 살아 나타나 "어머니, 지금 무얼하고 계세요?"라며,
안타까운 모습으로 물어본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저는 태일의 진실된 삶이 그래도 얼마만이라도 담겨져 있는 내용의 책이라면 그저
고맙고 내심으로는 반가울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태일은 사람답게 살고자 제 온 힘을
들여 발버둥쳤었기 때문입니다. 태일이의 그 안타까운 삶에의 집착과 그리고 그러한
끈질긴 집착마저 끊고 마침내 제 목숨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단순하게 곡해되어 이야기되는 것을 들으면 저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저는 하느님께 이야기하고 또 기도하고, 태일에게 이야기하고 또 기도하며,
태일의 진실된 모습이 십 수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 세상사람들에게 바르게
전달되는구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태일이 때문에 고생하신 분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무식한 저 때문에도 물심양면으로
고초를 겪으신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태일이의
참목숨은 영원히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분들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태일이의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고난받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무언의 발걸음 속에 태일의 뜨거운 절규는 기어이 살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도 열심히 사람답게 살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바쳤던 태일의 죽음이
아무쪼록 진실되게 밝혀지고, 그것이 노동자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한
자그마한 거름이 될 수 있다면 이 못난 어미의 힘없는 가슴도 조금은 펴질 수
있겠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해주신 분들, 특히 기념관건립위원회 여러분들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아무쪼록 태일의 염원인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이 하루라도 빨리 보장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1983 년 5월 20일
(개정판을 내면서)
우리가 이 책의 원고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을 광주학살의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군부독재가 살기등등한 기세였던 1982년이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청계피복노조의 전 간부였던 민종덕씨가 대학노트에 깨알 같은 잔글씨로
쓰여진 원고의 복사물을 들고 와 출판을 제의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출판할 경우 출판사가 박살날거라는 주위의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원고는
우리를 울게 만들었고 또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작업을 서둘렀고 이듬해 6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엮은이로 하여 책이 나왔다. 당시로서는 저자가 누구인지
묻는다는 것은 금기에 속하였고 안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책이 나오자 예상하고 우려했던 당국의 탄압은 그 어느 경우보다도 '신속'했다.
문공부는 즉각 '판매금지' 조치(정확하게는 '시판중지 종용'이라는 점잖고 다소 덜
강압적인 것처럼 보여지는 표현을 쓰고 있었지만)를 내렸다. 또 출간 직후
출판기념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경찰이 장소를 원천봉쇄하고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연금하는 한 편 출판사에서 책을 출고하는 것을 막아 행사를
무산시켰다. 이 책의 발간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호응 또한 '신속'했다. 그리고 탄압이
거세어질수록 독자들의 사랑은 더욱 뜨거워지면서 이 책은 당대의 고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밤새워 눈물 흘리며 읽었다는 독자들의 편지와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평화시장 어린 동심들의 고통에 항상 가슴저려 하며 시들어가는 그들의 생명을
적시는 한방울의 이슬이 되고자 스물 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 이 책은 그의 삶과 투쟁 그리고 죽음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시켜 냄으로써
그의 죽음을 노동운동의 불꽃으로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관심에 길들여진 세대의
잠자는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전태일의 살아 있는 육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발간은 돌베개의 출판방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펴내려는 돌베개의 노력은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시작되어 발전하는 우리 노동운동의 대열과 함께 하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친 이후 이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잇는
노동운동의 대열 속에서 전태일의 불꽃은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 있음을 보면서 초판을
펴낸 지 7년여 만에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초판의 활자가 너무 작고 조판이 조밀하여
많은 사람이 쉽게 읽기 어려운 점을 해소하려는 것이 개정판을 준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지만, 개정판에서 새로워진 부분이 없지 않다.
첫째, 초판 발간 당시 원고의 일부 유실로 바쳤거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표현을
바꿨던 부분을 원문에 충실하도록 바로잡았다.
둘째, 초판에서 부록으로 실었던 자료들을 빼고 열사의 사진자료들을 본문 속에
넣었다. 부록의 자료들중 열사의 수기 등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전집"에
담겨 있고 다른 자료들은 지금으로서는 커다란 의미가 없다고 여겨져서이다.
셋째, 책 제목을 '전태일평전'으로 바꾸었다. 7년간의 상황 변화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우회를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전태일'로 나아가게끔 하였고,
독자들 도한 이미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이다.
