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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소홀로 공든 탑 무너지다
그의 공격은 비단 빠를 뿐만 아니라 주칠칠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주칠칠이 그의 손을 봤을 때 그녀의 몸은 벌써 쓰러졌다.
왕련화는 가볍게 그녀의 몸을 받치고는 웅묘아를 돌아보며 웃었다.
웅 형, 소제는 결코 그녀를 다칠 뜻은 없소. 다만 그녀가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이오. 지금은 그녀도 우리와
함께 떠나는 것이 최상책이오."
음!
그렇다면 우리 어서 갑시다.
주칠칠은 완전히 혼절하여 반항할 기운조차 없었다.
왕련화는 그녀의 몸을 안고 말했다.
우리는 이 작은 산 옆으로 돌아갑시다. 우선 수고스럽지만 웅 형께서 길
좀 정찰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그녀를 안고 네가 길을 정찰한다.
왕련화의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순식간에 웃음으로 바뀌었다.
소제가 길을 정찰하는 것도 좋겠군요.
웅묘아가 다가서며 손을 내밀어 주칠칠을 받으려 하였다. 왕련화는 어쩔
수 없이 주칠칠을 건네주려다 갑자기 양손이 마비됐다.
웅묘아의 강철같은 양손이 그의 완맥을 꽉 잡고 있었던 것이다.
왕련화는 크게 놀랐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웅...... 웅 형, 당신 이게 무슨 짓이오?
웅묘아의 고양이 같은 두 눈이 마치 쥐를 쳐다보듯 그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도, 말도 않고, 다만 두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왕련화는 온 몸이 마비되면서 저절로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당...... 당신은 나와 함께 가기로 했잖소?
네가 나 웅묘아를 너와 같은 인의도 모르는 사람으로 봤다면 넌 미친
거야.
왕련화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웅 형, 그것은 당신이 원하던 바였소. 소제는 절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이랬다저랬다하며 오히려 소제를 기습하는 것이오?
웅묘아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은 너에게 배운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
그만큼 남을 속여먹었으니 이제는 남에게 당할 때도 됐지.
왕련화가 길게 탄식을 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웅묘아가 나 왕련화를 골탕 먹이다니 정말로 생각도 못했던 일이야.
네가 생각해냈다면 내가 너를 속일 수 있었겠나?
좋소. 내가졌소.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웅묘아가 천천히 물었다.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왕련화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난...... 난.......
웅묘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너를 즉시 죽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너를 죽였다가는 쾌락왕이
우리의 내분을 비웃을까봐 참겠다.
그가 동시에 갑자기 한 발을 쳐나가자 왕련화가 몇 척(尺) 밖으로 굴러
나가 떨어졌다.
그런 후, 그는 왕련화를 노려보면서 한 마디씩 똑똑히 내뱉었다.
지금 너에게 알려줄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남을
속이기 싫어서 안 그러는 것이지 결코 속일 줄 몰라서가 아니다.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남을 속일 수 있다.
왕련화가 처참하게 웃었다.
그 점은 지금 아주 잘 알고 있소이다.
둘째, 심랑이 언제 돌아오게 되든 우리는 기다릴 것이다. 심랑의 탈출
승산이 일할(一割)만 있어도 당연히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 웅묘아가 기꺼이 기다리기를 원하고 심지어 기꺼이 함께
죽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심랑뿐이다. 알겠느냐?
알았소. 다만.......
다만 무엇이냐?
심랑에게 아마도 일 할의 반도 기회가 없을 것이오.
쾌락왕은 이제 ‘셋'을 세고 있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쾌락왕은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좋다, 심랑아! 아주 참을성이 많구나. 네가 비록 재주가 많지만 불마저도
너를 태워죽이지 못한다면 본왕은 정말로 너를 다시 평가하겠다.
그는 팔을 휘두르며 매섭게 외쳤다.
불을 질러라!
외치는 소리와 함께 횃불은 집 안으로 던져졌다. 목재로 된 집은 아주
쉽게 불에 탔다.
쾌락왕이 외쳤다.
