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주여, 구원하소서.
Text Lk 8,43-48
(43)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1.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2천 년 전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은 오늘, 이 시대와 이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주님께서 주신 구원은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2024년의 우리에게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2024년의 대한민국에도 소망이십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는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전하여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숫자가 위험을 느낄 정도로 감소하고 있는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는 청년들도 심각하게 감소하고 있고, 그들에게 전도하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은 예수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인 것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됩니다. 구원이란 무엇인지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인 것, 구원의 선물은 이 땅에서의 나라가 부강해지는 결과도 만들어 준다는 것 등을 3주일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사순절 제 4주일인 오늘은 이 구원이 내 것, 혹은 우리 것이 되게 하려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주신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은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우리는 먼저, 본문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라는 구절 중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는 대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에게 어떤 공적이 있어서 그에 대한 대가로 구원이 주어졌다고 하지 않으시고 단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헤엄을 쳐서 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사람이 자기가 빠져있는 물에서 살아 나올 방법이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누군가 구조해 줘야만 합니다. 그런데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구조를 기다리는 동일한 형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물에 빠져 구조해 주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데 누구를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 롬3,10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 하였고, 롬3,23에서는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으며, 롬5,12에서는 이런 죄인은 모두 동일하게 사망, 곧 멸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멘. 인간은 모두가 원천적으로 죄인이고 모두가 그 죄에 대한 벌로 사망할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라고 가르쳐줍니다.
또한 인간이 사망할 존재라는 것은 육신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육신의 죽음 이후에 받을 심판을 말합니다. 이것을 계21,8에서 ‘둘째 사망’이라 하였습니다.(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등도 함께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면 선하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 애쓰지 않은 사람과 같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평생을 나쁜 짓을 하며 산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마지막 순간에 ‘믿습니다’ 하여 구원받는다면, 평생을 선하게 살려고 애쓴 노력은 억울하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착하게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니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틀린 주장입니다.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욕심껏 사는 것에 비해서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며 행복한 것입니다. 후에 천국에 갈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사는 것이 현재의 자신과 모두에게 좋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평생을 나쁜 짓을 하며 살면서 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자기 인생을 망쳐 결국 평안과 행복을 모르는 채 살게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악이고 지옥의 불행에 빠져 살게 하는 것임을 몰라서 하는 주장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평생을 손해를 본 것이기 때문에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받는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티켙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거룩한 천국에서 즐겁게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존재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되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시길 기도합니다.
3.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그러면 그 구원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48절의 “네 믿음”이라는 단어를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믿음’이라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라는 말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믿는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요1,12에서 예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보내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믿는 행동’ ‘영접하는 행위’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깨닫게 하려고 성령께서 감동하셔야만 합니다. 개달은 복음을 받아들여 인격화하려면 성령의 ‘감화’가 필수적입니다. 인격화된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하고,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하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이 최소한 ‘동의’를 해야만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동의조차 어려울 수 있어서 성령의 ‘강권적 역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동의’인 “인간 자신의 믿음”이 없으면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결코 ‘신인협동론’이 아닙니다. 죤 웨슬리의 표현을 빌리면 ‘선재은총론’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구원을 선포하신 여인의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43절에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43)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손댄 사람을 부르시니 여자가 예수님께 떨며 나아와 엎드려 그 손댄 이유와 나은 것을 말했습니다. 47절, “(47)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그리고 마9,21에 보면 이 여인이 손댄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것이었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떨며 나아온 것으로 드러냈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므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런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가게 하였고, 또한 질병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구원받게 하는 믿음은 이와 같이 믿어야 하고 드러내야 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행동만으로는 절대로 구원받게 하지 못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눅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와, 눅17장에 나오는 고침 받은 것을 돌아와 감사하던 나병환자에게, 또 눅18장에 나오는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에게 예수님은 같은 말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도 오늘 본문의 경우와 대동소이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은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구원을 사람이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동의와 감사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하소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방해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라도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풍습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이 원수가 될 수 있고 세상의 것들과 관습에 대한 미련이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짖어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구원을 갈망하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 인격의 구원, 몸(삶)의 구원, 인생살이의 구원, 나라와 사회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구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믿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4.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라는 선물에는 영혼(심령)구원, 인격(성품) 구원, 몸(삶)의 구원, 인생살이에서의 구원, 사회 구원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마지막 절 48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본문은 구원과 함께 평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며 이루신 구원에는 ‘평안’도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 구원은 은혜로 받고 복은 노력으로 받는다고 가르칩니다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았다면 우리의 인격도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뒤틀린 가족관계나 이웃과의 관계가 화평하게 개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뚤어졌던 우리의 인격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개선되어 그 인격을 따라 사는 것이지 바른 인격을 갖추려고 노력하거나 바른 인격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노력하는 대신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되면 사회 속에서 나의 삶이 정리가 되고 정리가 되면 삶에도 평안이 가득하게 됩니다. 뭔가 잘못 맞춰졌던 것들이 바로잡히는 과정에서 아픔이 생길 수 있지만 그때마다 노력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더욱 구하면 인생길에도 행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권합니다.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충분히, 얼마든지, 모든 상황을 바로잡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발버둥을 치는 대신 조용히 그분께 맡겨드리십시오. 주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믿어도 좋은 분이요, 맡겨도 괜찮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악함이나 연약함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아는 것은 은혜 속에 있다는 큰 증거입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감사하면서 더욱더 많은 것들을, 더욱더 깊이 맡기시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는 인생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주여,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과 그분께 맡기고 그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꼭 이 은혜가 이 사순절에 깨달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