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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염제를 설명하기 위해 앞에 약간 길지만 해제성 글을 덧붙였다.
아주 오랜 옛날 헌원(軒轅)과 신농(神農)이 합병하여 치우(蚩尤)를 쫓아가 치우 머리에 쓰고 있던
소뿔도 부러지고 금방 잡힐 것처럼 보였는데 치우가 갑자기 온 하늘 가득히 안개를 뿜어 헌원과
신농의 병마(兵馬)들 눈앞을 흐리게 해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게 됐다.
치우는 패잔병을 이끌고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 헌원은 화가나 탄식했고 신농은 발끈해 발을 멈추
었다. 후에 헌원은 나침반을 발명하여 신농과 상의하여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남쪽으로 계속
쫓아갔다.
그들은 높은 산과 큰 강, 평원과 초원 곳곳을 쫓았다. 64일을 쫓았는지 아니면 81일을 쫓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가는 길에 헌원이 생각했다.
‘탁록(涿鹿)에서 치우와 전쟁한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치우에게 약탈당한 군량은 아직도 전부
되찾지 못했고 사로잡혀 간 부족도 전부 풀려나지 못하고 있단 말야.’
신농도 염려했다.
‘황하에서 치우와 전쟁한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치우에게 약탈당한 도관(陶罐)과 도부(陶釜)는 아직도 전부 되찾지 못했고 빼앗긴 골침(骨針)과 석모(石矛)도 전부 잃어버렸단 말야.’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보물이었다. 헌원을 더욱 상심하게 한 것은 그가 가장 아끼는 상아조통(象牙雕筒)을 전쟁 중에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애지중지하는 보물은 조각하고, 갈고, 구멍을 뚫고 하여 노련한 장인(雕匠)이 25일인지 49일인지를 공들여 조각한 것이었다. 또한 신농을 더욱 상심하게 한 것은 그가 가장 아끼는 술을 담는 수형기명(獸形器皿: 짐승모양의 그릇)이 역시 전쟁 중에 깨진 것이었다.
그 보물은 진흙을 빚고 산을 그려 굽고 하여 역시 노련한 도공이 16일인지 36일인지를 공들여 만든 것이었다.
(이 부분은 비록 한족 신화로 왜곡되었을지라도 무신 치우의 진면목을 전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들 두 사람은 더욱더 분개하여 부락의 사람들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치우를 쫓아갈 것을 결심했다.
남자들은 석모를 가지고 골도(骨刀)를 들었으며, 부녀자와 아이들은 식량과 고기를 등에 지고 저마다
웃통을 벗고 맨발 벗고 앞을 향해 쫓아갔다.
몇 일을 쫓았는지 배가 고파 헌원과 신농의 안배에 따라 여자들은 밖에서 장작더미를 태우고 솥을
놓아 밥을 끓이고, 남자들은 나무 막대기로 사슴다리, 곰 손바닥, 멧돼지 엉덩이 등을 꽂아 잘 구워
먼저 헌원과 신농이 다 먹은 다음 용맹스러운 남자들이 먹고 나서 여자와 늙고 약한 남자들은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또다시 몇 일을 쫓아갔는지 추워서 헌원과 신농의 분부대로 남자들은 바삐 풀을 베고 사냥을
하였고 여자들은 동굴 속에 마른 풀을 깔아 침대를 만들고 골침으로 짐승 가죽을 꿰매 옷을 만들었다. 침대가 마련되고 옷을 다 짓고 나서 먼저 헌원과 신농에게 주고 다시 용맹스러운 남자들에게 돌아
가고 나서, 여자와 늙고 약한 남자들은 잠도 조금 열악하게 자고 옷도 조금 열악하게 입었다.
사람들은 모두 전쟁은 헌원과 신농의 지휘에 따라야 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들 둘은 부락에서
뽑힌 우두머리였다. 용맹스러운 남자들은 돌진하고 죽여서 일단 싸움에 이기고 나면 치우의 식량,
의상, 무기, 주거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에 그들의 사람을 붙잡으면 그들을 구속하여 노동을
시키고 자신도 곧 한가해질 수 있었다.