사람들을 다섯 겹으로 나누어라! 첫 겹은 단도수(短刀手), 두번째 겹은
궁수, 세 번째 겹은 급풍대(急風隊), 네번째는 창수(槍手), 다섯번째 다시
궁수로 겹겹이 에워싸라. 그러고도 심랑을 놓친다면 모두들 자신의 머리를
들고 나를 보러와라!
그의 말이 끝나자 이미 수백 명의 대한들이 모든 분배가 끝나 겹겹이 서
있었다. 그의 배치에 따라 이 집은 더이상 바람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막혔다. 설사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렸어도 이곳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아무도, 심지어 한 마리의 새조차도 이 집에서 탈출할 수는
없다. 이제 더이상 살아있는 생물체가 이 집 밖으로 탈출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웅묘아는 주칠칠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주칠칠은 깨어나자마자 주먹으로
웅묘아의 가슴을 때리며 욕을 했다.
이 짐승! 짐승들아! 난 죽으면 죽었지 너희들 짐승들과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
웅묘아는 그녀가 주먹으로 세 번 치게 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말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뒤를 돌아 봐!
주칠칠은 몸부림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난 안 볼 테야! 죽어도 안 볼 테야!
말로는 안 본다고 했지만 그녀의 고개는 이미 뒤를 보고 있었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왕련화를 보자 그녀의 손발이 곧 멈추어졌다. 그녀는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이것은...... 대체 어떻게.......
웅묘아가 웃었다.
웅묘아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다.
주칠칠은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곧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사과했다.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 당신은 저를 탓하지 않겠죠?
웅묘아는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탓하겠니?
주칠칠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웅묘아를 보면서 애처롭게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왜 이렇게 언제나 당신께 잘못을 할까요?
웅묘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한 채로 큰웃음을 보냈다.
너 같은 사랑스런 여동생이 있으니 오빠된 도리로 약간 손해보는 것은
당연하지.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여동생은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아요. 사랑스러운 사람은 오빠예요.
웅묘아가 호탕하게 웃었다.
다른 여자들도 너와 생각이 똑 같았으면 좋겠구나.
그의 웃음은 너무도 호탕했고 너무도 탈속했다.
주칠칠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바보들일 거예요. 세상
남자들 중 누가 오빠처럼 가슴이 그렇게 넓을 수 있겠어요!
내 가슴이 넓다고? 그건 단지 건망증이 심할 따름이지. 과거에 대한
일들을 난 남들보다는 빨리 잊어버리거든.
주칠칠은 한없이 그를 앙모하며 바라보았다.
그래요. 당신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추억은 확실히 남들보다 빨리
잊더군요. 하지만 남들이 당신에게 베푼 은혜는 한평생을 잊지 앉죠.
그녀는 길게 탄식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한 계집아이가 당신 같은 오빠를 둘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해야 할
거예요.
이때 갑자기 왕련화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이런 오빠가 있는 마당에 뭣하러 그런 애인을 기다립니까?
주칠칠은 ‘획'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당신...... 당신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왕련화가 웃으며 물었다.
내 말이 틀렸단 말이오?
주칠칠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을 용서해 주겠어요. 당신의 마음은 너무 때가 묻었어요. 인간
세상에는 아직도 순결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은 한평생 단지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뿐 다시는 아름다운
일을 볼 수 없을 거예요.
왕련화가 조용히 말했다.
밝은 불빛 속에서 죽느니 차라리 어둠 속에서 살겠소.
당신, 당신은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왕련화는 땅바닥에 누운 채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불빛, 너무도 밝은 빛이야. 난 일 년 내내 어둠 속에서 숨어사는 박쥐가
될지언정 불에 타죽는 불나방은 되기 싫소.
주칠칠과 웅묘아의 눈길은 어느새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커다란 불빛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무섭게 타오르는
화염은 어둠 속의 창공을 피빛으로 붉게 물들였다.
주칠칠은 웅묘아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녀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불은 혹시...... 심랑을.......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입으로는 비록 그럴 리 없다고 했지만 그의 안색은 변해 있었다.
