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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제자훈련 제 8 강 건강한 교회재정운영
교회가 예수님의 의도했던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병들고 부패한 교회재정운영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할 교회의 머리 자리를 노리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바로 경제적 부로 표현되는 맘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맘몬의 힘을 과소평가해선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필적해서 사람들의 충성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맘몬임을 인정하셨습니다(마 6: 24). 맘몬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략해서 진정한 머리되신 예수님의 뜻을 좇게 하기 보단 맘몬축적과 소비 논리에 충성할 것을 유혹합니다.
호주머니의 주인이 진짜 주인입니다. 아무리 입술로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해도 교회의 호주머니를 맘몬이 주장하고 있다면 그 교회의 주인은 맘몬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뜻에 따라 교회재정을 건강하게 운영하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맘몬의 힘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재정운영은 병들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 건강회복을 위해선 재정운영과 관련된 잘못된 관행들을 뿌리 뽑고, 건강한 교회재정운영을 위한 원칙을 확립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 잘못된 관행들
1) 수입에 관련된 관행들
교회재정 역시 수입과 지출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수입과 관련된 잘못된 관행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수입이 건강해야 지출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부정직한 방법으로 번 돈이나 땀흘리지 않고 벌어들인 돈은 대체적으로 낭비되거나 잘못 쓰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 역시 수입이 깨끗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수입확보를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잘못된 관행을 수용하고 묵인해 왔습니다.
첫째, 성경을 왜곡하여 헌금을 강요해왔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겐 헌금의 의미를 잘 깨달아 헌금생활을 정성껏 해야 할 본분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헌금을 강요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헌금강요의 좋은 예를 오덕호 목사의 『교회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 기간 중에 그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교단의 선교대회를 위해 헌금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부흥강사의 설교가 끝나고 광고시간에 담임목사가 이렇게 광고했다. ‘이번 선교대회에 우리 교회가 작정한 헌금 액수는 5백만 원입니다. 내일 밤 집회 때 이를 위해 헌금하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셨다가 헌금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강사가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더니 담임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돼. 내가 할 테니 봐!’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런 귀한 사업을 혼자 할 사람 없어? 혼자 5백만 원 헌금할 사람 일어나?’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교인들을 둘러보고 한 번 꾸짖은 강사는 다시 말했다. ‘그럼 두 사람이 나눠서 하지. 2백5십만 원 헌금할 사람’. 하지만 아직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다시 꾸짖은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십일조 감당할 사람! 5십만 원 할 사람이 일어나 봐. 이건 많을 거야’. 과연 두어 사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열 사람이 다 찼다.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강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 여전도사 뭘 해, 빨리 이 사람들 이름 적어!’
강요되었기 했지만 결국 그 돈이 좋은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되었으니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도 잘 된 일이고 당사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돈 자체라기보다는 돈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 자세와 신앙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고후 8:12; 9:7). 헌금에 대해 잘 가르쳐도 사람에겐 허영심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을 하게되는 죄악된 경향성이 있습니다. 헌금강요는 이러한 본능적 허영심을 더욱 극적으로 자극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켜 결국 외식적인 헌금을 하게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부정하고 거짓된 헌금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을 잘 거두어 드리는 부흥사를 추켜세워가며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강요하고 걷힌 헌금 중에 사례비라 하여 부흥사와 담임목사가 몇 대 몇의 비율로 나누어 챙기는 관행을 말끔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둘째, 십일조를 왜곡해서 축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선 안 됩니다. 십일조와 관련해서 가장 애용되는 말씀이 말라기 3:8-10절입니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9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본문을 그대로 교회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십일조를 안하는 사람은 하나님 것을 도적질 한 것이라고 윽박지릅니다. 십일조를 개인주의적인 경제적 축복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제시합니다. 아주 성경적인 적용인 것 같지만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많은 폐해를 끼쳐왔습니다. 이런 협박과 유혹으로 교회에 많은 헌금이 거쳐 물질적으론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교회와 성도들의 심장은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손익계산으로 대신 채우게 되었습니다.
