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62
(선조 12)
바다를 장악한 李舜臣!
이순신이 2차 출동에 나선 5월 29일, 이 때는 전라 우수영의 이억기 장군과 원균의 부대가 합류해 판옥선 만 50척이 넘었는데 거북선이 선두에서 판옥선을 이끌었다. 조선 수군은 四川浦에서 왜선 12척 모두를 격파하고, 다음날 唐浦(지금의 통영 앞바다)에서 20척을 또 깨뜨렸다. 거북선을 선봉에 세운 조선 수군은 이어 唐項浦(지금의 경남 고성 앞바다)에서 26척, 율포에서 3척을 격파한 뒤 각 군영으로 복귀하였다.
이 전투에서 元均은 싸움보다는 죽은 왜군의 수급 확보에만 혈안이 되었다고 傳한다. 원균은 그렇게 확보한 수급을 狀啓(장계/왕명을 받아 行한 그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는 두루말이 서류)와 함께 올려 선조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얍삽하고 비루한 X)
한편, 自國 水軍의 연이은 참패에 대경실색한 豊臣秀吉이는 1,600명으로 5만의 조선 관군을 깨트린 용인전투의 주인공 와키자까 야스하루(脇坂安治)를 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와키자까는 사실상 海戰이 주특기였다. 와키자까는 “이순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대의 武運도 이제는 끝"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합동작전을 펼치라는 풍신수길의 命도 무시하고 이순신과의 일전을 서둘렀다.
일본 최고의 장수라는 자부심이 너무도 강했던지, 와키자까는 自國 海軍의 連戰連敗에도 상대의 전력을 파악해 보지도 않은채 오로지 승전에만 눈이 뒤집혀 서둘러 70 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見乃梁(견내량 : 지금의 거제대교 아랫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으로 향한다.
그러나 李舜臣은 倭軍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포위한 뒤, 몰살시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7월 4일, 李億祺와 원균의 수군과 연합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魚泳潭 (어영담)의 전함 5 척을 동원하여 왜선을 한산 앞바다로 유인해 내는데 성공한다.
한산 앞바다로 들어 온 와키자까의 왜군은 이순신이 미리 구상해 놓은 鶴翼陣(학익진/선단을 학의 날개처럼 펼쳐 적을 포위하는 陣型)에 걸려들었다.
이에 조선 수군은 즉시 무시무시한 함포 사격과 뒤이은 강력한 박치기 작전으로 적의 魂을 뺀뒤, 치밀한 마무리 공격으로 59척의 왜선을 격침시키니, 倭 海軍 최고의 장수라는 와키자까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ㅋㅋ 헐레벌떡 도망치는 그 녀석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閑山大捷으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또한 한산대첩은 세계 海戰史에도 기록되었으며 이 기록을 면밀히 검토 분석한 美 해군의 전략가들도 혀를 내둘렀다고한다.
조선 수군은 전력을 재정비한 후 50여 일 뒤, 다시 출병하여 釜山浦를 공격하는데
부산포 공격에서도 敵船 100 여 척을 깨트리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조선의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豊臣秀吉이는 閑山海戰의 大敗로 인하여 해전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자, 전쟁의 구도 자체를 변경할 수 밖에 없게된다.
그리하야, 不敗의 이순신은 조선 백성들로부터 求國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