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여수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여순사건은 여수에 주둔했던 14연대의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같은 민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봉기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국군은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여수, 순천 뿐 아니라 구례, 광양, 보성, 고흥 등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학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여수와 여천에서는 최소 110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여수경찰서와 각 지서에 감금되었다가 7월 16일과 7월 23일 경 여수시와 남해군 사이의 무인도(속칭 애기섬)에서 총살당했다.
주민들은 여수경찰서 산하 각 지서에 의해서도 희생되었다. 남면 안도 주민들은 1950년 7월 23일 남면 안도 신갱이도 인근에서 총살당했으며, 김광수 등 삼산면 주민 10여 명은 1950년 7월 25일 삼산지서 옆 거문리 신사터 절벽 아래 해안가와 8월 10일 거문도 인근 무인도에서 총살당했다.
화양면에 거주하였던 주민들은 1950년 7월 23일 가막만바다에서 총살되었다.
마산으로 후퇴하던 2사단 25연대 헌병대가 여수지역의 보도연맹사건을 저질렀는데, 당시 헌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는 200여 명이었고 모두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여수지구 특무대원으로서 보도연맹사건에 관여했던 배씨(배학래)는 배를 타고 오동도 동쪽 애기섬 부근에서 총살할 때 2~3회 입회했었다고 증언했다.
배가 한번 나갈 때 20~30명을 태우고 나가 배 위에서 눈을 가린 채 총살한 후 바다에 버리고 움직이는 물체는 다시 확인사살을 했다. 당시 여수에서 처형된 인원을 70~80여 명으로 이 때 사용된 경비정은 훗날 흥안호라는 이름을 달고서 여수-부산간 여객선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여수지역은 인민군 주둔지역이 아니었음에도 인민군 후퇴시기에도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여수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주민 150여 명이 1950년 9월 27일 미평 과수원에서 집단희생당했다. 한편, 9월 26일 여수지역에 해군 육전대가 상륙했다.
<부역혐의 피해>
여수지역이 수복되자 여수경찰서는 부역협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여 감금했다. 이들은 1950년 10월 20일과 28일 오동도 앞바다(여수 앞바다), 연곡동 한재 인근에서 살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최용식이 오동도 앞바다에서, 율촌면 최진영이 여수 앞바다에서, 돌산국민학교 교사 김찬규가 여수시 연곡동의 한재 인근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12월 24일경에도 김유성 등 주민 여러 명이 총살당했다. 1951년 1월 14일에는 여순사건 당시 화양면 인민위원장이었던 박창래의 종형 박영래 등 여수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수십 명이 여수 만성리 굴 뒤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이외에도 신의오 등의 증언에 따르면, 여수경찰서에 잡혀있던 주민들이 만성리에서 30~40명 단위로 총살당했다고 한다. 1951년 2월 4일에는 율촌면과 해룡면에서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율촌남초등학교 교사였던 손병선 등 17명을 연행하여 2월 5일 율촌면 밤촌 뒷산 구덩이에서 총살했다.
1951년 3월 12일에는 배몽룡 등 소라면 주민 600여 명을 여수서국민학교에 집결시키고 이틀간에 걸쳐 20여 명의 주민들을 여수경찰서로 연행했다가 1951년 3월 21일 율촌면 밤촌 뒷산 구덩이에서 총살했다.
여수경찰서 산하의 각 지서도 부역혐의사건을 일으켰다. 삼산지서는 1950년 10월 경찰의 체포를 피해 섬 동도의 산속에서 숨어 지내던 김동민과 신재율을 연행하여 거문도 해상에서 총살했으며, 화양지서 화동출장소는 1951년 1월 3일 여순사건으로 아들 강종원을 잃은 강우성을 연행하여 3일 동안 고문한 끝에 살해했다. 여수 대동청년단 단원이었던 장세춘의 증언에 따르면, 삼일면과 신덕면에서도 9·28 수복 후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여수경찰서는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경찰토벌대를 운영하였는데, 이들의 토벌과정에서도 주민 피해가 많았다. 1950년 11월 23일 부역혐의자를 색출하던 율촌지서 토벌대가 여수시 율촌면 소산마을에 총을 난사하며 들어와 마을 주민들을 당산나무 앞에 모이게 하였다.
토벌대는 소집한 주민 가운데 도피한 정재우의 형 정재수를 끌어내 정재우의 인민군 점령기 부역사실과 행방을 추궁하며 고문하였는데, 토벌대의 질문에 대해 정재수가 모른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이 여수지역을 점령하던 동안인 1950년 8월 3일 오전 9시 전투기 4대의 기총사격으로 여수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안에서 배에 타고 있던 피난민 150여 명이 사망했고 5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부산진구 성남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던 피난민들로서 국군의 지시에 의해 7월 21일 부산연안부두에서 통영 충무동으로 이송되었다가 7월 29일 다시 욕지도에 있는 학교에 머물렀으며, 5일 뒤인 8월 2일에 이들은 또 다시 욕지도를 떠나 여수 남면 안도리 해안에 접근하던 중이었다. 당시 안도리에 주둔하고 있던 영암경찰서 경찰들이 이야포 앞바다를 지나던 피난민 배를 이야포 해안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정박시켰다.
200톤 규모의 목선이었던 이 배에는 당시 갑판과 배 밑까지 400여 명의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고 전투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크게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으므로 인민군의 배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상태였다.
전투기가 떠난 후 안도리 마을 주민들이 뗏목과 배로 생존자들을 육지로 옮겼다. 생존자들은 가족의 시신을 찾아 해안 주변에 수습했으며 나머지 시신들은 배와 함께 소각되었다. 폭격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뒤인 8월 5일 전투기 1대가 다시 정찰 비행을 했으며 8월 9일 전투기 2대가 안도리 해안을 공격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배가 거제도 피난민수용소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비록 안도리에 인민군이 진입하지 않고 영암경찰서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나 국군의 지시에 의해 이송되던 피난민들이 후방인 거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전선에 가까운 곳으로 소개된 이유는 조사되지 않았다.
한편, 여수 남면에서는 8월 9일에도 미군 전투기의 어선 공격으로 조업하던 어민 20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 두룩여 해상의 조기어장에는 조업을 하던 100여 척의 어선이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상 여수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