우선 십일조와 관련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입니다. 말라기가 속해있는 구약시대엔 성전예배가 중심이었고 레위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십일조는 경제수단인 토지가 없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신 12:5-19; 민 18:21-32). 또 이와는 별도로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 그리고 대표적인 경제적 약자들인 외국인,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님을 통해서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성전제사의 종결과 함께 십일조라고 하는 제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전제사가 있기 전부터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고(창 14:20)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점(창 28:22)을 들어서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과 관련 없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단회적 행동 자체를 들어 십일조는 신약시대 성도들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데엔 신학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이들을 본받아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계속 드리고 싶다면 말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기서와 똑 같은 맥락에서 십일조를 안하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꾸짖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 그리고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을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 창조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새롭게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 기만을 책망하기 위해 강한 어휘를 쓴 것이 사실입니다. 교육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헌금 드리는 자세와 관련해서 성경전체의 균형 잡힌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도둑놈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전부라면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과 아울러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 성숙한 자세를 갖도록 성도들을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대가로 축복을 약속하신 것도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드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신앙을 회복하면 이스라엘 전체를 축복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맥락을 싹 빼어버리면 말라기서 말씀은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풍조에 편승하게 만드는 잘못된 관행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셋째, 교회직분의 매직행위를 통한 재정확충입니다. 안수집사, 권사, 장로에 임직하면서 일정한 헌금을 하게 하는 관행입니다. 교회규모에 따라 그 액수는 일정하지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모두 임직하게 되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정직한 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인천 임마누엘교회의 아무개 목사는 2002년 6월말 장로 후보자들에게 장로자격 기준 14가지를 명시한 문건을 나눠주면서 ‘2000만원에서 3,000만원의 헌금을 낼 수 있느냐'는 조건을 끼어 넣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런 관행으로 말미암아 교회직분을 마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는 바입니다(행 8:14-24).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베드로와 요한이 빌립을 통해 전도 받은 이들에게 안수를 해주자 성령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능력이 몹시 부러웠던 시몬은 돈을 드려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부탁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라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반대로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교회 직분을 살 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넷째,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강조와 차입경영입니다. 교회건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역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배전용 공간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사역을 염두에 두고 교회건물을 건축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흐름을 보면 교회건물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건물을 짓는가를 마치 신앙의 척도요 목회성공의 비결이요 기준인 양 과장합니다. 하여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건축을 위해 거두어 드립니다. 건축헌금하고 축복 받은 사례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릇된 동기부여를 합니다.
여기엔 교회건물이 구약적 의미의 성전이라는 신학적 오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조차도 하나님은 너무 광대하셔서 특정 건물에 국한 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왕상 8:27; 사 66:1). 하나님이 교회건물에 특별히 임한다는 생각은 구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물면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 2:19-21). 즉 예수님은 구약성전이 자신의 몸으로 대체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전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됨으로 성취되었습니다(히 9-10장). 이렇게 잘못된 헌금을 하다보면 막상 교회 본연의 사명실현을 위한 헌금을 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를 병들게 만들고 그 위상을 추락시키는 주범 중에 하나입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건축에 당장 필요한 액수가 채워지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들이 은행에서 거액의 자금을 차입하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무거운 부채의 짐을 지게 되기 때문에 설교나 목회방향이 하루 빨리 돈을 갚을 수 있도록 조정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성경이 왜곡되기도 하고 기독교복음의 전체적 균형이 깨지기도 합니다. 그나마 헌금이 잘 걷혀서 은행 빚을 정한 기간 내에 갚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교회는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깨지기도 합니다.