하루는 헌원과 신농이 사람들을 데리고 운몽택(云夢澤)에 왔다. 운몽택은 크기가 굉장한 호수로
호수 북쪽의 한 부분을 운택(云澤)이라고 하고 호수 남쪽의 한 부분을 몽택(夢澤)이라 했다.
그들은 끝없이 넓은 호수의 물결이 성이 나 부근의 산 위를 넘실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커다란 숲에 나무 말뚝만 남고 나무 줄기는 보이지 않고 나무 가지는 어지러이 땅 위에 널려
있는 걸 발견했는데, 말뚝 옆에는 수많은 돌 파편, 말씹조개 껍질(蚌殼) 조각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모두 돌칼(石刀), 돌도끼(石斧), 말씹조개 칼(蚌刀)이 부서진 조각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위를 살펴보니 산기슭 아래 몇 척의 독목선(獨木船)과 잉어 뼈로 만든 목걸이가
발견되었다.
헌원이 신농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치우는 배를 타고 도망갔고 그들만이 이 목걸이를 하는 것
같아!”
(치우가 전투선으로 배를 사용했고 목걸이를 사용했다는 것으로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고고학 유물을 보면
동이족은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사용했는데 신화에 등장하는 잉어뼈 목걸이는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신농이 대답했다. “우리도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자. 배가 완성되면 너와 내가 각자 한 쪽씩 찾는
거야.”
두 사람은 상의하고 나서 즉시 사람을 보내 산에 올라 벌목해 와서 나무를 뚫어 배를 만들게 했다.
몇 날 몇 일을 소비했는지 모르고 얼마나 많은 돌도끼가 부러지고 얼마나 많은 돌 끌(石鑿)이 부러
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깔려서 다쳤는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이고 나서야 독목선이 완성
되었다.
헌원과 신농은 각자 부락을 인솔하여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얼마나
많은 작은 배가 뒤집어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 죽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어렵게 겨우
몽택의 한 하구―원수구(沅水口)에 도착했다. 모두들 뭍에 오르니 과연 치우 부락의 움막이 남향으로
바람을 등진 산기슭 아래, 호숫가에 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바탕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치우는 두 갈래의 부락이 포위하여 호되게 두들겨 패는 걸 이겨
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 위의 새로 바꾼 소뿔 두 개도 땅으로 떨어졌다.
수많은 사람과 말이 부상을 입고 두 무리로 흩어졌는데, 한 무리는 물로 뛰어들어 원수(沅水)의 남쪽
갈대 늪(蘆蔿蕩)으로 도망쳤고 또 다른 무리는 산으로 올라가 북쪽 밀림으로 도망쳤다. 헌원은 사람
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쫓아갔고 신농은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쫓아가 치우와 그의 남은 병마를
모두 포로로 잡고 전리품을 획득했다.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 헌원이 신농에게 말했다. “우리 좋은 음식을 먹자.” 신농이 대답했다.
“좋아! 커다란 솥을 올려 불을 피우고 치우의 쌀을 끓이자.” 헌원은 남자들을 데리고 진흙을 빚고
가마 동굴을 파고 여자들은 남쪽에서 벼를 베었고, 신농은 남자들을 데리고 장작을 패고 가마를
굽고 여자들은 남쪽으로 가서 쌀을 빻았다.
몇 일 안되어 십여 개의 유난히 큰솥이 완성되어 가마에 넣었다. 헌원과 그의 부락 남자들은 온
얼굴과 온몸에 누런 진흙이 묻어 모두 누렇게 변해 있었다. 신농은 헌원을 가리키며 웃으며 말했다.
“너 헌원은 아예 황제(黃帝)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솥이 가마에 들어가자 불을 붙였다. 신농과 그의 부락 남자들은 온 얼굴과 온몸이 모두 연기에
그을려 모두 벌겋게 변해 있었다. 헌원은 신농을 가리키며 웃었다.
“너 나보고 웃지마. 너는 아예 염제(炎帝)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오래지 않아 큰솥이 다 구워져 황제와 염제 둘은 서로 껴안고 웃었다. 두 부락의 남자들은 모두
기뻐 노래부르며 춤추며 정신 없이 외쳤다.
“황제, 염제! 염제, 황제!”
