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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봉(龜峰) 송익필 [宋翼弼, 1534 ~ 1599]
본관 여산(礪山, 은진). 자 운장(雲長). 호 구봉(龜峰) ·현승(玄繩). 시호 문경(文敬). 서출(庶出)이라 벼슬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학문을 논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홍(白光弘) ·최립(崔岦)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고양(高陽)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渻 ) ·정홍명(鄭弘溟) ·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지평(持平)이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조선의 알려지지 않은 천재 송익필, 구봉
고금이래 우리나라 최고의 천재가 누굴까? 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구도장원공'이라 불리는 율곡 이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토정 이지함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스승 같은 벗으로 대하며 존중했던 인물이 바로 ‘구봉 송익필’이라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이지함의 수제자 고청으로부터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 극찬까지 받았던 인물이 당진에 묻혀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아는 사람이 잘 없다.
조선을 통틀어 유가(儒家)에서 가장 내공이 높았던 인물은 송익필. 구봉 선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당대 제도권에서는 다른 평가를 할 수도 있겠으나, 민초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평가에 의하면 송구봉은 강단(講壇)이 아닌 강호유학(江湖儒學)의 최고봉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당대의 석학 이이(李珥 1536~1584), 성혼(成渾 1535~1598), 정철(鄭澈 1536~1593) 등과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지는 숨겨진 인물이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출신상의 비천한 신분이 문제가 되어 당시 역사무대에서 활동이 봉쇄되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인 선조를 비롯하여 주변을 싸고 있던 조정의 관료들이 너무 무능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초라한 구봉 송익필의 묘소
제1부 송익필, 구봉은 누구인가?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 불렸던 송익필
송구봉 선생은 1534년(중종29년)에 당상관(정3품이상) 송사련과 연일 정씨 사이에 4남1녀 중 3남으로 비교적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호로 쓴 ‘구봉(龜峰)’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 고양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에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구봉은 현 파주시 교하면 산남리 심악산 아래 궁동에서 성장하였으며 선생을 잉태 후 심악산에 나무들이 고갈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유학의 정치역사에서 세조~중종까지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훈구파들이 거의 물러나고,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대였으며, 당쟁의 분열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분열되기 시작하던 혼란기였다. 송구봉은 천부적으로 머리가 아주 우수하여 7세에 이미 붓을 잡고 뛰어난 시문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 :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 라는 싯구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서출(庶出)로서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성리학에 통달했고 예학(禮學)과 문장에 뛰어났다. 20대에 이미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임 (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笠,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등과 함께 8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당시 현재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 기슭에서 후진을 양성 문하생 중 김장생, 김 집, 정 엽, 서 성, 정홍명, 김 반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중에서 특히 金長生이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되었다. 구봉은 일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책을 보고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젊은 나이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당대 최고 문장가들과 시를 짓고 품평을 했으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정치경륜과 학문에 관해 깊은 토론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다.
송구봉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충의지사로 ‘조헌과 칠백의총’의 주인공인 조헌(趙憲 1544~1592, 조선 후기의 의병장)으로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중기 정치가)과 김집(金集 1574년~165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부자(父子) 또한 그로부터 학문을 배워 조선후기 예학을 집대성하여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김장생-김집은 이율곡과 송구봉 모두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이들 부자는, 조선후기 성리학을 완전히 뿌리내리며 송자(宋子)라고도 불렸던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의 스승이 된다. 그러나 구봉은 신분차별이 엄격하였던 조선중엽에 태어나 종의 자손이라는 신분상의 문제와 동인들의 방해로 끝내 정계에 진출하지는 못하였다.
부친의 악업으로 불운한 송구봉
구봉의 불운은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킨 신사무옥(辛巳誣獄)에서 비롯된다. 신사무옥이란 중종 16년(1521년) 신사년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사건을 일컫는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鈿)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그런데 송사련(宋祀連)은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어머니 상(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해 안처겸, 안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를 하게 되었다.
