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허먼 멜빌)
이 소설은 100년이 더 된 소설이다. 하지만 난 이 단편소설에 매료되었다. 아니 한 인간인 바틀비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있다.
월거리의 변호사인 주인공은 바틀비라는 직원을 채용한다. 핏기가 없는 창백함에서 오는 단정함 비참할 정도의 존경스러움 구제할길 없는 고독 그것이 바로 바틀비의 모습이였다. 처음에 바틀비는 엄청난 양의 필경을 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옮겨 쓰는일에 굶주린 것 처럼 밤낮없이 필경을 하였다. 필경을 했으면 서로 대조를 해야 함에도 바틀비는 필경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주위의 직원들도 바틀비의 이런 태도에 해고를 하라고 하지만 변호사는 바틀비란 한 인간을 해고 하기전에 많은 기회를 준다.
바틀비는 필경을 하고 나서 변호사가 대조를 해 보자고 하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란 말만 반복한다. 변호사가 우체국에 우편물을 붙여달라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잠을 잔다.
바틀비는 아침에 사무실에 들린 변호사를 잠시 나갔다 들어오라고 하기도 하고 변호사는 자기 사무실인데도 바틀비가 조금있다가 오라고 하면 바틀비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바틀비는 여전히 변호사 말을 듣지를 않는다.
바틀비는 자기의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다. 결국 바틀비를 해고를 하기로 하고 변호사는 월급외에 돈을 더 준다. 하지만 바틀비는 자기의 위치에서 한발자국도 옮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해고도 안되고 자기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틀비를 피해 몰래 이사를 한다.
하지만 이사는 왔으나 바틀비를 데리고 가라는 새 주인으로 인해 시달림을 받는다.
변호사는 바틀비가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으니 경찰서에 신고를 하던 알아서 하라고 한다. 결국 바틀비는 교도소에 수감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바틀비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게 이 소설에 흡인이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번역본이라 가끔씩 번역이 잘못되어 문장이 어색한 면도 있었지만 내가 읽은 소설중에 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소설이였다.
마지막에 작가의 변이 없었다면 나는 바틀비라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을것이다.
바틀비는 나중에는 구치소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죽는다.
원래 바틀비는 워싱턴에 있는 '배달 불능 우편물과'의 말단 서기로 있었는데 행정부의 인사이동 때 갑자기 감원 대상이 되었다. 감원이 되었기 때문에 바틀비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란 말을 반복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것일까?
배달 불능 우편물 그건 죽음이라는 말과 맞닿아있다. 과연 바틀비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 인간이 처절하게 말하고 싶었던것은 무엇이였을까?
저항의 권리 우린 때론 안하고 싶어도 해야 할때가 있다. 하지만 바틀비는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세상과 타협할 권리가 우리는 언제나 옳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는 바틀비도 때론 옳은건 아닐까? 바틀비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항의 권리 우리 인간은 어느새 사회적인 동물이 되어 그렇게 하는것이 맞다고 얘기를 함으로 당연시 되어있고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하는것도 또한 이 사회의 또 다른 오류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100년이 더 된 소설도 이렇게 잘 쓰여진것에 놀랍다
요즘 간혹 젊은이들 중에 이런 직원이 있다
백년전에 작가는 이런일을 예상을 하고 글을 쓴것일까?
이 소설은 읽을수록 글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새로워 보인다. 흡인력 있는 소설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소설 훌륭한 소설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댓글 바틀비의 인내력은 남달라보입니다.
아집이 강하고 의지력도 있어 보입니다.
저도 필경에 재미가 들려 밤을 새기를 자주합니다. 나이가 드니까 기가 소진되는걸 스스로 느끼게 되어 덜 하게 됩니다.
외부의 강압은 오히려 역행하는 고집이 있어 자율에 맞기는 게 현명합니다.
잘 읽고 숙지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은 단편집이라 독후감을 한번 써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