넷째, 개정판을 내기에 이르러서야 저자를 최초로 밝히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대신에 '조영래 지음'이라고 되어 있듯이
며칠 전 타계한 변호사 조영래 씨이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추측이나 풍문은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이 개정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싣게 된 장기표 씨의 글을
통해서였다. 장기표 씨는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과정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자임을 드러내지 않았던 곡절 등에 관해서 이 글을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전태일열사의 죽음을 노동운동을 부활시키는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저자의 막역한 친구로서 이 책의 저술작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장기표 씨는 조영래 씨가 불치의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자신이 '증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생전에 그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를 끝내 거부하기라도 했던 듯이
이 개정판 발간을 며칠 앞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저자는 평소에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연이어졌던 이 땅의 숱한 죽음들을
보면서 행여 이 책이 그러한 죽음들에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나 자책하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그였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아직 우리는 그의 갑작스럽고도 어이없는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과 슬픔에 젖어
있다. 그러나 그는 갔지만 그가 전태일의 삶과 사랑과 투쟁을 통하여 투영했던 그
자신의 삶과 사랑과 투쟁은 우리들의 혈관 속에서 전태일과 함께 맥박칠 것이라
믿는다.
1990 년 12월 15일
편집부
전태일 일기의 한 부분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도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전태일의 1970 년 8월 9일 일기에서
서
1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 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 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이라고 부른다.
인간 선언.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 번 못보고
하루 열 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죽었다.
그는 말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한 것이라고.
그는 고발하였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인간이면서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면서도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고, 이들은
"모든 생활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다"고.
그리하여 그는 맹세하였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그는 싸웠고, 그는 죽었다.
그는 어떻게 죽어갔던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의 죽음을 보도한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가 대략의 사정을 설명해 준다. 이 기사는 표제가 '즐거운 작업을'
꺾인 집념, 부제가 '재단사 전씨 분신 자살', '동화, 평화시장 등 400여 피복제조
작업장 환경, 시설 개선요구', '경찰 제지하자 동료 16명 혈서', '16시간 과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으로 되어 있는 "한국일보" 1970 년 11월 14일자 사회면 톱
기사이다.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던 종업원이 당국과 업주의 불성실한 태도에 반발,
분신자살했다. 13일 하오 1시 30분께, 서울 중구 청계천 6가 피복제조상인
동화시장 종업원 전태일(23, 성북구 쌍문동 208) 씨가 작업장 안의 시설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려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자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기도, 메디컬 센터를 거쳐 성모병원에 옮겼으나 이날밤 10시께 끝내
숨졌다.
전씨는 지난 10월 7일, 청계천 5__6가 동화시장, 평화시장, 통일상가 등 4백여
피복제조상의 작업장 시설을 근로기준법에 맞게 개선해 달라는 진정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두 달이 넘도록 아무런 시정도 없이 이날 낮 1시 20분, 3개 시장 재단사
친목회 회원 10여 명과 함께 시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려 했다.
전씨 등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미리 출동한 경찰에 뺏기자, 전씨 혼자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자실을 기도한
것이다.(이하 생략).
"한국일보" 1970 년 11월 14일
------
2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한 젊은 노동자가
죽어갔다는 것일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되지 아니한다. 먼 나라의 어떤 유명한 영화배우가 손가락을 다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어도, 노동자가 죽어간 사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다.
매일매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직업병이 숱한 젊은 목숨들을 갉아먹고, 때로는 인간 이하의 가혹한 노동환경이
불운한 노동자들을 비명에 죽게 하고, 해마다 수백 수천 명의 광부들이 무너진
갱도 속에 생매장되어 가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한다. 가난에 못박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많은 밑바닥 인간들의 죽음의 사연은 세상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리 목숨'이라고 말한다.
노동자의 죽음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전태일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고, 평생을 주린 창자가 차도록 밥 한끼
포식해 본 일이 드물었으며 죽을 때까지도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았지만, 비록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름없이
살아온 핫빠리 인생이었지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죽어간
그의 죽음만은 세상에 알려졌고, 세상에 충격을 주었고, 마침내 얼음처럼 굳고
차디찬 현실을 뚫는 불꽃이 되어 하나의 사건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던진 충격, 그의 죽음이 우리 민중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오늘 이 시점에서까지도 충분히 측량할 수가 없다.
노동 운동을 하던 한 젊은이가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고 그와 함께 스스로
불태워 죽었다는 이 보기 드문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자, 우리 사회에 하나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평화시장 어두운 골방 속의 참혹한
노동에 관한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전체 한국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간 이하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껏 아무도 발음하려고 하지 않던 '노동자'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어휘들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영원한 침묵의 그늘 속에 덮여 버려져 있었던 노동문제가
신문, 잡지, 지식인들의 대화, 학생과 노동자들의 항의의 목소리 속에 공공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변화, 발전은 물론 그 당시의 정치,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태일이라는 한 인간의 육성이, 그 처절한 사랑과 분노와 항의로 불타는 육탄이
우리사회에 던진 충격의 결과였다.
그가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즉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는 학생 백여 명이 모임을 갖고 가칭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 전태일의 시체를 인수하여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전태일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성모병원 시체실로
몰려가서 전태일의 어머니를 만나 시체 인수의 뜻을 밝히고 허락을 얻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는 그때까지도, 아들의 뜻이 관철되지 아니하는 한
병원측으로부터 시체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정치, 사회정세는 격동을 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아연
긴장, 노동청을 통하여 전태일의 유족들과 노동자들을 무마하려 하였다.
