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휘는 6세 때 성진 보신학교普信學校 유치반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운 뒤 4학년 1학기까지 보신학교에 다녔다. 1923년 함흥 영신학교永信學校에 전학하여 졸업한 후, 1925년 캐나다장로회에서 운영한 영생학교永生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총독부가 고등보통학교로 지정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낫다는 자형의 조언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보결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가정교사로 고학을 하면서도 1930년에 보성고보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그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에 지원하여 낙방한 후, 이듬해에 목표를 바꾸어 경의전에 입학했다.
전종휘는 1935년 3월 경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백인제의 추천을 받아 경성부립京城府立 순화원으로 옮겼는데 당시 순화원은 500병상 규모의 새 병사를 건축 중이었고, 유명한 미생물학자 시가 기요시志賀潔의 제자로 경성제대 미생물학교실 조교수로 있던 시바椎葉芳彌가 원장으로 부임한 상황이었다. 전종휘는 순화원에서 유일한 한국인 의사로 무료환자를 진료했다.
얼마 후 시바는 전종휘가 경정제대 제1내과에 입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당시 제1내과는 호흡기․전염병․혈액 분야를 연구하는 이와이 세이시로岩井誠四郞가 주임교수로 있었다. 1937년 4월 초 제1내과의 부수보副手補가 된 전종휘는 2년 간의 임상경험과 연구경력 등을 인정받아 2~3년차 의국원이 맡는 주치의로 나서기도 했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생계비 부담이 커지자 수련 경험을 바탕으로 개업의로 나서보려고 생각했는데, 마침 먼 친척으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게 되어 병리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전종휘는 고스기 교실에서 부검 기로고가 재료의 정리를 도맡아 착실히 병리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39년에는 고스기의 소개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교수로 부임한 이제구를 도와 병리각론病理各論 강의와 병리조직 실습을 맡게 되었다. 경성제대에는 부수로 적籍을 두고 계속 연구하면서 1939년 4월~1941년 3월 경성여의전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전종휘의 초기 연구주제는 인체 위장관胃腸管 점막간질粘膜間質의 병리 조직학적 관찰이었는데, 고스기가 일본병리학회의 다음 회기 특병강연자로 위촉되면서 ‘흡수와 배설의 형태학적 관찰’이라는 연구과제를 제출했다. 그는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병리학회에서 고스기의 특병강연과 별도로 「인체의 위장관, 간, 비, 신 및 골수의 철 소견」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1942년 이 연구를 주논문으로 하고 「한국 뇌염의 임상적 관찰」외 7편을 부논문으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논문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가를 받았다.
1942년 12월까지 경성제대 병리학교실에서 근무한 전종휘는 고스기와 경서제대 이토 내과의 조교수로서 경성부민병원장을 겸직하던 노자카 교수의 추천으로 경성부민병원 내과의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인 의사들도 징용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는 함흥에 사설진료소를 개업했다.
전종휘는 해방 직후 함흥에서 조선공산당 고위층 진료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함경남도 인민위원회의 요청으로 1945년 10월 경 다시 문을 연 함흥 의학전문학교에서 병리학 강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백인제를 비롯한 경의전 동창들로부터 경의전 재건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고 가족과 함께 월남하기로 결심했다. 1946년 3월 말 작은 목선을 타고 월남한 전종휘는 경의전 강사 발령을 받았다. 이어서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의전이 통합되어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설립되면서 부교수로 발령 받아 내과학교실 제5분과인 전염병내과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귀국하거나 북한에서 월남하는 등 인구이동이 많았다. 더욱이 보건후생시설도 부족해 전염병이 많이 돌았다. 전종휘는 이 환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검 예를 얻고 국내 최초로 뇌염바이러스를 분리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