남쪽에서 벼를 베고 쌀을 빻던 여자들은 환호성을 듣고 산봉우리로 달려가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니
가마 위에 불이 꺼지고 커다란 솥이 하나하나 평지의 부뚜막에 올려진 것을 보고 역시 노래하며
춤추며 크게 소리쳤다.
“황제, 염제! 염제, 황제!”
이것이 바로 헌원이 황제라 불리고 신농이 염제라 불리게 된 이유다.
두 부락은 승리의 밥을 먹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큰솥은 가지고 가기가 힘들어 그 자리에 남겨
두었다.
후세사람은 이 솥이 있던 지역을 정항(鼎港)이라 부르고 이 산봉우리를 간조산(看灶山)이라 불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정호(洞庭湖) 지역의 사람들은 여전히 쇠가마솥에 밥을 지어먹는 걸 좋아
한다.
유자영(劉子英) 정리, 호남(湖南) 동정호(洞庭湖) 일대에 전해짐.
위민(衛民)이 지은 <역대제왕고사(歷代帝王故事)>에서 발췌.
*위소(韋昭) 주(注)에 이르기를 신농은 3황이라 황제 전부터 있어 황제가 염제를 멸하고 그 자손을 멸했을 뿐이니
신농이 아님을 가히 명백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정 강성(鄭康成)이 5경을 논박해 이의를 제기해 말하기를 황제의
희(姬) 씨 성은 염제가 하사한 것이라 했다.
황보밀(皇甫謐)이 「제왕세기」에서 말하기를 황제는 유웅(有熊)씨인 소전(少典)의 아들 희(姬)씨 성이라(헌원의
후예로 황제헌원이다), 그 선조는 곧 염제의 어머니 집안인 유교(有喬)씨의 장녀로 소전의 가문과 혼인한 고로
「국어(國語)」에서 병칭했다. 이에 신농씨 말기에 유웅씨로부터 나라를 받아 헌원의 땅에 살았다.
「죽서기년」의 황제헌원 파트를 서술한 뇌학기는 이를 근거로 하여 황제는 신농의 모제(母弟)의 후예 소전의 임금
자손이며, 후일 염제(炎帝)대에 유웅(有熊)에 봉해져 희(姬) 씨를 사성 받았다고 말한다.
이위(耳韋)의 주(注)에 이르기를 제(帝)가 염제와 그 자손을 멸했다 하고, 시자(尸子)는 신농씨의 역대가 천하에 70
세를 이어 군림했다(神農氏七十世有天下)고 말한다.
사마천이 지나족의 시조로 삼은 황제는 70세의 역대를 이어 천하에 군림한 우리 조상 신농씨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에 기대어 살았으며 그나마 신농씨의 국가는 배달 환웅국의 번(藩:울타리)국에 불과했다.
「여씨춘추」는 신농씨의 역대가 천하에 17세 동안 군림했다고 말하고,
「사기」<5제본기>는 헌원의 때에 신농의 역대가 쇠약해져 색은(索隱:사기의 주석)에 이르기를 치세가 쇠함은
신농씨 자손의 도덕이 쇠진하고 박덕해진 것을 이르는 것이니 곧 반고(班固)가 이른 삼로(參盧)와 황보밀(皇甫謐)이
이른 유망(楡罔)이 바로 그 증거라 했다.(삼로는 참려라고도 하여 병칭해 참려유망, 삼로유망이라고 함)
소호계는 전설중의 5제 가운데 하나로 성은 기(己), 이름은 지(摯), 호는 금천(金天)씨이다.
사마천이 지나족의 황별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의 아들이라 말했지만 황제의 뿌리가 본래 동이족 무대의 중심거점인
산동성 곡부 아래 수구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이 동이족 조상 염제 신농씨의 아들이고 어머니 또한 동이족 유웅씨의
딸이므로 핏줄은 동이족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륙의 사서는 황제의 아들이라 한 소호가(그것도 동이족 태호복희(6대 다의발환웅) 성인을 본따
소호라 했지만) 고대 동이족의 수령이라 말한다(古代東夷族首領 因修太昊之法 故稱少昊) 재위 84년에 100세를
살았고 "백성은 음란함이 없었고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으며 만물이 화려한 복스런 문명의 꽃을 피웠다"고 한다. .
