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 치고
이어령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셈치고' 라는 말을 잘 쓴다. 그래서 도둑맞은 셈치고, 속은 셈치고 객쩍은 돈을 쓰는 경우도 있다. 께름칙한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큰 손해를 보거나 화를 입은 셈치고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도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죽은 셈치면 생각하는 삶의 계산법인 것이다. 죽은 셈치면 어떤 불행한 일도 다행으로 보인다.
자기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무엇인가 부탁할 일이 있어도 '…셈 치고' 도와달라고 한다. 셈을 한자말로 옮기면 계산이다.
어느 사회에서는 계산은 숫자를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이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다. 숫자에는 쌀쌀한 바람이 일기 마련이다. 엄정한 규칙과 객관성이 따른다. '…한 셈 치고'라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계산하는 법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부자지간에도 부부간에도 셈은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셈은 거꾸로 냉엄한 그 계산의 시계를 얼버무리는 데 그 특성이 있다.
그런 셈이다.'하는 것은 '그렇다'의 단정과는 다르다.
대충 얼추 근사하다는 것으로 약간 그 뜻을 흐릴 때 우리는 셈이라는 말을 쓴다. 셈은 오히려 애매하거나 융통성을 뜻하는 말로 쓰일 경우가 더 많다.
컴퓨터를 우리 말로 셈틀이라고 하자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말의 셈이 서구적은 계산과는 다른 만큼 셈틀과 컴퓨터와는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뉴로컴퓨터가 나와서 애매한 것까지 알아서 처리하는 제5 세대쯤 되는 컴퓨터가 나와야만 셈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후한 속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 보다는 주관적인 기분을 중시하는 '셈 치는' 사회에서나 있음직한 발상이다.
파리에 살고 있을 때 고추를 샀던 경험이 있다. 저울을 타는데 눈금이 조금 오르니까 고추 한 개를 내려놓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울 눈이 조금 처진다.
그러자 주인은 고추 한 개를 반으로 잘라 저울 눈을 채워주었다. 이 정확성, 엄정성, 객관성…―역시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고추를 팔아도 그렇게 판다.
그러나 반 토막 고추를 보면서 수십 년 동안 '셈 치고' 살아온 나로서는 섭섭하고 야박하다는 생각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전체가 삭막한 사막으로 보인다.
속일 때 속이더라도 고봉으로 말을 되는 한국 시장의 훈훈한 풍경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진다. 정확한 말을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될 때에는 부정확하게 고봉으로 되는 민족은 아마 한국인 말고는 또 없을 것이다. 근대화하여 정찰제나 엄격한 도량형 기법이 생긴 오늘날에도 시장에서 되를 되는 것을 보면 옛날 같이 고봉이 아니라 수평으로 깎아 되는데도 마지막까지 싹 훑지 않고 한 뼘 정도는 남긴다. 야박하게 끝까지 싹 쓸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의 계산법인 까닭이다.
'셈 치고'라는 한국인의 그 불합리한 말에 한숨을 쉬다가도 지나치게 힘의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현대 문명의 빡빡한 풍경을 보면 굳이 더 펴서 올려도 흘러내릴 것을 알면서도 몇 번씩이나 쌀을 고봉으로 퍼올리고 있는 한국인의 손이 그리워진다.
길을 묻는 것도 그렇다. 시골길을 가다가 길을 물으면 어디에서고 십 리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들은 객관적인 길의 리 수 보다도 묻는 사람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 안 남았다고 해야 나그네들은 힘을 차리고 걸어갈 것이다. 아직 한참 가야한다고 가르쳐 주어 김을 빼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갈 길인데 한참 가야한다고 하나 다 왔다고 하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기분이라도 좋은 것이 좋은게 아니겠는가.
옛날 희랍의 현자 이야기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해가 저물 때까지 아테네의 시내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나그네의 물음에 길가에서 양을 치고 있던 노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화를 내고 나그네가 길을 다시 걸어가자 노인은 그를 물러 세운다. 그러고는 그 정도 걸음걸이라면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갈 수 있겠다고 가르쳐 준다. 애매한 것을 싫어하고 정확한 것을 추구하는 서구적인 합리성이 작은 한 편의 일화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다. 개인에 따라 사람의 걸음걸이는 다 다르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모르고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애매한 경우에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서구의 합리주의이며 서구적인 현자의 행동방식이다.
그러고 보면 '좋은 게 좋다.'라는 그 기묘한 한국식 표현도 '셈 치고'라는 그 기묘한 한국식 표현도 '셈 치고'라는 말과 이웃사촌이다. 좋은 것이면 그만이지 그거 꼬치꼬치 원인을 캐고 원칙을 따져서 나쁘게 만들 것 없다는 일종의 반합리주의 선언인 셈이다. 애매한 채로 남겨 두기, 그냥 덮어 두기의 그 셈 치고 의 문화는 분명히 근대 문명에 역행하는 사고이다. 그러므로 근대화, 산업화의 한 세기 동안 우리는 합리주의 계산법을 익히기 위해서 한 세기 동안 애를 써 왔고, 이제는 남부럽지 않게 계산에 밝은 민족으로 변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세상에는 저울질로만 달 수 없는 삶도 있다는 사실도 체험하게 되었다. 1초이 오차도 1밀리미터의 여유도 없이 합리성과 기능성만을 추구하다가 삶의 아귀가 맞지 않을 때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이 서구 사회의 병이란 것도 목격하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잘 쓰는 '뿅 간다.'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의태어 의성어가 유난히 발달한 한국인 답게 살짝 도는 것을 그리고 순간적으로 합리적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것을 '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 오백년 셈만 치고 살아가다가 이제는 모두가 뿅 가버린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저려 온다.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스트레스와 노이로제, 그리고 정신질환에 걸린 환자 수가 많다. 프로브렘이라는 말이 바로 사이코 프로브램으로 통용되는 나라 미국은 덮어 두고라도 가까운 일본의 정신 분열증 환자는 1백 명당 한 사람 꼴이라고 한다. 여기에 비하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세상에서도 으뜸 갈 만한 한국인인데도 아직은 그렇게 손꼽히는 나라 축에 끼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셈 치고' 살아간 '셈 문화'의 덕분일까?
셈문화는 비합리주의도 반합리주의도 아니다. 초합리주의,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새 문명 모델의 사상이다.
이어령|1934 충남 아산 출생, 문학평론가, 교수, 초대문화부장관
저서 《우리문학의 논쟁사》《흙 속에 저 바람 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