송구봉의 집안에는 먼 조상 중에 고려 원종 때 상장군을 지낸 이가 있지만, 가까이로 고조부, 증조부는 벼슬 없이 지냈고, 조부는 말단 관직을 겨우 지냈다. 그러다 부친 대에 와서 외형상 크게 가문이 일어난다. 부친 송사련(1496~1575)은 그의 어머니가 좌의정 안당 부친의 몸종의 딸로서 비천한 출신이다. 그는 이런 신분적 제약을 뛰어 넘고자 당대 권력자 심정 밑에서 관상감 판관을 지내면서 큰 벼슬로 출세하려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와 신분은 다르지만 이복(異腹) 외삼촌 뻘 되는 안당의 집안 사람들과 지인(知人)들이 모인 곳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송사련은 안당, 안처겸 등이 ‘조광조 선생을 모함했던 심정, 남곤 등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선생의 불명예를 되찾자’는 모의를 계획하는 것을 듣게 된다. 송사련은 이를 심정에게 고발하고 이로 인해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년)’의 참변이 일어나, 사건에 관련된 안당과 그 집안 사람들이 처형된다.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으로 출세하고 안당 집안 재산을 차지하여 한평생 권세를 누리다가 1575년에 80세 나이로 죽는다.
그러나 부친의 이러한 영화로운 인생과는 달리, 무고 당했던 안당 집안의 신원(伸寃)이 1540년에 회복되면서 송구봉(7세)의 인생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저 송씨 집안은 윗대 할머니가 안당 가문의 몸종이었고, 친족관계로 봐도 안당은 송사련의 외삼촌뻘도 되는데, 그 집안을 그렇게 도륙내다니…”하는 세간 사람들의 악평과 구설수뿐만 아니라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송구봉 집안 사람들은 시달림은 당했지만 권세가 남아있어 큰 탈은 없었다.
노비로 전락한 송구봉
그러나 조선시대의 신분사회에서 천출(賤出)이라는 점은 송씨 형제들에게는 큰 장애가 되어 송구봉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벼슬보다는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송구봉은 50대 초반까지는 율곡, 성혼 등 절친한 친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간접적으로 자신의 경륜을 정치와 학문에 반영한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길러내어 대학자, 교육자로서 비교적 무난한 생애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나이 53세 되던 해(1586년, 선조9년)에 이미 죽은 부친의 관작(官爵)마저 삭탈당하는 불운을 당한다.
본래 국법에 의하면, ‘노비집안이라도 2대 이상 양역(노비 아닌 신분)을 했던 집안은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의하면 송구봉의 집안은 조부 송린과 부친 송사련이 2대에 걸쳐 관상감 벼슬을 지냈으므로 노비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안당의 후손들은 원래 천한 출신인 송씨 집안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린다. 그러던 중 서인계인 정철과 원수지간이던 동인계의 이발, 백유양 등이 정철과 송구봉을 해치고자 한다. ‘송씨는 우리집 몸종이다’라는 소송건을 제기한 안당후손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4대를 걸쳐 내려온 송씨 집안의 양적(양인증명 문서)을 모두 없애버린다.
송씨 집안은 꼼짝없이 안당 집안의 노비로 전락되고, 죽은 송사련도 법적으로 노비가 되고 만다. 보복심에 불타는 안당 집안의 노비가 되면 온갖 핍박과 가해가 있을 것이라는 건 너무도 뻔했기에, 70여명의 송구봉 일가는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뿔뿔이 도망간다. 이 사실을 안 안당 후손들은 송사련의 묘소까지 찾아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난도질한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된 송구봉
부친의 악업으로 인해 출세 길이 막히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송구봉은 이를 원망하지 않고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며 순순히 받아들인다. 현실정치에 회의를 품고있던 구봉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로, 무려 1,000여명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고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아무런 끈이 없었던 그에게 출사는 쉽지 않았다. 보통 호남 출신들은 동인의 편에 섰지만, 그는 이이가 있는 서인의 편에 들어갔다. 그는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지만 이이가 죽고나자 스승을 비판하며 동인의 편에 섰다. 그의 성격은 상당히 꼬장꼬장했다고 한다.