*五帝는 少昊金天氏(또는 黃帝軒轅), 顓頊高陽氏, 帝嚳高辛氏, 唐堯, 虞舜이라고도 하고, 太昊, 炎帝, 黃帝, 少 筧(호),
顓頊이라고도 한다. 中國의 鄒君孟은 少昊에 대하여 "少昊無疑是在蚩尤之後.(中略) 少昊所在地的魯西南是中原和東
夷集團交籦(회)的地方, 是華夏族形成的一個熔爐. (中略) 少昊卽小 筧(호), 又叫金天氏 或窮桑氏. (中略) 少昊氏是以
鳥作爲圖騰的氏族部落. (中略) 大量的材料證明, 少昊氏是世居魯西南, 屬于地地道道的東夷集團的. (中略) 少昊氏的
發祥地和根據地在山東曲阜一帶. (中略) 大汶口文化紿(흔)可能就是在這樣的基礎上産生的, 睼(타)印方少昊文化爲主,
但也融籦(회)了中原文化的特點, 大汶口文化可以說是中ㅑ東兩大集團融合的結晶, 和仰韶ㅑ龍山文化一樣, 是華夏族
文化中的圴(괴)寶."
(소호는 의심할 것 없이 치우의 후예다. (中略) 소호가 살던 魯의 서남 땅은 中原과 東夷集團이 서로 어울리던 곳으로
華夏族 형성의 한 용광로였다. (中略) 소호(少昊)는 곧 小筧(소호)이며, 금천씨 또는 궁상씨라고도 일컫는다. (中略)
소호씨는 새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부락이다. (中略) 많은 자료가 소호가 누대로 살던 곳은 魯의 서남 땅으로 명명백
백히 동이집단에 속함을 증명한다. (中略) 소호씨의 발상지와 근거지는 山東省 곡부 일대이다. (中略) 대문구문화는
동방 소호문화가 위주가 되어 중원문화의 특성도 융합되었을 것이다. 대문구문화는 곧 中∇ 양대 집단이 융합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앙소·용산문화와 마찬가지로 곧 화하족 문화의 보배인 것이다.)
(陳泰夏 明知大學校 敎授 / 韓國國語敎育學會 會長 東夷文化特輯)
*홍도와 회도문화는 한가지로 패가리호(貝加爾湖:바이칼호)에서 나와 구석기 말기에 대륙으로 나누어 들어가
발전한 부족이며 회도문화는 홍도문화구역으로 미리 침투해 들어가 채도문화의 씨를 뿌리고 채도문화와 혹은
혼합한다.
(이들이 "환국"-"광명제국"의 후예인 것은 이제 굳이 환단고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잘 알것이다. 구차스런 설명같아
이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회도의 다른 이름은 <박문도(拍紋陶:무늬를 손으로 두드려 만듬)>인데, 그 제조방법이 홍도의 인문(印紋:도장처럼
찍어 제조)으로 계승해 전해졌으며 이 시기에 이르러 장성 천참(장성의 원형) 일대의 세석기 문화는 이미 채도문화와
혼합한 시기였거나 그 소멸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민족에 있어 황제시대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농국과 환웅 배달국의 남북전쟁으로 동서연맹(동이서하
연맹)을 만들어 연맹의 주체는 동방족 봉(鳳) 도등의 동이와 서방족 용(龍) 도등(圖騰:깃발로고)의 서하(西夏)가
되었다.
동이는 봉조(鳳鳥)씨의 소호(少皥)가 대표가 되어 최고 도등을 장악했고, 서하족은 황룡씨의 황제가 대표가 되어
최고도등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서 량지는 이 <동이서하연맹>을 ‘이하일가 중국민족구성 정통문화탄생의 원시기초’라
한 것이다.
황제의 본 족 중의 하나는(외가) 곤륜의 터인 신강 탑리목(塔里木:타림) 분지의 유웅(有熊)국으로 웅도등 족이었다.
그리하여 황제씨는 본래 웅 도등을 본위로 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친가쪽인 신농 부족의 도등 체계가 복잡하자 이를
종합했다.
