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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대북위국서.
재위 455∼475. 이름은 '여경(餘慶)'또는 ‘경사(慶司)’, 또는 ‘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제22대왕인 문주왕의 아버지이다.
18 년 (AD 472) :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번역문]
18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고구려]가
길을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보조해석/ 승냥이: 북연이 북위에 망하여 고구려 연나부에 귀부하고
백제의 북방을 괴롭히는 상황을 말함.
북연은 산서성 대동시 용성에서 임시 건국하고 비단길 중간 길로 옮겨 섬서성 서북 화현 일대에서
공식 건국하였으나, 북위에 의해 산서성 대동시 용성(북위의 평성)으로 보내진다.
북위가 관중 섬서성 서안, 하남성 낙양(수도) 등으로 남하하여, 원북위(대동시 평성)가 비게 되자
고운(모용운)의 북연을 평성 자리에 보냈는데, 고운(407~409)은 풍발에게 2년 만에 제거당하고
풍발은 동생 풍홍에게 두자식이 모두 죽임당하면서 풍홍이 북연 황제에 올랐다가 북위에 의해
멸망당하고 고구려로 피신하여 연나부에 귀속된다. 연나부는 연나라 망인을 받아들인 곳을 말한다.
개로왕이 말하는 동쪽은 산동반도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를 말한다.
누구 좋으라고 반도백제 분국 위치를 알려줘서, 북위가 반도로 진출하게 만들어 영토를 헌납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당시에는 멸망할 것에 대비하여 끊임없이 분국을 만들어 놓고 차후를 대비하였던 시기였다.
(담로로 나타남)
훗날 북위>북제>북주의 후신 수나라 문제 양견, 당 태종 이세민이 한반도를 탐내는 기록이
수서, 구당서, 신당서에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 확실한 반증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북위 당시에 북위왕은 반도 위치를 절대로 몰랐다.
번병(蕃屛)은 북위의 산서성 대동시~하남성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을 말하며
고구려와 국경을 남북으로 두고 대치하는 변방을 말한다. 즉, 산동성 등주시 등현을 가리킨다.
북연과 고구려가 국경에서 괴롭히고 있어 북위에 조공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보조해석: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로 부여여례를 임명하여
배를 띄워 황하강을 건너 사신으로 보낸다고 말하고 있다.
불사후 장사는 산서성 장치시 남부 장사지방의 탁장하(석장하/택장하/백제하/제수)를 말하는 곳이다.
장치시 남부 장사지방이 실크로드 요충지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왕족 부여여례로 하여금
불사후라는 제후로 임명하여 장사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로 장무를 같이 사신으로 보낸다고 하고 있다.
대방군은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 북쪽 고평시(고평성) 인근의 대방군 지역을 말하는 곳으로
소서노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처음으로 자리잡은 지역이며,
백제에게는 신성지역이나 다름없었고 반드시 지켜야하는 상징성이 있던 곳이었다.
백제의 탄생지였기 때문에 태수겸 무장인 장무를 임명한것이고, 인근의 사탁지방을 다스리는 책임자를
사마라고 하였고, 실크로드 무역품을 운반하는 말과 마차 관리책임자인 사마로 장무가 오른 것이며,
장사지방을 다스리는 불사후로는 왕족 부여여례를 임명하여 경제적 기반을 다지려한
정치적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말이다.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에서 사마염[사탁지방]도 사마로 성장하여 서진을 건국하는 인물이었다.
실크로드 물류가 최종 도착하여 도매거래하는 곳이 진성시였고 장치시는 제2의 도시였다.
장치시는 진성시 세력보다 힘이 약한 세력이 번외로 도매 거래했던 곳으로
주로 북월지 세력이 중원으로 들어가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감숙성 돈황시,청해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감숙성 북부를 지나 내몽고 자치기 서부 시라 [사라]선맹지구로 들어온 다음 영하성 회족 자치구[영주]로
남하하여 장치시로 들어가 도매 거래를 했던 곳이었다.