11월 16일 오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생 4백 명이 집회를 열고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 11월 20일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생 2백여 명, 문리과대학생 1백여 명, 이화여자대학생 30여 명이 법과
대학 구내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갖고, 전태일을 죽인 기업주, 어용노총, 지식인, 모든
사회인들을 고발하며 항의 시위에 나서 기동경찰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연세대학생 2백여명, 고려대학생 3백여 명도 항의 집회를 열고 "모순된 경제질서,
극단화된 계층화 현정권의 개발독재를 전민중에게 고발"하는 내용의
'국민권리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날을 기하여 서울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소요사태는 날이 갈수록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드디어는
종교계까지도 이에 합류하게 되었다. 11월 21일, 휴교령이 내려진
서울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철야농성이 벌어졌으며 이날 밤 법대생 1명이
한강물에 뛰어들어 투신자살을 기도하였고, 문리대생 1명이 휘발유통을 가방 속에
넣고 교정에 들어가 분신자살을 하려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11월 22일에는
새문안교회 대학생부 학생들이 교회 안에서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고
참회하는 금식 기도회를 가졌다. 11월 23일에는 연세대생 2백 명이, 11월
24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졌다. 11월 25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신, 구교 합동으로 전태일 추도예배를 가졌다. 이날 추도사에서 김재준 목사는,
"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서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 각처의 종교단체들의 확산되어, 대체로
학생들이 겨울방학에 들어갈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이때 결집된 학생들과 종교계
인사들의 각성과 투쟁이 1970년대의 박정희정권 비판세력으로 그대로
연결, 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태일투쟁은 현실의 질곡 아래 짓눌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있었던 모든
민중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어 빈사상태에 있던
한국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항의가 종래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한국 노총 아래서의
무기력한 어용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제기 되었다. 신문보도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진 몇 가지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11월 20일, 청주의 여공 50명이 상경, 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는데, 이러한 투쟁양상은 거의 전례없는 것이었다.
11월 25일, 한미합작투자업체인 조선호텔에서는 그 동안
노동조합(철도노조관광지부 조선 호텔 분회)을 결성했다가 분회장이 납치당하여
행방불명됨으로써 노조를 해산당하였던 호텔 종업원들이, 노동조합을 재건하려다
회사측에 발각되어 주동자 5명이 해고당한 데 반발, 그 중 한 명이 호텔 구내에서
휘발유병을 들고 분신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27일에는 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이 사용자측의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하여 농성투쟁을 벌이면서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하여 사용자와 경찰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12월 21일에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의 동료 12명과 어머니 이소선 씨가
노조결성을 방해하는 경찰 처사에 항의하여, 평화시장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하면서 출동한 기동경찰을 향하여 노조방해 책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전원
분신자살하겠다고 위협, 마침내 그들을 굴복시켰다.
다음해인 1971년 2월 2일에는 서울 중구 북창동에 있는 한식 음식점
한국회관의 종업원 김차호 씨가 "월급 4천 5백원을 받으면서 하루 18시간씩
노동할 수 없다", "평화시장 전태일 선배의 뜻을 따라 우리같이 딱한 전국
요식업체 종업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죽음으로 호소하겠다"고 하면서 50여 명의
동료 종업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동 회관의 한 방에서 프로판개스통을
풀어놓고 약 2시간 정도 경찰과 대치하며 농성하다가, 성냥불을 켜대어
분신자살을 하려 하였으나 경찰관이 달려들어 불을 꺼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건들은 한 국 노동자들의 고통과 분노가 목숨을 거는
항쟁에 서슴없이 나설 정도로 극한적인 데까지 다다르고 있었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이러한 격렬한
쟁의의 폭발도, 바로 전태일이라는 한 청년노동자가 육탄으로 던진 '인간 선언'에
바치는 전체 노동자들의 공감과 환호와 분노의 갈채였던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 그리고 그에 잇따른 학생, 노동자, 종교인들의 궐기는 노동문제를
사회여론의 제1차적 관심사로 등장시켰다. 종전에는 노동문제라면 사실보도조차
기피하던 신문, 방송, 잡지 등의 보도기관은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노동문제에 관한 보도, 특집기사, 논설을 실었다. 마치 전태일이 죽음으로써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문제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생겨나기나 한 듯했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는, 6.25가 1950년대를 상징하듯, 4.19가 1960년대를
상징하듯,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의 한국의 문제를 상징하는 가장 뜻깊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11월 13일 직후 한동안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언론기관들은
논설은, 학생, 노동자, 종교인을 주축으로 한 전태일투쟁이 격화되면서부터는 태도를
바꾸어 노동자들의 참상을 폭로하고 노동행정의 실태에 비판을 가하며
'노동정책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지금까지는 오로지 경제개발을 위하여 근로자에게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을
강요해왔던 것인데, 그러한 정책이 점차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드러냈기 때문도
있다. 전태일 씨 사건이란 비극을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다. 지금의 전반적인
노동환경은 매우 한심스러운 것이고 산업재해는 빈도와 규모가 늘어가고 있으며,
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종래의 노동정책도
일대 전환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노동당국은 자율적인 노동운동을
보장하고 권장하는 역할도 했다고 하기 어렵고, 때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마저 주었던 것이다.