임금인 선조 앞에서도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지 않았으며, 선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싫은 내색까지 했다. 따라서 그는 관직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고을, 나아가 호남의 민심을 얻게 된다.
이이가 죽자 서인들은 세력을 잃게 되고, 그 중에서도 송익필은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는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이 그를 비롯한 서인 모두에게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송익필 각본, 정철 연출의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정말 송익필의 각본에 정철이 연출을 맡아 날조된 사건이라는 시각도 있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해서 이것을 빌미로 동인 세력을 밀어내고자 했던 '사화'라는 시각도 있다. 또 단순히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학혁명을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으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전라도는 반역의 고장으로 찍혀 차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제2부 강호유학의 최고봉 송익필
율곡 이이가 탄복한 송구봉
송구봉에 관하여 전해지는 정사나 야사에는 반드시 율곡 이이가 함께 등장한다. 송구봉을 알 만한 이는 율곡 정도였고,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신분인 송구봉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나중에 동인의 미움을 받아 노비가 된 것도, 율곡과의 친교로 서인의 정책 자문 역할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교 대가들의 스승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송구봉의 학문은 어느 정도였을까?
율곡과 얽힌 한 일화가 있다. 율곡은 조선역사상 아홉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 번 장원한 분)이라 불린 대천재 유학자, 정치가였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생진과(소과, 일명 사마시司馬試 또는 감시監試), 문과(대과), 무과, 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다. 이중에서 문관 등용 시험인 문과는 크게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나뉘어지며, 이들 시험은 식년시(式年試)라고 하여 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초급 문관 시험인 소과에는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가 있었고 이를 생진과(生進科)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다. 이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었고 여기에 합격한 자를 초시 그리고 생원, 진사라 불렀다. 중급 문관 시험인 대과에는 소과에 급제한 진사와 생원, 하급 관리, 성균관 유생들이 응시하였으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실시하여 급제자를 선발한 후에 전시(殿試)에서 그 등급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문과의 경우에는 그 단계가 생진초시→생진복시→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로 나누어졌다.
율곡은 1564년(명종 19년) 29세에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삼장 장원(三場狀元)'으로 불렸으며, 또 그 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이어 진사시(進士試)에 고등으로 합격하였으며, 문과에도 모두 장원을 하니, 대개 전후에 장원을 차지한 것이 모두 아홉 번이었으므로 당시에 '구장 장원(九場壯元), 구도 장원(九度壯元)'이라 일컬어졌다
그러한 율곡이 젊은 시절(23세)에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자 선비들이 율곡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율곡은 답변을 피한 채, “송구봉의 학문이 고명하고도 넓으니 그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비들이 송구봉에게 몰려갔는데 그들의 수많은 질문에 그는 물 흐르듯 막힘없고 의문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답변을 쏟아내었다.
선비들은 송구봉의 학문과 언변에 감탄하였고,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동생 송한필도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서인의 원조이며 대학자인 이율곡도‘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은 오직 송익필 형제뿐’이라 말하였다고 한다. 이율곡, 성혼은 성리학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그와 편지로 주고받으며 많은 의견을 구했다 하니, 송구봉의 학문은 당대 비교 상대가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학문과 언변을 한번 들은 사람이면 거의 모두 그에게 반할 정도로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지모(智謨) 또한 깊어 남들이 전혀 생각할 수없는 지혜를 잘 내어 종종 주변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학문이 높고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송구봉은 조정 관료로 출세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쓰며 살아가는데, 이는 그의 집안 내력 때문이다.
한편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당시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임진왜란이 닥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만다. 율곡 이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마고우이던 구봉 송익필은 애도의 시를 지어서, "그대와 나는 합해서 하나인데, 반쪽만 남은 나는 사람 구실 못하겠네" 라는 애절한 슬픔을 토로하였다.