백제가 장치시로 왕족 관리를 파견하여 실크로드에서 들어오는 물류를 감숙성 하서회랑 세력을 피하여
내몽골 자치기를 거쳐 들어온 북월지 세력과 번외로 거래하였기 때문에
백제 해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백잔이고 여기에서 혼혈되거나 분화한 세력이 이잔,
북월지 세력이 카나>카라>가나>가라 (훗날의 가야), 왜라고 불리워진 세력이었다.
원래는 감숙성 하서회랑을 장악한 세력에게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간 세금을 내거나,
물류 운반권을 맡기고 임금을 줘야했으며, 중원으로 들어가는 일은 위험했기 때문에
더 저렴한 가격에 울며 겨자먹기로 하서회랑에서 팔아야만 하였고, 이 물건들이 산서성 진성시
하서시랑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치시로 들어온 실크로드 물류는 하서회랑 세력을 피하여 북월지 세력이
몰래 가지고 들어온 물건을 거래했던 곳이었다.
즉, 백제는 이중거래를 해서 진성시로 들어온 물건이 비쌌기 때문에 장치시에서 번외 거래를 하여
손해 본 물류비용을 충당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감숙성 돈황지구 (비단길), 청해성 서령 청구지구 (초원의 길)를 장악하고 중간 세금을 받아
이득을 취하는 것에 대해 반발을 하여 대립하였던 것이다.
산서성 진성시 하서시랑에서 중원제국으로 물류가 공급된다.
산서성 진성시는 bc 323년 진국(晋國)이었던 곳에서 훗날 사마염이 들어서는 자리로
안휘성 서화, 몽성에 살았던 기준 조선의 선조 기후가 진성시로 들어가 번조선을 자처하며
조선에 이어 한나라 (유방)의 번국으로 살게 된다.
진국(晋國)전신은 진한(辰韓)이다.
진국 멸망 이후 진나라 (晋/한무자 한만 韓씨 가문), 진나라(秦/진시황), 조나라(유연/위나라/조환),
서진(晋사마염), 백제, 고구려, 위나라(魏/탁발규) 등이 번갈아가며 차지한다.
서역에서 800년대부터 이슬람교화가 깊숙히 진행되자 실크로드 무역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때부터 중원에서 만드는 물건이 더 좋아져 역전 현상이 일어나 실크로드/초원의 길 무역이
쇠퇴하게 되고, 서역은 이슬람교화가 깊이 진행되면서 퇴보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중원에서는 오월의 강동, 강남 진출이 활발해져 5대 10국 시대가 펼쳐진다.
(960년 송나라 조광윤이 통일))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고구려]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보조해석:북연의 고운>풍발>풍홍이 북위에 멸망당해 5만여 명이 고구려로 피신해 와서
연나부에 귀속되는 것을 풍씨의 운수가 다하고 고구려인이 되어 성해진 상황을 말함.
장수왕 때 풍홍이 풍발의 두자식을 죽이고 북연 황제가 되었다가 북위에 의해 멸망당하자,
고구려로 들어와 백제를 괴롭히는 상황을 말한다.
즉, 북위에 의해 북연이 멸망하고 고구려로 들어와 성해진 후, 백제를 괴롭히고 있으니,
북위도 그책임의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에, 함께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치자고
개로왕이 애걸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은 장수왕의 공작으로 북위를 움직여 북연을 멸망시키자,
북연인들이 고구려의 연나부로 귀부하였다.
북연의 풍홍은 장수왕에게 귀부하여 황제 대우를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고
남조 유유의 남송으로 망명하려다가 황족 일족 10여 명이 모두 참수당하고
풍홍의 손녀딸이 북위로 탈출하여 북위 황비가 되어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괴롭힌다.
장수왕이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에서 개로왕을 죽인 후부터 북위, 남송 양다리 줄타기
저자세 외교를 통해 조공 무역으로 살아 남는다.