'노동행정에 대한 관심', "조선일보" 1970 년 12월 15일
전태일의 죽음으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 21일, 당시의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씨는 전태일사건에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 "현정권의 반근로자적
노동정책에 대하여 항의"한다고 하였다. 이 날짜로 신민당은 전태일사건을
'정치문제화할 방침'임을 밝혔다. 전태일 사건의 이른바 '정치문제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1971 년 1월 23일, 김대중 후보는 연두기자회견에서 일곱 번째 문항으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노동 3법의 전면 개정, 자유로운 노동운동
보장, 근로기준법상의 맹점 시정, 각급 노동위원회에 대한 강력한 집행명령 및
제재권의 부여"를 주장했다. 한편 1971년 1월 17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도
1971년도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일곱번째 문항을 노동문제로 하여, "첫째는
근로자의 노동환경과 복지향상의 문제이고, 둘째는 노동환경, 복지향상도 중요시하면서
경제발전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근로자의 복지를 기업의 생산과 함께
점진적으로 향상시켜 나아갈 작정"이라고 말하였다. 1969 년도 회견에서
열두번째 문항으로 등장했다가 1970년대에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던 노사문제가 이와
같이 1971년도에 이르러 일약 일곱 번째 문항으로 등장한 것 자체만으로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태일사건에 던진 충격에 전사회가 얼마나 동요되었던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
3
이렇게 하여, 1970년 겨울부터 1971년 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태일'이라는
이제껏 듣고 보도 못했던 낯선 이름 석자는 사회여론의 움직임 속에, 신문과
잡지들의 보도와 논술 속에, 정치인들의 구호와 선진 속에, 종교인들의 참회와
기도 속에, 그리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부르짖음과 가슴속에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으며 이상한 충격을 전파하는 이름이었다. 어떤 시민들은
전태일의 유가족에게 조위금을 보내면서 부끄러운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고
하였다. 어떤 노동자단체들은 전태일의 기념비와 동상을 건립하겠다고 모금을
추진하였다. 어떤 독지가들은 전태일기념회관을 짓겠다고 하였다. 어떤
젊은이들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전태일 추도모임을 갖고 전태일의 수기를 유인물로
찍어 서로 돌려보거나 노동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6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지금, 과연 전태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이 더더욱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는 이 시각에 전태일의 몰골은 어디서
우리를 향하여 소리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버렸는가?
전태일의 죽음과 그 다음해인 1971년의 선거를 전후하여 한때 활기를 띠던
노동운동은, 1971년 10월 계엄령이 발동되고 뒤이어 12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 다시금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 그 이후 제정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노동운동의 주요 무기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노동자들의 손에서 사실상 완전히 박탈해버렸다.
이와 동시에 죽은 전태일의 새로운 수난이 시작되었다. 몸을 불사르는 지옥의
불꽃 속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울부짖던 그의 인간 선언은 다시금 무거운
침묵의 장벽에 가리워졌고, 그의 의지를 대변하던 많은 젊은이들은 학원에서
쫓겨나 어디엔가로 끌려갔으며 학생단체는 해산당하고 노동, 언론, 종교계는 새로운
형태로 강화된 감시와 통제하에 놓여졌다. 그가 목숨을 바쳤고, 그의 어머니와
동료들이 온갖 유혹, 피를 말리는 탄압과 기아를 이겨냄으로써 결성한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 지부'에서는 전태일
사진이 철거당하였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대로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전태일의 목소리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멀어져갔다. 공포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사이에 사람들은 전태일의 불꽃을 잊고
말았고 힘을 잃어버린 듯이 보인다. 정말 전태일은 죽어 흙 속의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태일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은 흐려져 버렸다.
그러나 참으로 전태일은 죽었는가? 전태일의 죽음을 뚫은 불꽃은 환상이었던가?
전태일투쟁은 패배하고 끝났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속단이다. 천만에, 전태일은 죽지 않았다. 전태일의 불꽃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전태일투쟁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며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대답이다.
전태일의 몸을 불사른 불꽃은 '인간 선언'의 불꽃이었다. 그것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성하여도 그리하여 그것이 아무리 인간을 짓누르고 무력화하고
파괴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내 노예일 수 없고 끝내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그 폭탄적인 진실을 온몸으로써 증명한 인간 역사의 영원한
승리의 기념비였다. 일의 불꽃도 결코 죽지 않는다.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권력이
존재하는 한, 억압과 착취가 인류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전태일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보라! 이것이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약속이었다.
친구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뇌성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거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이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유서)
------
4
오늘 전태일은 어디서 불타고 있는가?
전태일은 이 시각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이렇다.