번개치는 듯한 안광
송구봉은 학문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번개가 치는 듯한 안광과 당당한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기백으로 인해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당시에 쟁쟁한 선비로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이 뛰어났던 만전당(晩全當) 홍가신(洪可臣)과 가까이 지냈었다. 홍가신은 뒤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사람인데 그의 동생에 참의 홍경신(洪慶臣)이 있었다. 홍경신은 형이 서얼 출신인 송익필에게 경대(敬待)하는 것을 항상 못마땅히 생각하고 그의 형에게
“어찌하여 송익필과 벗을 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욕을 주겠습니다.”하였다. 이에 홍가신이 웃으면서
“송구봉 선생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하는 말이
“그는 비록 사비(私碑)의 소생이라고 하나, 그 학식과 인품이 존경할 만한 분이니라. 네가 그렇게 해보고 싶거든 한번 해 보아라. 그러나 너는 반드시 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두고만 보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편지하나를 건냈다. "너, 이걸 가지고 구봉 선생께 전하거라." 평소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동생 경신은 길길이 뛰며 화를 내며 "종놈의 자식한테 제가 왜 갑니까?" 그러나 형은 이런 동생을 잘 달래 기어이 보냈다.
"가서 서신만 전하거라." 형의 명을 끝내 어길 수는 없어 동생은 단단히 벼르며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해 사람을 부르니, 마침 밖에 아무도 없었는지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홍경신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의 자식이 이럴 수 있다니, 게 익필이 있느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송구봉은 낯선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마루로 나와 손님을 맞았다.
"그 뉘시오?" 그런데 송구봉을 욕보이겠다고 기세등등하던 홍경신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며 예절을 차리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아닙니다. 그냥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동생에게 홍가신이 물었다.
“편지는 전했느냐?”
“아뇨, 못 전했어요. 정신이 까막까막해서 놓고만 왔습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정신이 까막까막한 것만 아니라, 너 오줌쌌지?”
“구봉 선생과 마주 앉아 쳐다보는 건 율곡 하나고, 성우계는 나하고 곁에 앉아 얘기하는데 구봉 선생과 마주 앉으면 벼락치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앉지는 못하느니라.”
훗날 홍경신은 자초지종을 묻는 세인들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져 넘어진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홍경신도 형과 더불어 구봉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한다.
선조임금과 송구봉
당시 구봉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지기였던 율곡은 다가 오는 국가의 환란을 짐작하고 선조에게 송구봉을 끊임 없이 천거했다. 당시 율곡은 성우계와 함께 송구봉이 병조판서라도 하면 왜놈은 공격할 마음조차 못 먹는다며 여러 모로 선조를 설득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율곡은 선조 임금에게 기나긴 상소문을 올렸다. 송구봉의 높은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자세히 쓰고 나서 구봉에게 벼슬을 내려 큰 일을 맡겨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상소문을 읽고 감동한 선조는 송구봉을 불러들이라는 어명을 내렸다. 임금이 송구봉을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신분이 천한 사람을 조정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구봉을 추천한 율곡에게도 공격이 쏟아졌으나 선조 임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율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선조는 당장 만나고 싶으니 함께 어전에 들라 명하였다. 선조는 송구봉에게 나라 형편에 대하여 묻자 송구봉은 거침없이 평소의 의견을 말했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못된 벼슬아치들 때문에 임금의 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 건너 왜적이 조선을 넘보고 있습니다. 상감께서는 당파싸움을 뿌리 뽑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당파를 뿌리 뽑으라는 말에 신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신하들이 앞다투어 송구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하, 저자가 지금 태평한 나라에 쓸데없는 풍파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 무엄한 자를 지금 당장 내쫓으십시오.”
“전하, 내쫓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당장 옥에 가두고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때 선조 임금은 신하들이 당파 싸움에 신물이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송구봉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그러나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구봉을 벌하라고 하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율곡이 나서서 아뢰었다.