그래서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죽인 일로 최대의 굴욕을 맞보며
북위, 남송에 1년에 2회씩 조공외교를 하여 고구려 최대 조공왕이라고 조롱당할 정도로
굴욕을 당한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가 없는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하며 한자(尺)의땅도 한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보조해석: 장수왕 거련이 고구려민 일부를 한반도 남평양으로 옮겨 분국을 만들고,
충주를 점령하여 중원 고구려비를 세워놓고 북조로 돌아갔으니,
북조 중원 고구려는 허약해진 상황이므로 함께 도모하자고 말하고 있다.
북방에서 고구려가 가로막고 있어서 실크로드 무역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공을 핑계삼아 고구려를 치자고 애원하며, 개로왕이 억울해 하고 있는 기사이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首丘之心]을 품고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것입니다.
(보조해석: 북연의 풍홍족은 원래 북위의 제후였으니 북위 황제가 한마디 하면
낙랑인들과함께 산서성 대동시 용성으로 모두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서성 진성시 북부 장치시, 진중시 남부 인근 낙랑군으로 낙랑인도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장수왕이 이들을 북발해만과 한반도로 옮겨 고구려 영토를 넓힌 것을 경계하고
북위왕 이름으로 명령을 내려 모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있는 상황을 말한다.
[한반도 분국 위치를 알려줄 수 없기 때문에 분국의 상황은 중국 산동성 제남시, 등주시 위례백제
발해만 일대로 한정해서 개로왕이 표현하고 있는 것임].
원래의 낙랑국은 기원전 조선, 한나라 때 한무제 유철의 침공으로 산서성 진성시에서
발해만으로 옮겨가 최숭 낙랑국을 개국한 후 광개토에 밀려나
대련반도 조양>심양일대에서 최숭 낙랑국을 이어갔다.
낙랑국이 고구려에 요녕성 조양에서 심양으로 밀려났다가 한반도 평양으로 밀려 들어와
최리 낙랑국을 이어간다.
고운의 북연은 섬서성 서북 화현의 원주민과 산서성 태원시 지방에서 산서성 대동시
용성(모용희 때 수도)으로, 다시 옮겨가게 해달라는 요구이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囂)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蠕蠕)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王略]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보조해석: 외효는 외몽골에서 피리불고 양을 치고 순록을 키우던 종족들인
훈노족(순누/순우족/몽골 흉노족)을 말하며, 이당시에는 내몽골 자치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남쪽의 유씨는 남조 남송으로 유유의 유송(남송/강소성 남경(난징))을 말한다.
북쪽의 연연국은 감숙성, 청해성 일대에 살았던 흉노 알씨 가야국 중 하나였던 나라로서
알연국, 흉노알씨연국, 자연국/자알국을 말한다.
이들은 아영, 알영, 알지, 대알지, 예지, 예예, 다예지, 대예지 등으로 분화한다.
왕회도 양연립본, 양직공도에 자세히 나온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북조 감숙성 평양시, 청해성 서령시, 섬서 서북부, 산서성 서부지역임을 증명하는 말이고,
백제의 동맹이었던 백잔, 이잔, 가야, 왜를 한반도로 추격하면서 반도까지 쳐들어와
고구려 속민인 북연, 낙랑인 일부를 남겨두고 남평양을 세워 분국을 세우며 중원으로 돌아가고,
남평양인들이 반도백제의 북방을 위협하자, 고국원왕 사유(쇠)를
근초고왕 아들 근구수 태자와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남평양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인 사건을 말한다.
근구수왕이 건너가서 왜국을 건설했다고 하는 곳은 반도 백제를 말하며 훗날 백제가 멸망하고
왜 [일본]로 건너가서 670년에 현지 태생인 사인천왕계가 일본서기를 720년에 완성하면서
일본기준으로 집필하기 때문에 일본 [왜]으로 근구수 태자가 건너갔다고 기록한다는 말이다.
실은 근구수왕이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에서 반도백제로들어와 분국을 확장하고 지켜내는 것이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될것입니다.