홍적통 초기에 탑리목에 기상이변이(타림사막화가 진행)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유웅족과 서왕모족은 사막화와 기상
이변에 굴복하지 않다가 후일 신석기 시대에 양대 도등(圖騰:깃발로고) 씨족을 하나로 합쳐 황제를 맹주로 하는
연합세력으로 확대해 탁록에서 각문도(刻紋陶) 계의 치우 세력과 한 판 붙었으며, 세석기 계열의 신농씨를 판천에서
저지하고 중원지구에서 채도문화를 휘황찬란하게 건설했다는 게 서 량지의 주장이다.
물론 이는 고고학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요 가설이라 지금까지 설명한 부분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서 량지
역시 지나족으로서 사마천의 왜곡을 답습해 치우천왕을 탁록에서 격살, 궤멸시킨 것으로 기술했음은 물론이다.
서량지는 이들 유웅족과 서왕모족이 「상서요전」에 등장하는 ‘주호웅비(朱虎熊羆:큰 곰 비)’의 이면적 실체이며,
「사기」<오제본기>에 황제를 기본 부대로 조직해 만든 ‘비휴(豼貅:표범일종으로 비는 수컷, 휴는 암컷)’ 도등(圖騰:
깃발로고 토템) 씨족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며,
염제와 더불어 판천의 들에서 전쟁을 했다는 ‘웅비(熊羆)’, ‘추호(貙虎:맹수이름 추, 추호는 호랑이 비슷한 맹수)
부대가 바로 이것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소위 주호(朱虎), 추호(貙虎)는 바로 서왕모 족의 도등이니,
「산해경」<대황서경>에 서왕모를 설명하기를 ‘호랑이 치아에 표범의 꼬리가 있다’ 했으니, 바로 이것이 이 일개
씨족의 도등신을 묘사한 실체라고 했다.
유웅씨(곧 웅비(熊羆)이니 「사기정의」에 ‘비(羆)는 웅(熊)과 같아 황백색이다’)는 서왕모씨(곧 주호 혹 추호) 와
합쳤으니, 이는 모두 홍적통 전후, 중국서부 곤륜의 터 곧 탑리목(타림) 분지에 머물러 거주했던 원 씨족으로 또한
곧 형제씨족이다. 이로 인해「신서(新書)」<수정(修政)편>에 ‘황제가 유사(流沙:사막)를 건너 곤륜에 올랐다’는
전설이 있으며, 「서응도(瑞應圖)」에 ‘황제 때에 서왕모가 백가락지를 헌사했다’ 전설이 있고, 한무제 시대로 직접
내려와 <서웅(西熊)>이라는 이름이 다시 돌아온 이유이며, 혜왕(惠王)의 아들 유명(劉明)을 광천(廣川)에 봉해 서웅
(西熊)족이 되었다.(見「사기」 건원이래 왕자후자연표 및 「전한서」 왕자후표)(안원전의 21세기 담론중 인용)
*동이족 소호릉(少昊陵):소호는 전설 시기 오황 중의 하나다. 그는 곡부(曲阜)로 천도하여 태호복희의 법을 수양한
현군(賢君)이었다. 죽은 후 지금의 산동 곡부(曲阜) 소호릉(少昊陵) 뒤쪽 운양산(云陽山)에 매장되었다.
사기상의 3황5제 명칭
5제시대 중국 고고학 문화구계(文化區系)
[삼황오제의 이상세계]
고대 전설 속의 “삼황오제”는 도대체 누구인가? 역사상 줄곧 정설은 없었다. 특히 “삼황”은 그 의견이 여섯, 일곱
가지도 더 되며 “오제”는 현재 <사기>의 기록이 가장 통용되고 있는데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의
5명이다. 그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시대에 있던 유명한 인물과 부락은 또 신농씨(神農氏), 치우(蚩尤), 축융(祝融),
공공(共工) 등이 있고 후대 사람들은 덧붙혀서 하(夏), 상(商), 주(周) 삼대의 선조가 모두 오제와 관련있는 중요한
인물이며 심지어는 바로 오제의 “후예”라고 말할 것이다. 신화 전설 중에는 삼황오제 시기에 천하에는 만개의 나라가
있었는데(이것이 바로 방국입립지시인 마을국가시대의 왕들로 모두 환국의 후예들인 동이 제족의 후예들이다)
*지나사가들은 이 때가 원시사회의 부계씨족 사회 말기단계로 보고, 도처에 부락 규모의 국가가 숲처럼 가득 들어찬
“부락방국임립지시(部落方國林立之時)”의 시기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사마천이 비록 요를 천자로 장식
했다 하더라도 그 실은 고만고만한 부락으로 조성된 부락방국(部落方國)의 하나쯤으로밖에는 여기지 않고 있다.