“전하, 송구봉의 말이 맞습니다. 당파를 누르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입을 모아 이율곡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임진왜란은 7년동안 계속되어 우리민족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된 것입니다
송구봉과 마주하게 된 선조는 그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임금은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하며 구봉선생의 대답을 듣다가 부복하여 있는 구봉선생에게 “고개를 들고 짐을 보라”명하였다.
그러자 구봉은 “소신에게는 압인지기(壓人之氣)가 있어 성상께서 혹 옥체에 손상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고 아뢰니 왕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재촉하였다. 구봉은 잠시 주저하였으나 어명을 어길 수 없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임금을 보는 순간 왕은 용안이 창백하여지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눈빛이 호랑이의 눈과 같이 번쩍하고 불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왕은 송구봉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그 사람 얘기는 이제 하지도 말라 어디 그게 사람의 눈이더냐?”고 하였다 한다.
결국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신하를 조정에 둘 수가 없다 하여 이 일은 무산되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병법을 가르친 송구봉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율곡 선생의 소개로 이순신이 송구봉을 찾아갔다. 마침 송구봉은 외출 중이었으나 하인의 안내로 사랑에서 구봉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랑방의 아랫목에는 훌륭한 병풍이 한 폭 펼쳐져 있었는데 그 속의 그림이 한 마리 큰 학(鶴)이었는지라 그 앉아 있는 모습이 평소에 상상하던 거북선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만 자신도 모르게 병풍인 줄도 잊고 몇 개의 구멍을 뚫고 말았다. 그 때 구봉선생이 귀가하였다.
하인들에게 “손님은 오셨느냐?”하시니,
하인이 “큰일 났습니다. 그 아끼시는 병풍에 구멍을 내셨습니다.”한다.
그런데 구봉은 뜻밖에 “쓸곳에 쓰인 것이다. 걱정할 것 없느니라”하고 사랑문을 열었다.
충무공과는 수인사도 없이 “어디 몇 구멍이나 뚫었는가 보자”하였다.
처음 대하는 이순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 겸 인사를 드리니 그제야 정색을 하고 바로 앉아 하는 말이
“이 네 구멍만 갖고는 전후좌우로 밖에 더 가겠소? 잠수를 하고 부상을 하자면 적어도 다섯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나머지 하나는 내가 뚫어줄 수밖에 없겠군”라고 하였다 한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당나라의 이적(李勣)장군이라면 몇 구멍이나 뚫겠습니까?” 물으니 “8 구멍은 낼 것일세.” 하고,
또다시 “제갈공명(諸葛孔明)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니 “24 구멍은 내겠지.” 하였다.
그래 또다시 묻기를 “원래 완전하게 만들려면 몇 구멍이 되겠습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으니 웃으며 조용히 하는 말이
“48 구멍이 전부일세.”하였다 한다.
이순신은 그날 밤 늦도록 정치, 경제, 군사 등에 관해서 광범한 가르침을 받고 돌아갔다. 그 후 송구봉의 제자로 입문하여 훗날의 국난에 대비하는 많은 지혜를 쌓았다. 그날 밤 송구봉은 이순신에게 두 수의 글을 주었는데,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섬멸전을 펼때 신묘한 전략을 세우는데 아주 적절한 글이었다고 전해진다.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달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毒龍潛處水偏淸
伐木丁丁山更幽
독룡이 숨어 있는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고
산에서 나무 찍는 소리가 ‘정(쩡) 정(쩡)’ 울리니 산은 다시 그윽하다
이러한 일곱자 글귀를 이순신 장군은 잊지 않고 잘 이용하였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열 두척의 배로 적을 맞이한 명랑해전이다. 전설과 야사가 섞여 있지만 송구봉이란 사람이 시대의 차별을 뛰어넘는 훌륭한 인재였음은 분명하다.