(보조해석: bc 2350년경 섬서성 서안평에서 요/당을 건국한 배달한국의 방계 이기방훈은
감숙성, 내몽골 자치기 서부경계 이기산에서 남하하여 요/당을 건국하였으며,
북방 감숙성 단수지역에서 약수흉노(북흉노)가 발호하자 북상하여 쳐없애고 벌을 주었다는 말이다.
배달한국의 친계 단군왕검은 요/당에서 분가하여 서안 동북 600리 지점으로 들어가
달지국을 점령하고 삼한을 건국한다. [마한이 최초 달지국(산서성 영제시 영락현 부근)에 도읍함]
그후 산서성 진성시로 더 들어가서 진한에 자리잡고 마한은 웅백다,
번한은 치우 후손 치두남에게 맡겨 삼한 체제를 구축한다.
[색불루의 군사반란으로 삼조선 체제를 구축하며 마한을 차지하고 진한으로 명명한다.
마한은 산서성 남부~하남성으로 밀려남]
단수 지역은 감숙성 돈황시, 장액시, 란주시 일대를 말하며
단선비 단석괴(檀石槐137~181)가 내몽고 동부 선비산과 오환산으로 북흉노에게 쫓겨 들어갔다가
세가 불어나자 서진하여 내몽골 중부지방에서 세력을 키워 감숙성 돈황지구를 점령하고
북흉노 [두만, 모돈, 노상선우계]를 역노예로 떨어뜨린 후 실크로드 진입지인 하서회랑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선비는 실크로드 중계무역 요충지 감숙성 돈황시 북흉노(약수흉노)에게 하서회랑에서 쫓겨나
내몽골 동부 선비산과 오환산으로 들어가 세력을 키우면서 세가 불어나자,
단선비(단석괴),
탁발선비(탁발십익건,탁발의로,탁발규/내몽골 포두시 파언탑랍~산서성 대동시 용성,평성장악),
걸복선비(감숙성 원천장악),
모용선비(모용황,전연/모용수 후연.산서성 동부 태항산맥,하북성,북경~요녕성서부장악)
우문선비(북위/우문태/우태의 서위,수,당,고구려등으로 흡수),
고선비(고구려, 감숙성 평양시 고원현, 고구원), 사마선비(서진, 동진/산서성 대동시 용성)등으로
분화한다.
오환족은 오손, 오게, 정령, 오환족 등으로 분화하여 지리산 정령치로 남하하여 정착하게 되고,
개순장 문화의 오환족은 가야인으로 살다가 일본까지 도해한다.
단석괴의 단선비는 가장 강력하여 실크로드 요충지 감숙성 돈황지구[하서회랑]를 장악하고
선조들을 몰아냈던 돈황시, 장액시 약수흉노[북흉노]를 치고 역노예로 삼으면서
비단길, 초원의길 교통로 중계무역을 독차지한다.
맹상군[bc?~279]은 제나라 재상으로 천하의 인재를모아 후하게 대접한 인물로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과함께
전국(戰國)시대 말기의 사군(四君)으로 불린다.
맹상군은 한[韓], 위[魏]와함께 산서성 진성시 진[秦]나라를 공격한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보조해석:소석산 북국(小石山北國)은 마한 54국의 하나로 경기 강화도로 비정하기도 하나,
고구려가 북발해만의 대련반도 낙랑국을 장악하고 고구려 영토로 삼은 상황을 말한다.
고구려가 북위군을 죽였으니 함께 도모하게 하기 위해 언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당시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 역시 백제영역임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황하강을 바다라고 불렀으므로 서해 바다만을 의미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청해성 청해호, 합랍호(하라호/하나호) 역시 바다라고 불렀다.
그래서 청해성의 해가 바다해(海)자를 쓴 이유이다.
소석산 서쪽 경계는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 서쪽 경계를 말한다.
실제로 하남성 정주시에 가면 소석들이 아주 많다.