전태일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속으로 되돌아가 그 안에 살아 있다. 아들이
죽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년여의 세월을 하루같이 병약한 체구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서, 모든 잔학한 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
이소선 씨. 이 분은 후일 역사에 반드시 기록될 것이다.
또, 전태일은 더욱 더 심해지고 있는 억압 아래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민중의 숨결속에 눈물속에 죽음속에 살아 있으며, 역경 가운데서도 생존권과
인간다운 노동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우리 노동자들의 뜨거운
가슴속에 살아 있다.
전태일은, 부패와 특권과 빈곤과 폭압이 없는 내일을 위하여 숨죽여 준비하고
투쟁하고 있는 우리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평화와 통일의
새 역사를 창조해가고 있는 모든 이 들의 손길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전태일은 여러분에게로 간다.
이 결함투성이의 책자에, 전태일에 관한 약간의 진실이라도 담겨져 있다면,
당신의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인종, 계층, 신조, 사상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태일은 반드시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소리칠 것이다.
1976 년 여름
제1부 어린 시절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은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불우했던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의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전태일의 1969 년 12월 31일 일기에서)
--------------
1. 밑바닥에서
1962 년 여름,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이는 어느 한낮에 전태일은 아무도 반겨줄
사람 없는 부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때의 모습을 그의 수기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전태일은 1969__70년에 걸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 방대한 분량의
수기를 썼는데, 이 책 속에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문은 모두 그의 수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태양은 마른 대지 위의 그 무엇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이 이글거린다. 열네 살의
한 소년이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옛날 그가 살던 영도다리 쪽으로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국제시장 어느 양화점 쇼우윈도우 그늘진 곳에서
잠시 갈증 나는 더위를 피하고 있다.
소년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반항함이 없이 생각한다. 아, 저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길래 전부가 다 행복한 얼굴들일까? 나는 왜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계절에 맞지
않는 헌 때뭉치 옷을 입어야 할까?
누구하나 그 소년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전태일의 어린 시절이었고 짧은 평생의 기록이었다.
항상 굶주려 있는 허기진 배, 항상 지칠대로 지쳐 있는 몸과 마음, 가난으로 못
간 학창에의 서러운 꿈, 부유한 사람들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고
거부당한 소외감, 끝없는 노동과 방황, 그 지루한 20여 년 동안을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철저하게 학대받고 철저하게 좌절된, 눈물마저도 메말라버린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야 했다.
1948년 8월 26일 이제 막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루 민족이 다시금 강대국의
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전세계가 좌우대립 속에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 전태일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 씨는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였는데,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집에다 미싱 한두 대를 차려놓고 자작으로 피복제품업을 하거나
삯일을 하였다. 원래 소규모 피복제조업이란 수요의 변동이나 외상거래의 불안에
영향을 크게 받아 매우 투기성이 농후한 것이어서, 그는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는 사이에 좌절감이 쌓여 어느샌가 폭음과 술주정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제품업에서 실패를 보면 가산집물을 다 팔아 빚을 갚고 나서, 빈털터리인
가족들을 길바닥에다 버려둔 채 휙 집을 떠나 몇 달이고 떠돌아다니면서 하기 싫은
임시 노동자 생활을 하고, 그러다가 또 미싱 한 대라도 차려놓을 기회가 생기면
다시 가족들에게로 돌아오고, 그러다가 일이 뜻대로 잘 되어나가지 않으면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으며 죄없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욕설과 매질을 퍼붓는--이것이 그의
어두운 평생이었다.
어머니 이소선 씨는 연약한 몸이었지만 매우 명석한 두뇌와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친아버지는 그녀가 세 살이었을 때 농촌에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일제경찰의 손에 끌려가 동네 뒷산에서 학살되었다. 그 뒤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그녀는 온갖 설움을 겪고 농사일에
혹사당하였다. 처녀 시절에는 이른바 '데이신따이'로 일본땅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하였다.
8^3456,1,15^ 후 고향에 돌아와 전상수 씨와 결혼하고부터는,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문전걸식으로부터 광주리행상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온갖
종류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의붓아버지가 낳은 자식들 틈에 끼어 구박을 당하면서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인간차별이라면 아주 치를 떨게"되었다고 한다. 경찰이 판자촌을
철거시키거나 광주리행상들을 거리에서 몰아 낼 때에 그녀가 앞장서서 동료들을
규합하여 경찰과 싸운 일이 여러 번이었고, 그러다가 한 번은 사흘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일도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어느땐가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자식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매우 엄한 교육을 하였다.
전태일은 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가 분신자살을 하였을 때 그의
친척들은 입을 모아 "이소선이 결국 제 아들을 죽였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전태일이 태어난 곳,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서 그 무렵 강대국들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고 있었던 치열한 좌우익 싸움은 그 뒤 우리 민중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생존의 권리를 요구하는 모든 밑바닥 인생들의
집단운동에 위험시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운동은 마치 공산주의운동이나
마찬가지인 듯이 오인 받아 철저한 제약 아래 놓여지게 된 것이다.