다섯째, 헌금의 질보다 헌금의 양을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들이 드리는 거액의 헌금보다 더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2:41-44). 그 두 렙돈은 그 과부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삶이 담겨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액이 필요한 한국교회는 헌금의 질 보단 양을 강조합니다. 무조건 액수가 높으면 좋고 칭찬을 더 많이 받습니다. 헌금의 출처에 대하여도 묻지 않습니다. 김홍도 목사는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라는 설교에서 모교회의 한 장로가 IMF 위기가 터져 사업이 부도나기 직전에 건축헌금을 드리고 보자는 심정으로 2억을 드렸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예를 듭니다. 이는 엄격히 말하면 채권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의도적으로 건축헌금으로 드려버린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진지하게 권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2) 지출에 관련된 관행들
첫째, 불투명한 지출이 많습니다. 2년 전 소망교회 간접세습 문제를 다룰 때 였습니다. 아들을 위한 분당소망교회를 건축하는 데 소망교회재정에서 80억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공식적으로 결정되었을 땐 이미 그 돈이 지출된 다음이었다는 점입니다. 담임목사와 재정담당 장로 등 최 측근의 결정으로 실행된 것입니다. 기독교신문기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소망교회 당회 서기 장로는 개혁연대 측에 소망교회는 예산 지출항목의 약 40%까지 예비비로 잡혀있다고 시인했습니다. 이는 교회 재정의 수입과 지출이란 것이 워낙 불확실한 것이라 불가피한 것이라고 설명 아닌 설명을 하였습니다. 예비비는 결국 담임목사와 그 측근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들 중엔 이렇게 교회재정의 상당 부분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것이 목회성공의 기준인양 내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재정이 불투명하게 이루어질 때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3년에 있었던 김홍도 목사의 31억 원에 달하는 교회재정관련 횡령 및 배임 사건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측근들과 결탁하여 방송사 로비자금, 업무상 배임 및 위증 혐의 관련 변호사 비용, 감독회장 선거비용, 신문광고 및 변호사 선임비용, 불륜의혹 관련 합의금, 교회개척을 위한 토지매입 그리고 수련관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교회재정에서 지출한 혐의로 결국 실형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이와 관련해서 자세히 알 리가 없습니다. 김홍도 목사 측은 이런 항목들이 비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교인전체 회의에서 통과된 예산안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된 한국기독교교회수호대책위원회는 재판장에게 보내는 탄원서에서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습니다: ‘감독회장이나 총회장 선거 비용을 목사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는 전혀 없고 교회가 전적으로 비용 부담을 책임지는 것이 관행인데 이러한 교회의 관행을 범죄행위로 보는 것은 교회의 현실을 잘못 알고 있는 무지의 소치이며 종교탄압의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둘째, 담임목사 사례비 항목이 정직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를 위해 지출되는 재정은 여기저기로 분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수 생활비로 지급되는 목회자 사례비 외에 추가되는 항목이 많습니다. 각종 공과세금, 자동차에 관련된 일체의 비용, 주택에 관한 비용, 자녀교육비, 도서비 등을 비롯한 목회연구비, 접대비 등을 포함하는 목회활동비 등이 그 예입니다. 담임목사에게 지출되는 재정의 총액의 과다는 둘째로 하더라도 성도들에게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 것은 상당히 부정직한 행위입니다.