산동반도에는 동영시, 천진시 주변 갈석산 소석이 있는데 치우가 청동을 처음 캐서
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 요서지방인 탁록지방으로 헌원을 쫓아가
무릅을 꿇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치우는 하남성 희수강 일대로 달아난 헌원을 추격하지만, 헌원은 역으로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 탁록지방으로 달아나서 피하려 하였으나, 치우가 속지 않고 청동 갑옷으로 무장하고
추격하여 굴복시키고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
최초 탁록은 산서성 영제시~섬서성 한성시 사이 황하강[분수, 분하(위수)임].
훗날 북경 습수, 열수, 산수 탁록지방으로 옮겨감.)
산동성 동영시는 원래 동부여이며, 훗날 동명부여 백제, 동명백제로 분화한다.
동명백제는 아신왕 때 북발해만 대릉하 낙랑국을 장악한 고구려 광개토군에게 산동성 등주시 보하이만
위례 관미성앞 오리평야 전투에서 아신왕의 보병 3만 대군이 고구려 기마군 2만에 패하여
요녕성 개주시(후일 안시성)로 끌려가서 형성된 백제인을 말한다.
(현재도 백제인 거주 마을이 흔적으로 남아 있고, 역사 스페셜에서도 다룬 바가 있다.)
이들이 요녕성 개주시 안시성에서 고구려인이 되어 연개소문과 당나라에 대항하는 세력이 된다.
이들의 일부인 동명백제인들은 대련반도 동부로 밀려나 동명부여, 동명백제를 세우고 살다가
훗날 반도로 들어와 동명부여인들과 함께 부여 사비인이되는 세력을 말한다.
사비백제의 주력이 이들이었다.
이런 연유 때문에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안승 후고구려가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경기 연천 매소성 전투에 참전한 댓가로 익산 금마에서 보덕국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연개소문은 중원 북조에 살았던 영류왕과 귀족 신료 180여명, 관련가족 2,000여명을 학살하고,
북발해만으로 들어가 요녕성 개주시 안시성을 굴복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북조로 돌아간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
(보조해석: 산동성 제남백제를 통해 황하강을 거슬러 올라가 북위로 조공하지 못하도록
고구려가 가로막고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으니 함께 도모하자고 애걸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구려의 방해로 산서성 진성시 하서시랑에서 산동성 제남시로 실크로드 물류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도모해서 없애버리자고 하는 말이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보조해석: 북위는 내륙 국가인데 산과 바다를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황하강을 바다라고 부른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다.
또 고구려 왕의 머리가 더벅머리라고 말하고 있다.
머리를 장발로 마구 아무렇게나 기른 종족을 표현하는 말로 이당시 고려는
흉노스런 국가임에 틀림이 없었고, 산서성 진성시 구려국을 점령하고 장수왕 때 비로서
고구려가 되며, 동이족 구려인에 의해서 점차 문명화되어 가는 시작 단계를 말한다.
북위 역시 산서성 대동시 평성에서 섬서성 서안, 하남성 낙양(수도)등 관중 남하로
변발 풍속이 사라지고 성을 원소씨, 원씨로 바꾸는 등 중원 문명화가 가속화되자,
중원화를 거부한 원북위 평성 세력과 대립한다.)
원북위로 보내는 승전 물자가 줄어들면서 고환(구태)의 동위, 우문태(우태)의 서위로
분열하는 계기가 된다.)
중원 문명화라는 것은 현재의 중국화가 되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중원 동이족 국가인 양나라화,
동진화, 백제화가 되어간다는 의미이다.
대량은 하남성 개봉시 [카이펑]에서 양나라 황제국이 되어 정주시의 백제국을 동맹으로 두고 있었으며
백제가 산서성 장치시, 진성시, 고평시 진평 2군에서 실크로드 무역품을 양나라에
중간 이득을 남기고 내다 파는 공생관계였다.
수서, 구당서, 신당서에는 양나라, 백제는 분명히 동이족 국가라고 명시되어 있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등이 직접 듣고
본바이다.