전태일, 그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민중의 아들, 억압의 아들로 이 땅에 왔다.
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그때까지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제품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어느 염색공장에다 염색을 맡긴 원단이 불행하게도 오랜 장마를
만나 다 상해버리는 바람에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기술은 있으니 서울
가면 어디든지 취직할 수 있으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는 그 해 여름
가족들을 이끌고 왜정 때 잠깐 와 본일 박에 없었던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지금까지도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들과 팔다리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날마다 몰려드는 곳이 서울이다. 땅 잃은 농민들, 흙에 묻혀 아버지
어머니가 겪었던 괴로운 무지랭이의 삶을 이어받기를 거부하는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어서 멀쩡한 팔다리를 갖고도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는 실업자들, 그
밖에도 살 길을 잃은 가지가지 사연의 사람들이 특권과 부귀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주워먹기 위하여 그들의 지친 발길을 최후의 종착지인 서울로
돌린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발걸음은 이렇게 해마다 서울로 향하였고,
그리하여 서울의 판자촌, 뒷골목, 이른바 '우범지대'는 때려부숴도 때려부숴도
더욱 늘어만 갔다.
전태일의 가족들도 이렇게 하여 서울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그에게는 태삼(어릴 때는 흥태라고도 불렀다)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순옥이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태일의 아버지는 서울까지 오기는 왔으나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해마다
몰려드는 그 많은 실업자들이 어떻게 다 서울에서 취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양복기술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는 결국 망망한 서울바닥에서 2년 동안을 임시임시
생기는 일거리를 찾아 평화시장, 중부시장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실업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업자가 되어 본 일이 있는 사람, 실업자인 아버지를 가져본 일이 있는 사람은
알리라. 그 지루하고 짜증나고 불안하고 초조한 생활. 그 생활에 으레껏 따르는
폭음과 주정, 자학과 좌절, 부부싸움과 부자간의 불화, 그 숨막히는 절망 서울의
실업자가 굶주린들 무엇으로 배를 채울 것인가? 병이 든들 어디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겠는가? 자식이 자란들 어떻게 가르쳐 것인가?
태일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염천교다리 밑에서 노숙하면서 석달 가까이 만리동 일대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여 연명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밤에 잠자는데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불쑥 나타나서 그때 돈으로 3천 원쯤 주면서 "몇 달 뒤에
돌아와서 천막집이라도 살테니까 죽지 말고 있으라"는 한마디를 하고는 다시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 돈을 장사밑천으로 하여 처음은 채소행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지게꾼들을 상대로 한 팥죽장사, 비빔장사, 찹쌀떡장사 따위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물건 광주리를 이고 중앙시장, 남대문 육교, 중부시장,
미아리 등지로 순경들이나 시장경비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그녀는 하루하루 번 돈에 싸래기 쌀 반 되씩만 팔아먹고,
남은 돈은 10월, 20원씩 모조리 저축하였는데, 한 2년 동안 그렇게 하고 나니
그렇게 하여 저축한 돈에다 남편이 때때로 번 돈을 합하여 천막집 한 채에 재봉틀
한 대를 살 만큼 되었다.
이리하여 태일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재봉틀 한 대를 사놓고 손수 삯바느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여덟 살이었던 태일은 남대문
초등공민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 처음으로 짧은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단 안정된 생계를 갖게 되자 태일의 아버지는 그 잘 마시던 술도 끊고
부지런히 일을 하였는데, 원래 양복기술이 좋은 편이었던지라 주위 사람들의
호평을 얻어 삯바느질을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못되어 판자집 한 채를 사고,
남대문시장 안에 있던 대도백하점 2층에다가 가게를 장만해서는 재봉틀도 몇 대
더 늘리고 미싱사까지 두면서 사업을 벌이게끔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부지런한 가장에게 행복으로 통하는 문을 열러 주지 않았다. 1960
년 4^3456,1,24^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는 부로커를 통하여 어떤 고등학교의
체육복 수천 벌을 단체주문 받게 되었는데, 허겁지겁 그의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는 등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자금을 마련하여 일을 끝마치고 옷을 납품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곧 4^3456,1,24^ 혁명이 일어났는데 주문을 받아온 부로커는 학교에서
받은 옷값을 떼어먹고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어디서 호소할 것인가? 그는 채권자들의 독촉에 견딜 수 없어 가게와 재봉틀
일체를 양도하고, 살고 있던 판자집마저 다 팔아 빚을 청산하고 하루 아침에 빈
손으로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할 때 사귄 친구 몇 명과 또
그와 거래가 많았던 원단가게 주인이 그를 동정하여 이태원 외인주택 근처의
산마루턱에다 판자집 셋방 한 칸을 얻어주었으나, 그는 낙담한 나머지 한 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폭음하면서 하루하루를 허송하기 시작했다. 태일의 어머니는 이
사태에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자가 되다시피 하였다.