셋째, 목회자간의 사례비 차이가 심각합니다. 일단 같은 교회의 교역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심각합니다. 이를 감추기 위해 상당수의 교회들이 담임목사와 교육전도사를 다 합해서 사례비의 총액만 보여줍니다. 이는 정직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또한 교회규모나 지역에 따라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가 지나치게 차이가 많이 납니다. 최근 예장 통합 교단에선 미자립교회 목회자 사례비 평준화를 위해 노회가 일괄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진일보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가난한 목회자들만 평준화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목회자들 사이에 부당한 위화감을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꼭 물량적으로 큰 교회를 목회해야만 탁월한 영성과 능력을 갖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에 따라 사례비가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의하면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 똑 같은 칭찬을 받은 것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마 25:14-30). 물론 목회규모에 따라 활동비에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재정지출이 조정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왜 생활수준에서 그렇게 극명한 차이가 나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교회가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함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교회지출 항목간 비율이 교회 본연의 목적에서 빗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교회의 본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본질에 의하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예배, 교육, 증거, 교제, 봉사, 사회참여 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재정은 교회가 이런 기능을 잘 감당하도록 지출되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교회가 처한 상황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기능 보단 다른 데에 지나치게 많은 재정이 지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재정과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자료를 구한다고 해도 예산․결산 항목에 있어서 교회간에 너무나 큰 편차가 있어 본격적이고 철저한 분석이 아직은 나와 있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 동안에 시도되었던 분석결과에 대하여 노치준 목사가 복음과 상황 98년 6월호에 잘 정리하였습니다. 참고로 인용합니다:
먼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1979년의 한국 교회 재정지출의 항목별 비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즉 교역자 생활비 38.45%, 교육비 16.76%, 선교비 15.50%, 상회비 5.25%, 교회관리비 24.04%이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 교회 100년 종합조사연구 (동연구원, 1982)>
다음으로 필자가 1982년과 1992년 2회에 걸쳐 조사한 재정지출 항목별 비율은 다음과 같다 (앞은 1982년 자료이고 괄호 안은 1992년 자료이다). 교역자 급여 32.2%(27.28%), 예배비 5.3%(4.02%), 교육비 7.9%(7.41%), 선교비 4.8%(5.34%), 상회비 2.2%(2.75%), 관리비 16.2%(12.70%), 운영비 10.4%(13.33%), 건축비 10.3%(13.16%), 사회봉사비 2.3%(3.88%)였다. (노치준, “한국 교회 재정구조의 사회학적 연구” 기독교사상 1983년 10, 11월호, 1984년 1월호 / 노치준, “한국 교회 재정구조 연구” 기독교사상 1994년 9,10,11월호)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원에서 1989년 한국 교회 재정지출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비율이 나온다. 교역자생활비 20.65%, 예배 및 설교 10.20%, 교육 및 문화 11.28%, 선교비 15.06%, 건축 및 시설 16.61%, 교회 유지비 17.13%였다.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원, 한국 교회 자원봉사사업 조사연구(성광문화사, 1990)>
1994년도 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교회들의 재정지출 항목별 비율을 1995년도 총회보고서에 근거하여 필자가 계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사례비 23.08%, 예배비 4.80%, 교육비 7.61%, 선교비 8.70%, 상회비 2.67%, 건축비 4.53%, 운영관리비 14.06%, 토지 2.15%, 비품 0.48%, 차량 0.65%로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제80회 총회보고서(동총회, 1995)>
가장 최근의 연구는 기독경영연구원에서 1997년에 조사한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재정지출 비율은 인건비 35.3%, 재산관리비 15.7%, 선교비 15.2%, 교육비 8.7%, 일반관리비 8.2%, 봉사비 6.5%, 예배비 5.0%, 기타 5.4%이다. <국민일보 1998년 4월17일>
노치준 목사는 위의 통계들을 종합하면서 선교비는 실질적으로 10%이하이고 교회내부의 나눔이 아닌 교회 밖의 세계와 나눔을 가능케 하는 사회봉사비(혹은 구제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5%에도 못 미치는 저조한 상태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지출은 인건비와 교회운영을 위한 관리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경영연구원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예배, 교육, 선교 및 봉사 등 고유목적비용과 이를 지원하는 지원비용과의 비율이 1:3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관행들을 뿌리 뽑고 건강한 교회재정운영 원칙을 확립해야 합니다.