(보조해석: 여기에서의 동쪽은 한반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 한구석은 중원의 동쪽인 산동반도 제남시, 동영시, 등주시 일대 까지를 말한다.
황하강을 바다라고 불렀다는 말을 이해하면,
북위왕 입장에서 말하는 바다는 반도를 중심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중국의 동쪽 산동반도를 말하고
산과 바다는 산서성 북단 대동시에서 진성시 동남부 태항산맥과 산서성 진성시 동남부 요택
황토고원에서 북경(연경)으로 이어지는 연산산맥, 그리고 황하강을 말한다.
광개토, 장수왕의 남진으로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가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로 밀려난 상황을 말한다.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에서 개로왕이 전사하고, 아신왕은 위례백제에서 성주로 있다가 왕이 되면서
광개토와 산동성 등주시 보하이만(발해만) 관미성 전투를 치룬다).
후연의 모용수가 산서성 대동시 북단 백등산 천지 참합피 전투에서 패하여 북위를 피해
북경(연경)에서 산동성 최북부 하북 최동남단 천진지방의 중산으로 천도하였다가
모용희 때 실크로드 문물을 우선 받으려고 하남성 서북부 서연을 점령하고 천도하자
강성해진 북위의 하남성 낙양 남하로 모용희의 후연을 산서성 대동시 용성으로 보내버린다.
후연의 모용희가 하남성 서북 서연으로 옮겨가자 중산지방은 고구려의 광개토와 위례백제가
하북성 대릉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정하게 되고 광개토의 위례백제 침공으로 위례성주로 있다가
왕위에 오른 아신왕이 산동성 등주시 관미성 전투와 관미성 앞 오리평야 전투에서 보병 3만 군이
광개토 기마군 2만에 패전하여 요녕성 개주시(훗날의 안시성)로 포로로 끌려가
백잔주(하남성 정주시 온조 백잔 한성백제/상업무역 세력을 비하하는 말)라고 객주로 취급을 당하며
아신왕은 노객이되겠다고 맹세하고 풀려난다.
요녕성 개주시에서 탈출한 동부여 (산동성 동영시), 백제인들이 대련반도 동부지방에서
동명부여, 동명백제를 세우고 살며 백제와함께 고구려를 협공하다가
고구려에 밀려 반도로 들어와서 부여 사비인이 되는 세력이었다.
산동성 동영시의 동부여, 제남시 위례백제로 돌아가면 세작으로 의심을 받아 천대를 받았으므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련반도 동부지방으로 탈출하여 고구려를 협공하다가
공주 웅진, 부여 사비로 들어가서 형성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백제 중흥정책을 펼치는 이유였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공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있다.』
[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월(越)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보조해석: 근구수 태자가 이끄는 부대가 고국원왕 사유/쇠를 죽인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점령하고 초나라에 멸망할 처지가 되자, 오월동주를 나눠주며
함께 싸우자고 독려하였으나, 오나라인의 비협조로 초나라에 월나라가 멸망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고구려가 북위에 스스로 번국을 칭하면서 조공하므로
칠 수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황복(荒服)은 산서성 진성시 동남부 태항산맥(연산산맥) 남쪽 끝지점에서 부터 소연산산맥을 타고
연경(북경)으로 이어지는 황토고원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황토고원에서부터 황토 진흙 뻘이 펼쳐진다.
백제의 요동군이었으나 고구려가 차지하여 요동이 되는 지역으로 요택이라 불렀다.)
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釁]가 있었지만 나라[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
(보조해석: 여기에서 평양은 감숙성 평양시에서 청해성 서령시 서경으로 천도해간 평양을 말한다.
왕이 천도해 가서 수도로 삼은 곳이 곧 평양이다.
평양이라는 말은 몽골의 삐알랑에서 온 것이다.
삐알랑은 왕이 기거하는 곳을 말하는 이동식 천막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왕이 이동하여 삐알랑을 펼친 곳이 곧 수도이고 그 이름을 평양이라고 불렀다.