왕련화는 불빛 아래 서로 기대어 서있는 이들 두 남녀의 그림자를 보자
입꼬리에 한 가닥의 악독한 미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아깝구나. 심랑이 죽는다 해도 여전히 내 차례가 오기는 힘들겠어.
불은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여전히 뛰쳐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맹렬한 불꽃 속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는다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쾌락왕은 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갑자기 길게 탄식을 흘려다.
급풍일호가 웃으면서 물었다.
큰 화근이 제거됐으니 대왕께서는 응당히 기뻐하셔야 할 텐데 어째서
탄식을 하시는 지요?
쾌락왕은 손으로 수염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이 사람이 살아서는 본왕의 큰 화근이었기에
생각 날 때마다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었다. 이제 그가 죽는 것을 보니
오히려 아까운 생각이 드는구나.
급풍일호가 고개 숙이며 수긍했다.
그렇군요!
현 무림에서는 이제 그와 같은 적수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오늘
죽으니 본왕은 또다시 외롭게 느껴질 뿐이구나.
과연 영웅의 심리를 제자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쾌락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심정을 너는 이해 못할 거다. 가장 유감인 것은 여태까지 그와
본왕이 정식으로 무공을 겨뤄보지 못한 점이야. 다시는 본왕과 삼백
초식을 겨룰 수 있는 적수를 만나지 못 할 것이다. 본왕은 헛되이 절세의
무공만 지녔을 뿐, 적수를 만날 수 없으니 어찌하리, 어찌하리!
급풍일호도 길게 탄식을 하였다.
달나라의 궁전은 높은 곳일수록 더욱 외롭다'라는 시구가 있듯이 사람이
정상에 오르면 쓸쓸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대왕께서는
천하의 모든 영웅들을 발 아래에 두신 것을 위안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쾌락왕이 '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좋았어. 뜻밖에 네게도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본왕이 너를 너무
얕봤었구나.
심랑이 빠져 나오지 못했으니 분명히 다 타고 뼈만 남았을 것입니다.
네 뜻은.......
제자의 소견으로는 지금 불기운을 막는 것이 가장 좋은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 때문에 불기운이 확산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구나. 이 좋은 쾌활림을 전부 다 불태운다는 것도 아까운 일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굵은 목소리로 명했다.
불을 전부 소멸한 다음 심랑의 뼈마디를 찾거든 백작의 예로서 장례를
치뤄주도록 해라. 그가 살아있을 때 영웅이었으니 죽어서도 그에게
무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웅묘아는 불기운이 점점 거세지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도 이미 뜨거운
바람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으니
그가 어찌 초조해 하지 않겠는가! 주칠칠은 더욱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웅묘아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말해봐요, 이 불은 혹시 심랑이 지른 것이 아닐까요?"
왕련화가 냉소를 날렸다.
이 불기운이 갑자기 일어났고 또 순식간에 이렇게 거세진 걸로 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불을 지른 듯하오. 심랑 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큰
불기운을 만들 수 있겠소?
그럼...... 그럼.......
왕련화가 조용히 말했다.
이 불은 아마도 심랑이 포위되면서 쾌락왕이.......
웅묘아가 호통쳤다.
닥쳐라! 칠칠, 절대로 그의 헛소리를 믿지 마라.
왕련화가 빈정댔다.
당신은 입으로는 그녀더러 내 말을 믿지 말라고 하지만 당신 속으로는 내
말에 승복하고 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주칠칠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너...... 너.......
왕련화는 조용히 웃었다.
심랑이 죽으면 당신 둘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소? 뭣하러 그런 초조한
연기를 하는 거요? 설마 내게 보여주려는 것이오?
단숨에 그에게 다가선 주칠칠은 목메인 소리로 외쳤다.
다시 말해 봐라!
그녀는 발로 그를 찼는데 뜻밖에 땅바닥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던 왕련화가
갑자기 튕기듯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번개같은 수법으로 순식간에
주칠칠의 허리에 있는 혈도 세 곳을 제압했다.
웅묘아가 호통쳤다.
그녀를 놓아줘라!