충청남도(우도)에 최초의 서원을 세운 조선의 신동이라 불린 고청 서기(孤靑 徐起 1523~1591, 선조 24)는 그의 문하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을 알고자 한다면 구봉 송익필 선생을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제갈공명이 송구봉과 같았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기록이 있다.
구봉은 서얼로 태어나 한평생 방랑 생활을 하시면서 많은 시를 지어 남겼으며 김시습, 남효온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도 불리운다. 그의 시를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낙화가 펄펄 날리어 시냇물이 붉은데
백조는 쌍쌍이 비단 강산을 날으네
취객이 무심코 도사를 찾아 갔더니
작은 배 바람에 떠있을 뿐이구나
천리를 헤메는 육척의 이내몸
십년 동안 서울의 봄구경 잊었구나
어제 취한 그 꿈속 같은 내고향
창밖의 청산이 내 벗인가 하노라
제3부 악업의 송익필과 뒷담화
악업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송구봉
그의 이런 재앙을 막아줄 수 있었던 30년 지기(知己) 율곡도 죽고(1584년), 송구봉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던 정철마저 유배를 가게 되면서 송구봉의 말년은 암운이 더욱 짙어진다.
송씨 일가의 이러한 약점은 자식인 송구봉의 대에 이르러, 동인들에 의해 불거지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동인들은 송구봉을 사노(私奴)로 전락시켰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사노(私奴:남자 종) 송익필을 체포하라!’는 요지의 기록도 남아있다. 그가 일찍이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자로 나선 것도 이러한 출신상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을 수정·보완한 책으로 ‘선조실록’은 북인의 입장에서 편찬한 것으로서 서인과 남인에 대해서 불리한 기술이 많았다. 이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새로 편찬한 것이 수정실록이다. 그러나 기존의 실록에는 손을 대지 않고 기존 실록에서 고쳐야 할 부분을 조사한 후 자료를 수집하여 보유편(補遺篇) 형식으로 편찬했다.
송구봉의 이와 같은 출신의 차별은 율곡과의 일화에서 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율곡의 ‘서자 허통(庶子許通:서자들을 등용하는 일)’에 대한 사상 때문에 율곡을 뛰어난 혁명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생각한 송 구봉이 어느 날, 율곡에게 자식의 혼인을 청한 적이 있다.
그러자 율곡은 송 구봉에게, “벗은 옳거니와, 혼인은 어렵네.”하고 대답했다. 송구봉은 율곡에게서 혼인에 대하여 거절을 당하자 담담히 웃으며, "율곡도 역시 속인을 못 면했군!"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율곡으로서도 항상 인륜이 근본을 따져서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 왔던 만큼 족히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마는, 국법이 정식으로 고쳐지기 전에는 역시 어떤 혼란을 가져올 것을 생각하고 실행에까지는 옮기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인계인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가혹하게 처리했던 서인계의 정철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동인들은 ‘정여립사건 수사’의 배후 조종자로 송구봉을 지목하며 왕에게 처벌을 간(諫)한다. 이로 인해 체포령이 내리고, 쫓겨 다니던 송구봉은 자수하여 결국 유배(58~60세)를 간다. 하지만 이때 그는 이 사건에 관련된 평생 벗인 율곡, 정철, 성혼의 명예를 지켜준다. 모든 인간관계에 평생 ‘바름(直)’을 실천할 것을 주장했던 그의 뜻대로 살았던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노비로 만들려는 안당 후손들의 보복을 피해 고령의 몸을 이끌고 떠돌다가, 1596년(63세) 충남 당진군 마양촌을 만년(晩年)의 은신처로 삼아 정착한다. 그리고 그는 소식을 듣고 찾아 온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열중하며 말년을 보낸다.
험난한 인생의 가시밭길에도, 송구봉은 임진왜란(1592~1598년)을 당해 고통 받는 나라를 구하고자 나름대로 애써보지만, 그의 친구 율곡이 이미 죽고 없었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그는 66세의 일기로 비운과 고난에 찬 인생을 마감한다.
