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풍양 조씨 호군공파 조숭의 후손]
보물 제953호<조숭 고신 왕지>와
보물 제954호 <조서경의 무과홍패>
해운대구 중1동 1394-27 해운대산부인과(조성욱 원장)를 34년 만에 찾았다. 우리 애가 태어난 병원이기도 하다. 조성욱 원장(호군공파 28세 손)은 해운대초등학교 선배이기도 하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린 적은 없다.
풍양 조씨 조숭의 후손 해운대산부인과 조성욱 원장
향토사 관광문화 해설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옛 문서 보물 제953호<조숭 고신 왕지>와 제954호 <조서경의 무과홍패>를 매개로 찾게 되었다. 7백여 년 동안 대대로 소장해 온 옛 문서는 문화재 지정과 동시에 조성욱원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희사하여 보관되고 있다.
「조숭 고신왕지(趙崇告身王旨)」는 조선 건국 직후의 왕지 양식에 입각해 작성된 관료 임명 증명서이다. 1392년(태조 1)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치지 않고 왕명만으로 직접 관료들을 임명하는 관교(官敎)를 사용하였는데, 이때의 관교는 ‘왕지(王旨)’라는 문구로 시작되었기에 왕지로 불렸다.
「조숭 고신왕지」는 1442년(세종 24) ‘교지(敎旨)’로 바뀌기 이전의 문서 양식으로서 귀중한 것이기에 1988년 6월 16일 보물 제953호로 지정되었다.
조서경의 무과홍패
「조서경의 무과홍패」는 세종17년(1435) 4월에 왕이 조서경에게 성적과 등급. 이름을 기록하여 준 무과급제를 증명하
는 홍패 왕지이다. 총6행에 초서체로 쓰여 졌다. 조서경은 세종 때부터 세조 때까지 무인으로 조하의 아들이며, 조서정의 형으로 세종1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전기관제 및 과거제도를 연구하고 세보(임금의 도장) 사용의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조숭은 본관이 풍양이다
아버지는 조사충(趙思忠)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던 과도기의 인물이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1396년(태조 5) 3월 7일 중추원의 8명으로 하여금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게 하였는데, 조숭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따라서 「조숭 고신왕지」는 1396년 3월 7일의 관직임명 때 발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양질의 장지(壯紙)로 작성되었으며, 사령(辭令)이 6행의 초서체로 쓰이고 연월 위에 ‘조선왕보(朝鮮王寶)’가 찍혀 있다. 왕지의 크기는 가로 75㎝, 세로 73.5㎝이다. 첫 행에 ‘왕지’ 두 글자가 단독으로 자리하고, 이어서 행을 바꾸어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이 4행에 걸쳐 쓰여 있다. 두 번째 행의 첫 글자는 첫 행의 지(旨) 자보다 약간 아래에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행에는 본 문서가 발급된 연월일이 적혀 있다. ‘조선왕보’는 연도 위에 찍혀 있다.
본 왕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숭 고신 왕지
“왕지. 조숭을 가정대부 상의중추원사 도평의사사 겸 의주등처 도병마사 지안무영전사 판의주목사로 임명한다. 홍무 29년(1396) 3월 7일[王旨. 趙崇爲嘉靖大夫商議中樞 院事都評議使司兼義州等處 都兵馬使知安撫營田事判義州牧事者 洪武卄九年三月初七日]”
『태조실록』에 의하면 1396년 3월 7일에 중추원의 8명으로 하여금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게 하였는데, 당시 조숭은 의주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본 왕지에 의하면 조숭은 단순히 의주 목사로만 임명된 것이 아니라 의주 등 지역의 도병마사와 함께 군영의 토지 문제 처리까지 맡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명나라는 정도전을 소환하려고 하여 조선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태조는 서북면의 국경 지역에 중신들을 파견하여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1396년 3월 7일에 발급된 왕지로 조선 시대의 관료 임명 증서가 교지로 바뀌기 이전 단계의 관료 제도 및 과거 제도 연구의 중요 자료이자 조선 시대 보인(寶印) 사용의 변천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