2. 건강한 교회재정운영 원칙
1) 건강한 교회회계제도의 확립
우선 교회의 민주적 정관에 건강한 교회회계제도를 삽입해야 합니다. 개혁연대가 제시하는 모범정관에선 예산의 부문별 균형을 강조하고 지출은 예산의 범위 내에서 공동의회 의장의 동의를 얻어 재정부장이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단 예산 항목 변경 및 교회 총예산 기준 20% 미만의 초과지출은 공동의회 의장의 동의를 얻어 재정부장이 시행하며 20%이상의 증액이 요청될 때에는 재정부가 이를 편성하고 사역자회의와 임시공동의회의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재정이 담임목사와 몇몇 측근들의 담합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또한 재정운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매월 재정부는 사역자회의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교회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했습니다. 내부감사와 외부감사를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교회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으로서 재산에 관한 결정권은 공동의회에 있으며 등기는 원칙적으로 교회명의로 해야 하나 행정상의 편의 혹은 법적 요건에 따라 공동의회 의장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 목회자 사례비에 관한 원칙 정립
둘째, 목회자 사례비에 대한 원칙을 잘 세워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황호찬 교수는 합리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우선 흩어 놓았던 항목을 한 군데로 모아서 투명하고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지급되는 모든 항목이 장부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사회통념상 인정되는 생활비 산정이 필요합니다. 직책, 지역, 교회규모, 가족의 특수상황 등이 합리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사례비 이외의 부수입에 대한 지침이 필요합니다. 목회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교회경비로 처리하고 생활비는 목회자 인건비 형식으로 지급되어야 합니다. 목회활동비에 해당하는 것으론 도서비, 차량유지비, 통신비, 접대비, 교육비, 퇴직금 등을 들 수 있고, 생활비로는 주택비, 식품비, 의료 및 보험료, 자녀 교육비, 문화비, 의류비, 통신비, 차량유지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엔 직책에 관련된 활동비나 근무년수에 따른 호봉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외의 차이는 최대한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투명성에 대한 의식개혁
투명성에 대한 의식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목적만 좋으면 방법은 좀 틀려도 좋다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투명하지 않은 곳에 어둠의 세력이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이 들어오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행 5:1-6). 그들은 어쨌든 헌금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재정에 도움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유를 판 돈 일부를 전부인양 속임으로 말미암아 결국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거짓이 교회 안에 틈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국교회는 불투명한 재정운영 속에서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거짓의 위험성을 아직도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깊이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헌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허영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원하는 마음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4) 사회봉사비의 신학적 중요성 확립
마지막으로 교회재정지출의 건강성 특히 사회봉사를 위한 지출의 신학적 중요성을 절감해야 합니다. 사회봉사를 위한 교회재정지출이 단순히 좋은 일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회봉사를 위한 건강한 재정지출이 바로 교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교회와 사회의 약자를 위해 아낌없이 재정을 지출하는 구체적인 삶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사정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십니다(사 1:1-17).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식에서 소나 나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방인으로 취급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교리나 종교적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제사와 각종 성회 그리고 기도에 관한 교리들을 철저히 수호하였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제사, 성회와 기도 자체를 싫어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종교적 위선과 거짓이었습니다. 즉 겉으로는 정통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리와 형식에 있어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데 정말 중요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공의를 저버렸습니다. 구약에서 공의의 핵심적 내용은 약한 자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즉 힘이 없어 억압받는 자, 부모가 없어 돌볼 자가 없는 고아들과 남편이 없어 지켜 줄자가 없는 과부들을 잘 돌보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차원과 직접적인 물질적 도움의 차원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중대한 사명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축복을 얻은 것은 억압적인 애굽과는 상반된 공의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깊은 뜻은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시사된 바가 있었습니다(창 18:17-19).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결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는 민족적 비극을 겪게되고 맙니다.