성혼, 이이 등과 주고받은 “삼현수간(三賢手簡)”
삼현수간(三賢手簡)은 조선시대 송익필과 성혼, 이이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엮은 간첩(簡帖)으로 보물 제1415호로서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삼현수간(三賢手簡)은 구봉 송익필,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후대에 4첩으로 만들었다. 구봉, 우계, 율곡은 절친한 친구들로 16세기 성리학의 대가들인데 이기(理氣)·심성(心性)·사단(四端)·예론(禮論) 등 성리학을 둘러싸고 논한 편지를 모아 엮은 책이다.
편지내용은 구봉집, 우계집, 율곡전서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일부만 실린 것이 15편, 이들 문집에 없는 것이 16편이나 된다. 이들의 친필 편지들은 구봉의 초서(草書) 등 글씨만으로도 서예사적 가치가 있으며, 율곡의 친필글씨는 현전하는 것이 희귀한데 율곡이 구봉에게 보낸 편지가 13편이나 있어 사상사적, 학술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삼현수간은 송구봉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으며, 아직 학계에 보고되거나 공개되지 않고 있다.
송구봉과 이율곡의 정담
이율곡과 송구봉은 동시대 사람으로 서로 친분이 있었다
이율곡은 송구봉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록 학문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우리 이렇게 대화만 나눌 게 아니라, 우리 생각을 책으로 엮으면 어떻겠는가 ?”
“흠, 뜻이야 좋지만 어디 쓸 곳이 있겠나 ?”
“남이 알아주는 거야 상관할 바 아니지.”
“허허,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두 사람은 자기 생각을 글로 써온 다음 서로 바꾸어 보면서 글을 다듬었다.
두 사람의 글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인 양, 뜻이 잘 맞았다.
특히 율곡이 보기에 구봉의 글에는 글자 하나 고칠게 없었다.
구봉은 가끔 율곡의 글에서 고칠 곳을 짚어주었는데, 다시 보면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그때마다 율곡은 구봉의 깊은 식견에 탄복했다.
하루는 서로 글을 바꾸어 읽는데, 구봉이 유난히 여러 곳을 지적하면서 말했다.
“허허, 이거 당대의 대학자가 우리 집 소보다 둔하지 않은가!”
그러자 머쓱해진 율곡이 약간 성을 냈다.
“이거 말이 좀 심하군. 나를 소한테 비기다니 말이야.”
“그랬는가 ? 내가 잘못했네 그려.”
두 사람은 마주보며 껄껄껄 웃었다.
그 날 구봉은 정색을 하면서 율곡에게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네. 편지를 전할 곳이 있는데 자네가 대신 수고해주게나.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일세.”
율곡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디 사는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인가 ?”
“저 소를 타고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구봉은 마당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소를 가리켰다.
“아직 소는 타 본 적이 없는걸.”
“아마 자네 말보다 나을 걸세. 그건 그렇고, 길에서 이상한 젊은이를 하나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을 꼭 데리고 가도록 하게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지만, 구봉을 믿는 율곡은 더 묻지 않았다.
편지를 소매에 넣고 소에 올라탔다. 처음엔 영 마뜩하지 않았는데, 타고 보니 정말로 편안하기가 말보다 나았다. 게다가 소가 느릿느릿 걷는데도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십 리, 이십 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어허, 이 소가 축지법을 쓰는군. 구봉이 나더러 소보다 둔하다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어.”
이상한 젊은이와 노인들
소는 강원도로 들어선 후 북쪽으로 길을 잡아 높고 아름다운 산에 이르렀다.
수려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마다 파릇파릇 푸른 싹이 트고 봄꽃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다.
“여기는 금강산이 아닌가!”