이동식 천막인 삐알랑을 펴라. 펴야~펼쳐라~라고 하는 말에서 평양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펴야~를 이두식 한자로 적으면 평양(平壤)이라고 쓴다.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스타나의 고대어는 아스탈라이며 그 근원은 아사탈라>아사달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스는 아시에서 왔고 아시(あし/다리, 발, 발길, 발자취)는 아사에서 온 말이다.
일본에 고구려, 발해 망인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는데 일본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스(あす)는 내일, 아사(あさ)는 아침으로 쓰여지고 있지만, 아사달>아시달>아스달에서 기원한 말이며,
카자흐스탄에서는 아사달>아시달>아스달>아스탈>아스탈라>아스타나로
현재 아사달의 원어가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아사달의 뜻은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일찍 일어나는 민족이 모여사는 곳을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죽시화살)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보조해석: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戢則保境 故羈縻著於前典
구이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거주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외(海外)란 청해성 청해호 이남과 황하강 이남을 말하는 것이다.
북위의 수도 산서성 대동시 평성, 하남성 낙양의 북위왕 입장에서 볼때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위왕은 한반도의 실체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황하강을 중심으로 북조와 남조로 나뉘어져 있었고,실크로드 중심지는 북조 세력이 서로 장악하여
중계무역을 독점하려 하였다.
즉,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에서 산서성 진성시, 고평시 진평 2군
하서시랑으로 진출하여, 중계무역을 하는 상황을 가지고 해외에 거주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북위가 진평 2군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은근히 자기 영역이라며 백제인들이 해외에 거주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하며 선주민인 백제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후 북위, 고구려가 실크로드 물류 도착지인 하서시랑인 진평 2군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다가
고구려 광개토 때 점령하고 장수왕 때 진평 2군과 장치시 장사지방에서 재산 때문에
달아나지 못한 동이 9려인들이 고구려인이 된다.)
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
[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보조해석: 섬서성 서북부, 산서성 서부와 그사이에 있는 영하성 회족 자치구는 고구려 광개토가
거란 부산족을 밀어내며 차지하고 산서성 동남부, 하남성 황하강 이북은 백제 영역, 산서성 동북부는
원북위 영역이다. (산서성 대동시 용성, 평성)
실크로드 물류 도착지 하서시랑인 산서성 진성시, 장치시의 백제에서 북방 원북위로 가는 길을
고구려가 태원시를 장악하고 중간에서 차단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으로 북연의 풍홍이 5만명을 이끌고 망명함)
북위는 관중 섬서성 서안, 하남성 낙양을 차지하고 낙양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또한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와 낙양 사이를 고구려가 황하강에서 가로막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낙양시 동쪽에 정주시 한성백제가 위치하고 있다.
개로왕이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에서 장수왕에 전사하자 산동성 제남시 제남 위례백제로
옮겨간 것이다.)
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보조해석: 바다는 황하강을 말하는 것이다.
그당시 고대인들의 눈에는 황하강도 바다처럼 커보였기 때문에 바다라고 불렀으며,
대양바다는 대해(大海)라고 불렀다.
고대 당시에는 해양바다는 반드시 대해(大海)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백제 영역은 황하강 이북 하남성 북부 지역, 산서성 동남부 지역,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 산동성 제남시 제남 위례백제, 동영시 동명부여백제, 반도백제까지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동래(東萊)는 내몽골 중부에서 산서성 대동시 사이에 있는 지명으로 북위영역을 말하며
비려/패려거란의 영역이었던 곳을 말한다.)
개로왕이 빼앗긴 한강 상류 유역은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를 말한다.
광개토가 백제 (백잔,이잔), 가야, 왜를 반도 신라로 들어와 물리치고 돌아가면서
일부 가야인과 매금신라(영남동부지방)/압로 신라인(영남 동남부 지방)인을 80 십리에 걸쳐서
대거 끌어가게 되는데, 신라인들이 산서성 대동시 남부 태원시 지방에서 합려신라 [패려신라]로
거듭 태어나 남하하면서, 황하강 중상류 지방을 차지한 사건이 한강 유역 상류 확보 사건이다.