예레미야 역시 그 멸망을 예견하면서 그 이유가 공의를 저버리고 사회적 약자를 정치적으로 물질적으로 돌아보지 않은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렘 22:3).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와 본질상 같다는 것입니다(렘 22:16). 아무리 입술과 형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신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최종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정치․경제적으로 보살피는데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렘 22:16). 이와 같이 성경은 정통교리(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is)이 한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분리되는 순간 양면이 분리된 동전처럼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쓸모 없는 존재가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실천의 내용은 바로 가난하고 의지할 때 없는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들을 끌어안아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마 19:16-22). 예수님께서는 그가 익히 아는 십계명 중 사람에 대한 의무들인 5-9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명령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계명들에 대한 그의 피상적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핵심을 찌르시면서 영생을 누리려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만 예수님의 요청을 감당할 수 없어 근심 빛을 띤 체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부자 청년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행위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그 진정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면 이러한 삶이 동반되어야만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명령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기계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그들을 위해 물질을 기꺼이 나누어 줄 헌신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은 신앙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다양한 객관적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해도 결국 쓰레기처럼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양과 염소 비유가 이 점을 너무나 극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마 25:31-46). 사회적 약자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삶의 여부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진정성과 정통성이 결정되며 영생과 영벌이 갈라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해방신학자들이나 민중신학자들의 해석처럼 행위구원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암시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교훈의 전체적 그림 속에서 이 본문을 볼 때 그 점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을 맺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없다면 어떠한 신앙적 고백이나 종교적 행위도 백해무익함을 가르치셨습니다(마 7:21-23). 이렇게 신앙과 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교훈에 있어서 예수님은 구약의 가르침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도 같은 교훈을 배웁니다. 오순절 성령경험과 베드로의 능력 있는 복음 설교를 통해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됨으로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행 2:1-47). 그 공동체 안에는 국외에서 거주하던 유대인, 유대교에 귀의한 이방인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통성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의 물질생활입니다. 그들은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아낌없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동체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자신의 재물에 대해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행 4:32).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주목하면서 해방신학자 미란다(José P. Miranda)는 ‘누가에 의하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이다’라고 까지 선언하였습니다. 즉 기독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에 속하지만 일단 기독교를 선택한 이상에는 자신의 배타적 소유권을 포기함으로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미란다는 사유재산권의 자발적 포기를 마르크스의 제도적 공산주의와 등치하고 그 포기를 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절대적인 기독교인의 보편적 사명으로 주장함으로서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해석학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정통성이 있는 교회라고 하면서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거나 가난을 해소하기 위한 나눔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진정한 성령충만과 정통복음주의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설교, 방언, 뜨거운 예배, 착실한 성경공부, 열정적인 기도, 가득 찬 다양한 교회 모임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재정지출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구색 맞추는 수준에 머물거나 입술로만 떠든다면 그러한 교회의 신앙적 정통성은 의심되어 마땅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두 렙돈의 연보를 칭찬한 것에 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재정지출의 절대적인 액수가 아니라 전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입니다. 예컨대 대형교회의 사회봉사비가 절대액수에서 그럴듯하다해도 그 비중이 여전히 5%를 밑돈다면 교회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다른 작은 교회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근거가 전혀 돼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정통성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물질적 헌신도의 진정성에 의해서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여된 모든 종교행위는 아무리 그럴듯하고 열정적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 역시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정성껏 돕던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은 바울을 통해서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깊이 인정하고 동역자로서의 연대를 굳건히 하면서 한 가지를 부탁하였습니다(갈 2:9-10).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들을 돌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탁을 받으면서 자신도 원래부터 그 일을 힘써 행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예루살렘을 방문한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방교회에서 마련한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행 24:17; 롬 15:25-27).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구제헌금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 진 예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고후 8:9). 아울러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일이 바로 하나님 정의의 핵심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고후 9:9; 시 112:9).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신앙의 주변적인 표현이 아니라 핵심적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은행 빚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대내적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서도 물질을 풍성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선순위의 왜곡은 교회의 정통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적적인 부흥을 경험했다는 자만감에 젖어서 뼈아픈 자성의 길을 외면한다면 타이타닉호의 비참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새롭게 하심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로 새롭게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