--------------
2. 가출, 노동, 방황
그 해에 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서 남대문국민학교로 편입하는 시험을
처렀는데 여러 응시자들 가운데 그 혼자만이 합격을 하여 전학을 하게 되었다.
식구는 여동생인 순덕이가 하나 더 늘어 모두 여섯 식구인데, 누구 한사람 돈을
버는 사람은 없고 게다가 정신이상자까지 발생한 가정환경은 어린 태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는가.
밥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아졌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방도는 없었다. 몇
끼씩을 굶어가며 학교에 다니게 된 그는,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신문팔이 소년을 보고는 자신도 신문을 팔기 시작했다. 수기에 의하면 그는
어때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이 어디 있나?"하는 생각으로
신문팔이를 시작하였다 한다. 이때 그의 나이 열두 살.
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이 파하고 남는 시간에 신문을 팔아가지고서는, 가족의
식비를 벌기가 어렵기도 하였거니와 또 너무 힙겹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그럭저럭
학교에 결석하는 일이 잦아졌고, 4학년초에는 아주 학교를 중퇴해버리게 되었다.
얼마 후 식구들은 이태원집에서 밀린 방세를 못 내어 쫓겨나서 용두동 개천가의
천막촌으로 왔다. 처음 얼마간은 남의 천막들 사이에 비집고 앉아 한뎃잠을
잤는데, 그 뒤 어떻게 어떻게 하여 구한 낡은 비닐장판과 나무막대기들을
한번씩 한번씩 붙여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아버지는 폭음이 더욱 심해졌고
어머니와 다투다가 집을 나가서 며칠씩 돌아오지 않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는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있었으나 하루하루 배를 곯는 자식들을 먹여살릴 일이
큰 걱정이었다. 태일이가 신문을 팔아 가져온 돈으로 고물장수한테
빈병을 사서 밤낮으로 닦아 청량리시장에 나가 팔았는데, 그것으로 보리쌀과
소금은 근근히 살 수 있었으나 반찬 살 돈이 없었다. 밤중에 개천으로 내려가서
썩은 물에 버려진 곰팡이 낀 무말랭이를 다라이에 주워담아 가지고 집에 와서
씻은 후 고춧가루를 버무려 청량리시장에서 팔고, 남은 것을 태일이 남매에게
주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병약한 몸으로 너무 시달린 어머니가 다시 병이 악화되고 그 위에
가슴앓이까지 생겨 운신도 못하는 산송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여섯 식구의 생계를 어린 어깨에 전적으로 떠맡게 된 태일은 두 살 아래인 태삼이를
데리고 동대문시장에 나가 삼발이장사를 시작하였다. 주부들이 부엌에서 쓰는 삼발이,
솔, 조리, 방빗자루, 적쇠 등을 어떤 위탁판매소로부터 위탁을 받아다가 팔아서
물건값을 돌려주고 남는 이문을 먹는 장사였다. 삼발이는 만들기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동대문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두 형제가 밤늦게까지 용두동
논바닥에서 삼발이를 만들곤 하였다. 전태일의 수기는 이렇게 전한다.
"솔 사려! 조리, 방비, 적쇠요! 쓰레박이나 삼발이요!" 식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말라깽이 두 형제는, 긴긴 여름날을 이렇게 외치며 아침부터 씨레이션 박스에 솔,
조리 등을 담고 시내 여러 골목과 시장들을 해가 지고 밤이 늦도록까지 헤매었다.
그 길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일, 병중에서 완쾌를
보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과, 낙심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들의 부친을 위하는 길이었다.
물건을 팔아 원금을 입금하고 남은 이문만으로는 여섯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하루하루 입금시켜야 할 돈에서 식구들이 먹을 국수를 사는 일이
많아졌고 위탁판매소에 대한 미수금이 들어갔다. 식구들에게 이런 사정을 말할
수가 없었던 태일로서는 이미 적지 않은 금액이 되어버린 미수금이 어린 가슴을
태우는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1961년 5^3456,1,124^ 군사쿠데타가 나던 무렵 어느 날, 월말계산일을 하루 앞두고
그는 위탁받아 팔던 물건들을 모두 차곡차곡 싸서 동대문시장 안의 어느 손수레
보관소에다 맡겨놓고, 그대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였다. 첫 번째 가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나의 어머니, 언제 한번 그렇게 잡수시고 싶어하시던
고깃국을 못 끓여드리고 벌써 언제부터인가 보리밥에 쓴 된장찌개밖에 못
잡수시고, 긴긴 여름날 화로 속같이 뜨거운 천막 안에서 불쌍하기만 한 두 형제를
생각하면서, 이젠 가슴앓이 마저 생겨 밀치고 올라오는 속을 쓸어내리기 위하여 그
한더위 속에서도 기왓장을 불에 달구어서 배 위에 올려놓고 산송장같이 하루 이틀을
이어 나가는 나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내일이면 물건값을 떼어먹힌 것을 알고 노발대발할 위탁소 주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닥달질 당할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그 꼴을 보지 말고 집을
나가버리자는 심정이었다.