합려신라 [패려신라]는 광개토 말기부터 독자적으로 독립의 길을 가게 된다.
태원시에 있었던 북한산(北漢山)이라는 지명이 현재의 서울에 있는 북한산 지명으로
그대로 옮겨온 지명이다.
이일대에서 동한을 세우는 광무제 유수는 신나라의 왕망, 김당이 북부여(감숙성 평양시 고원족/고려족)와
연합하여, 감숙성 돈황시 장액시 등 하서회랑을 장악한 북흉노를 토벌하려다가 유수 장군이
북흉노 편을 들게 되면서 신나라는 멸망하고 동한을 건국한다.
동한은 산서성 일대가 중심이고 한고조 유방이 세우는 서한은
산서성 서쪽 섬서성 한중시 지방까지를 말한다.
유방은 북조의 실크로드 중심지인 하서주랑, 하서시랑을 차지하고 후에 감숙성 돈황시 하서회랑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중심지를 장악하여, 명실공히 천하통일을 이루었노라고 자랑하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중국 전역을 통일하지 못하였다.
섬서성 한중시(漢中市/汉中市)를 장악하고 너무 기뻐한 나머지 나라 이름을 한나라(漢)라고 지었다.
汉中市인은 산서성 태원시 일대에 살다가 유방에게 밀려난 세력이었다.
汉(한수한, 한나라한, 태세이름탄)은 물수변에 또우이다.
태세이름탄은 태원시를 말하는 곳으로 유방에게 밀려나서 섬서성 한중시로 달아나서 정착하였는데,
또 유방이 쫓아와서 결국 점령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노라고 자랑하였던 지방이었다.
이들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실크로드 경제무역을 장악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상업무역을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은 국가 운영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훗날 패려신라인들이 황하강 중상류지방을 차지하게 되고,
고구려는 황하강 정주시 한성백제 지방 이북을 차지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것이 신라의 한강 상류지방 차지이고 한강 하류 차지는 산동성 제남백제인
한강 하류를 차지하는 상황을 말한다.
반도에서도 백잔, 이잔, 가야, 왜를 토벌하면서 이와 유사하게 역사가 펼쳐졌기 때문에
두개의 역사가 혼동을 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주하거나 분국을 만들면 이전에 살았던 곳의 지명을 한자만 바꿔
그대로 붙이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개로왕의 전사 이후 동성왕, 무령왕 때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 고평시 고평성 백제 진평 2군을
회복한 후,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마저 북제에 상실하자, 위덕왕(威德王, 525년~598년 12월)때
반도로 옮겨 반도백제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동성왕, 무령왕(구주/큐슈 사가현 출생)은 동성왕은 구태계이지만 백성들은 이잔계로 한반도 출신]
위구태계 위덕왕이 북제의 제후로 떨어지자 반도백제로 들어와 반도백제왕으로 오른다.
威德王의 威(위)가 외국인을 뜻하는 한자이다.
위덕왕이 북제계였기 때문에 威[위]라고 부르게 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후 당나라 때 반도백제가 멸망당하고, 이어 나당연합군의 2차(총 6차) 침공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반도 고구려마저 멸망당하게 되는 역사였던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승자 민족을 왕으로 내세워 위기를 돌파하려 했었음]
[원문]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恊2)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3)
遣進萬一之誠 冀4)神祇5)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6)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7)女 執箒8)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9)之期 假手之秋也 且馮10)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辭11)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齒12)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詈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13)隔路 以沈14)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15)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況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 跨塞天逵16)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甚17)善18)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讐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19)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又詔曰
『知高句麗阻疆 侵軼卿土20)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釁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21)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戢則保境 故羈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況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句麗卽敍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22)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23)』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讎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