그래요. 구봉의 소가 찾아간 곳은 민족의 영산 금강산이었다. 소는 굽이굽이 골짜기를 따라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길이 좁고 험했지만 소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가던 소는 이번엔 벼랑길로 접어들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아찔한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길이 아주 좁고 험해서 사람 한 명이 다니기도 힘든 곳이었다. 그렇지만 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가는데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 깊은 산중에 웬 사람일꼬? 이 험한 길에 말을 타고 다니다니 신기한 일이야.”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 길에서 딱 마주쳤다. 서로 마주치고 보니 참 곤란한 일이 생겼다.
길이 워낙 좁아서 서로 비켜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뒤돌아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소와 말도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담?”
율곡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그 젊은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말의 다리를 한 손에 두 개씩 모아 쥐더니 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서 한쪽으로 바짝 비켜섰다. 덕분에 율곡은 소를 탄 채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참 이상한 젊은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얼마쯤 길을 가던 율곡은 속으로 “아차!” 했다.
젊은이를 데리고 가라고 한 구봉의 말이 뒤늦게 떠오른 거예요.
얼른 뒤를 돌아보니 젊은이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율곡은 급히 손나팔을 만들어 젊은이를 불렀다.
“이보게 젊은이, 나 좀 잠깐 보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말을 멈추고는 아까처럼 말을 들어올려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벼랑길을 타고서 율곡에게로 다가왔다.
“나하고 어디 좀 같이 가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율곡의 뒤를 따랐다. 아주 입이 무거운 젊은이였다.
두 사람이 소와 말을 타고 험한 산길을 한참 올라타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쏴쏴쏴' 하고 들렸다. 절벽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율곡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한쪽에 폭포수가 은빛 물살을 휘날리며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 양쪽 등성이에는 산철쭉 무리가 푸른 새싹들과 어울려 망울망울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폭포 옆쪽에 넓다란 바위가 멍석처럼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복숭아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워 분홍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꽃 그림자 아래 너른 바위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넷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율곡과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그리로 다가갔다. 하지만 노인들은 바둑 두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율곡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다.
“문안 인사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한 노인이 돌아보면서 말을 던졌다.
“그래, 속세 사람이 여기는 웬 일인고?”
율곡은 소매 속에서 구봉이 써준 편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편지를 읽고 나서 다른 노인들에게 말했다.
“이거 문곡이 보낸 편지구먼.”
그 말에 율곡은 비로소 구봉이 문곡성의 정기를 받은 인물임을 깨달았다. 문곡성의 기운을 띠고 태어나면 큰 학자가 된다고 한다. 다른 노인이 말했다.
“그래, 문곡이 뭐라 적었는가?”
“장차 조선에 닥칠 왜란을 막아 달라는구먼.”
그러자 노인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그거야 하늘의 뜻인 걸 우리가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문곡의 부탁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에서 구봉이나 김덕령 같은 인재를 제대로 쓰면 몇 달 안에 전쟁이 끝나련만…….”
“이러면 어떻겠나? 왜란을 15년에서 8년을 줄여준다면?”
“그게 좋겠군. 아무래도 7년의 전란은 피할 수 없어.”
노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율곡은 깜짝 놀랐다.
선인들이 그려준 거북선
“우리 나라에 장차 왜란이 나서 7년이나 전쟁을 하게 된단 말인가.”
그때 다시 한 노인들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누구를 시켜서 7년 만에 왜란을 끝내게 한단 말인가?”
고민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이 문득 말고삐를 붙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옳지! 저기 인재가 있구먼!”
노인들은 종이를 꺼내더니 머리를 맞댄 채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리 접고 저리 접기를 한참을 하더니 마침내 완성이 됐는지 젊은이를 불러서 주었다.
“여보게 젊은이. 이걸 받게.”
노인들이 만든 것은 물에 띄우는 배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아주 특이했다.
용처럼 생긴 머리가 앞쪽에 솟아 있고 거북등 모양의 배 지붕에는 송곳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배 옆구리에는 여러 개의 노가 삐쳐 나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북선의 모형이었다.
지금 이 배를 받아든 젊은이는 바로 이순신이었다. 임진왜란이 나자 거북선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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