서량지는 이를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요의 천자설을 일축하고 있다. 당시는 결코 한 곳에 정착해 나라를 이룰
만한 시기도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권제 유습이 그대로 남은 농목축 사회의 하나로 지금의 칸셉인 국가를 이룬
다는 것은 문명사적으로 어림없는 일이며 그 뿌리 또한 동이 제족의 바운더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삼황”과 “오제” 모두 인민 민주를 제창하던 덕이 높은 지도자였으며, 그들이 보위에 있을 때 인민과 함께 “덕의 정치”
를 구현했다 지나사가는 치우에게 쫓겨 패망한 황제를 벼리로 삼기위해 황제가 남쪽의 치우(蚩尤)를 전쟁으로 타파
하고 통일된 각 부락마다 사람들을 이끌어 오지를 문명사회로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그들이 늙자 선양의 방식으로
지도자의 위치를 걸출한 후임자에게 내 주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통치한 기간에 천하가 공정하고 말이 믿을 만하고
화목하여 사람마다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진실한 “삼황오제”를 찾아서]
“삼황” 시대는 비교적 빨라 모계 씨족 사회의 흔적을 포함하며, “오제”는 이미 원시사회 말기에 진입하여 모계 씨족
공동 사회의 부락연맹이 와해되어 갔으며 고국의 지위에도 동요가 생겨 아직 국가가 진정으로 건립되지 않은 특수한
역사 단계다.
중원의 삼황오제 시대는 배달 환웅시대와 단군조선의 예속기였다. 그러나 지나 사학도들은 묵가때 요순 선양으로
변조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제”는 모두 군사 민주제 아래의 부계 씨족 부락의 수장 혹은 군사 지도자로, 원시의 공유제와 평등관념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직 완전히 퇴화되지 않은 원시 민주관념과 제도의 제약을 받아 선양제(禪讓制)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하(夏) 민족 부락연맹에서 매우 빨리 중대 변혁을 맞아 오제 중 하나였던 요(堯)가 지도자의
지위를 순(舜)에게 선양하고 순은 또 우(禹)에게 선양하는데 우는 오히려 다시 선양하지 않고 지위를 자신의 아들인
계(啓)에게 주어 이때부터 “부자상속, 형제상속”의 새로운 역사 단계가 시작되었다.
[“오제”와 3대 집단]
위 3대집단을 가른 것은 지나 고고학자들의 분류인데 지나사학자의 사관을 본다는 점에서 보아주었으면 하고
동시에 확실한 한민족 대륙사관이 서 있다면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삼황오제 시대 특히 오제시대는 중국, 중화민족 및 다민족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기초가 된 시기였고 중화민족의
여러 갈래의 선조가 결합되고 다시 구성된 중요한 단계다.
중화 대지상의 다른 경제 유형과 다른 문화 전통이 분포한 제(諸)문화는 특히 앙소문화를 대표로 하고 중원 조 농작
구역을 주요 활동 범위로 하는 신농씨(神農氏) 화족 집단과 어로와 수렵을 주요 경제 활동으로 하는 유웅씨 황제 집단,
그리고 산동성의 대문구 문화와 강소성 쑤쪼우(소주) 태호의 양저문화를 대표로 하고 동남 해안의 벼 농작 구역을
주요 활동 범위로 하는 우하(虞夏)집단이 있다.
이 3대 집단은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한 동시에 문화의 교류와 끊임없는 조합으로 일체가 되어 모이고 문화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을 향해 크게 전진했다. 이는 하(夏), 상(商), 주(周) 3대 문명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았고
수 천년에 걸친 끊임없는 중화문명 근원의 소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