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인권 주일, 제14회 사회 교리 주간 담화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1코린 12,19)
지난 6월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로 3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목숨을 잃은 23명 가운데 18명은 이주 노동자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일하며 꿈을 키웠지만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수사 당국은 사고의 원인을, 지연된 납품 일정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생산 강행, 무자격 인력 공급 업체의 비숙련 노동자 투입, 급증한 불량률에 대한 무대책, 발열 전지의 선별 작업 중단 등으로 지적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회사가 화재 위험성이 높은 리튬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고 예방을 위한 비상구 설치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또 파견된 노동자를 투입하고서도 안전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번 참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힘들고 위험한 일을 파견, 또는 하청 업체 노동자에게 맡기는 그릇된 관행,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라는 비인간적 기업 경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실제로 회사가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인간의 존엄성과 안전을 무시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할 때, 위험한 일은 점차 더 힘없고, 더 가난한 노동자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태안 화력 발전소의 김용균 노동자와 거제 조선소의 크레인 참사 노동자들, 그 밖에 수많은 산재 사망자도 위험 외주화의 희생자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이 이제는, 화성 아리셀 참사에서처럼 내국인 노동자보다 더 싸고, 책임 회피가 더 쉬운 ‘이주 노동자’를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어, ‘위험의 이주화’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렇듯 위험한 일이 ‘더욱더 약한 노동자’에게 내려가는 이유는 이윤의 극대화를 최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의 탐욕 문화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 안에서는 인간의 존엄은 부정되고 가치 기준은 “효율성, 가능성, 유용성”(「생명의 복음」, 23항)으로 대체됩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배척되고 소외되며, 특히 힘없는 노동자는 “그냥 버리는 소모품”(「복음의 기쁨」, 53항)이 되어 버립니다. “일터의 안전을 비용”(프란치스코, 이탈리아 건설 협회 대표단에게 한 연설, 2022.1.20.)으로만 접근하고,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도 생산량과 이윤을 위하여 그 ‘죽음의 맷돌’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죽음과 유가족의 슬픔을 돈 몇 푼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거래로 생각하며, 이 또한 영업 손실로 결산합니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는 사용하다가 버려도 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필요해서 ‘초대한 손님’이자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와 동등한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법과 제도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41항; 『간추린 사회 교리』, 298항 참조). 그들은 단순 노동력이 아니라 ‘인격체’이며, 우리 이웃이자 형제자매입니다(『두캣[DOCAT]』, 152항 참조). 그들은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1코린, 12,21) 하며 차별하고 배제할 수 없는, 결코 그렇게 하여서도 안 되는 ‘우리와 하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우리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다른 모든 지체가 함께 아픈 것처럼,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1코린 12,23-26 참조). “외국인, 내국인 따지지 말고 다 같은 인간입니다. 차별 없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봐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유가족의 절규는 우리의 절규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지체가 건강할 때 몸은 건강합니다. 우리 사회의 한 지체인 이주 노동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도 건강하지도 않다는 증거입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가장 약한 지체인 이주 노동자를 더욱 특별히 그리고 소중하게 안아 줄 때 우리 사회도, 우리 자신도 건강해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제43회 인권 주일입니다. 세상과 이주 노동자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교회와 우리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입니다(사목 헌장, 1항 참조). 이번 인권 주일과 사회 교리 주간에는 특별히 ‘서로 다른 지체이지만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그러나 외면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을 기억합시다. 우리 또한 이러한 사회적 참사와 구조적 불의에 무관심한 나머지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복음의 기쁨」, 54항)하였던 우리 자신을 반성합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향한 우리의 편견과 혐오 그리고 차별과 우월감을 던져 버리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진정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환대, 보호, 증진과 통합의 시간’(「모든 형제들」, 129항 참조)을 가집시다. 다시 한번 아리셀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며,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고향을 떠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든 이주 노동자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2024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 선 태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