집을 떠난 그는 첫날은 하루 온종일 걸려 영등포에서 수원까지 걷고, 그 다음날
밤 수원역에서 열차 검표원의 눈을 속여 무임승차를 하여 큰집이 있는 대구로
갔다. 큰집에서는 서울서 온 조카를 놀러온 줄만 알고 며칠 묵게 했다가 차비를
주어 되돌려보냈다. 막상 집을 떠나오긴 했으나 달리 갈 데도 없었던 그는
큰집에서 생각하는 대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태일은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위탁소 주인을 다시
대한다는 것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불같이 노여워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하루 이틀 서울거리를 방황하다가 구두닦이가 되었다.
수기에 의하면, 그는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가면 아버지가 야단치지 않겠지 하고
혼자 생각을 하고"일거리를 찾았는데, 처음에는 한번 해본 경험이 있는
신문팔이를 해보았으나 밤에 길거리에서 잘 때 순경들이 와서 잡아가므로,
구두통만 있으면 잡혀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두구닦이를 시작한 것이 1년
가까이나 구두닦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낯선 거리는 아니었으나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서울, 같은 하늘 아래 가족을
두고도 만나보지 못한 채, 밤이면 돌아갈 곳 없는 잠자리를 걱정하며, 낮이면
세끼의 밥과 순경의 제복과 '구역' 아이들의 행패질을 걱정하면서 남대문시장
일대를 구두통을 메고 방황하기 1년. 그 1년에 그는 돈을 벌기는커녕 저 한 몸도
추스릴 수가 없어서 지쳤다. 그리하여 1962년 여름, 그는 집 떠난 지 1년 만에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다.
있는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애를 써도 겨우 혼자의 안정된 생활도 하지 못한
채 지친 나는, 같이 구두통을 메고 남대문시장 골목을 헤매던 친구 하나와 같이
부산까지 온 것이다.
부산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있다면 영도섬이 있을 뿐이다.
나는 부지런히 걸었다.
영도섬에라도 가면 누가 기다린단 말인가? 한 그릇의 쉰 밥이라도 쓰레기통에
내버려져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가야만 한다. 아, 마침내 저 그리운
영도다리가 보이는구나! 애타게 보고 싶던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을 보는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부산에 내려간 이유였다. 1년이 넘도록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차가운 세파에 시달려온 열네 살 소년이, 외로움에 지친 넋을 달래보려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 대신에 그들과 함께 살던 기억이 서린 옛동네를
찾아온 것이다.
태일은 남이 입다 버린 새까만 학생복 겨울옷 웃도리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은
훅훅 내려쪼이는 불볕의 열기를 빨아들여 피부병을 앓고 있는 그의 육신을
금방이라도 익혀버릴 듯이 괴롭혔다. 땀이 나면 더욱 가려운 것이 피부병이
아닌가? 그는 너무나 가려워서 마치 지랄병 환자의 발작 때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영도다리를 지나 방파제로 향하였다. "저 조그마한 방파제 끝에는 무슨
조갑지라도, 굴새끼라도, 생식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있겠거니 하는 기대를
품고."
바닷가에 선 그의 지친 몸 위로 짠 바닷바람이 스쳐갔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머리를 띵하게 만든다. 부산바다, 바닷물이라기보다는 도회지의 개천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는 쓰레기투성이의 썩은 구정물. 그러나 그 구정물이야말로
지금 허기진 배를 안고 그 가게 넋잃은 듯 성 있는 태일의 모든 희망이었다.
핏발 선 눈동자 속에 얄팍한 파도에 흔들리면서 한 작은 물체가 떠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사면을 빼어버린, 나무 속처럼 허연, 주먹보다 약간
큰, 캬베츠의 속꼬갱이"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닷물은 너무 깊었으며 양배추 속꼬갱이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물
속으로 뛰어든 순간 죽음의 공포가 전신을 휩싸고 지나갔다. 사흘 동안을 굶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그의 의식은 잠시 어머니의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리다가 곧
까마득하게 멀어져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어부에게 구출되어 바닷가 모랫바닥에 길게 뻗어 누운
태일의 주위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 서 있었다. 소년의 감겨 있던 눈이 떠지고
저무는 저녁해가 온 천지를 뉘엿뉘엿 물들일 무렵, 구경꾼들의 호기심에 찬
눈동자들에는 하나둘 동정의 빛이 어리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그들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 모두가 떠나버린 소년의 곁에는 "십 원짜리 지폐 석 장과 오 원짜리
동전 한 닢과, 끝이 조금 누런색으로 상한 뾰족한 캬베츠 속꼬갱이와, 그리고 누가
늘어놓았는지 알 수 없는 윗도리와, 무릎도 없는 바지, 바닥만 겨우 매달려 있는
검은 운동화 한 짝이" 놓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