그가 막 악으로 나서려고 하자 왕련화는 주칠칠의 급소를 누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다시 또 한 걸음 나선다면 주칠칠의 시신을 받게 될 것이오.
묘아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왕련화가 크게 웃었다.
이제 너도 두 가지 일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 나 왕련화는 그렇게
쉽게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속임수로 말하자면 너 웅묘아는 나를
따르려면 아직도 멀었다.
웅묘아가 한탄했다.
아까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네가 바보이기 때문이지.
웅묘아가 하늘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
왕련화가 냉소를 치며 말했다.
이 사랑스런 여동생이 살아있기를 바란다면 어서 얌전히 길을 정찰하고
오시지. 그리고 명심할 것은 네가 나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못 벗어나게
한다면 첫번째로 죽는 사람이 이 여자일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자네를 탈출시킬 수 없을 것이야. 길 안내는 내가 하지.
이 독특한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자 웅묘아와 왕련화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 하나는 너무 기쁜 표정으로, 다른 하나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똑
같이 외쳤다.
심랑!
심랑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비록 낭패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입가에 걸려있는 한 가닥의 미소는
여전히 멋있었다.
그는 웃음띤 얼굴로 왕련화를 봤다.
그녀를 놓아주겠소?
왕련화는 잠시 넋을 잃다가 즉시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이 돌아 왔으니 소제는 당연히 주 아가씨를 풀어드리죠.
그는 주칠칠의 혈도를 풀어주면서 계속 말했다.
심 형께서 우리들을 위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는데 이 분 웅
형은 주 아가씨와 뜨겁게 가까이하더군요. 저는 심 형에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주 아가씨를 제지한 것입니다.
심랑이 미소 지었다.
그대의 호의에 감사드리오.
주칠칠은 이미 심랑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당신...... 그의 말을 믿나요?
심랑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믿을 것 같소?
주칠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심랑의 품 속에 쓰러졌다.
웅묘아가 큰소리로 웃었다.
심랑이 그렇게 쉽게 남의 이간질에나 넘어갈 사람이라면 나 웅묘아가
그에게 목숨을 맡길 것 같은가?
주칠칠은 심랑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우리가 얼마나 초조했는지 아세요?
쾌활림의 도처에 순찰초소가 있어서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주칠칠이 귀엽게 웃었다.
저 좀 봐요. 제가 이렇게 이기적이에요. 당신이 얼마나 위험을
격었는지는 묻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를 초조하게 했다고 당신을 탓했으니,
당신 저를 나무라지는 않겠죠?
웅묘아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네가 자랐다는 뜻이야.
왕련화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끼어 들었다.
네,네,네. 여러분 모두 아주 크게 자랐으니 우리 어서 갑시다.
심랑이 말했다.
급할 건 없소. 이곳은 잠시 동안 절대로 위험이 없소.
왜요?
심랑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은 지금 나를 태워 죽이느라고 바빠서 절대로 이곳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을 태워 죽이느라고 바쁘다구요?
심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쾌락왕의 무공은 정말로 대단하더군. 그에게 쫓겨 하마터면 못 벗어날
뻔했소. 결국에는 할 수 없어서 깃대 위로 올랐갔었지. 그런데 쾌락왕이
일 장을 날려 깃대를 부러뜨릴 줄이야.
비록 지금 그가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웅묘아와 주칠칠은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손에 땀을 쥐고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주칠칠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했어요?
쾌락왕이 비록 절세의 효웅이라지만 그는 절대 생각도 못 했을 것이오.
내가 깃대 위에서 그를 약올린 것이 그가 깃대를 부러뜨리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이오.
칠칠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물었다.
왜죠?
그 깃대는 높이가 십 장(十丈)이 넘었소. 그 깃대가 쓰러지면 깃대
꼭대기는 자연히 십 장 밖까지 갈 테니 그 위에만 올라간다면 난 바로
십여 장 밖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오. 안 그러면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
단번에 십 장을 뛰어 넘을 수 있겠소?
웅묘아가 감탄을 했다.
자네 말을 들으면 그 이치는 간단해. 그러나 막상 내가 자네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난 때려죽여도 그런 방법을 생각도 못 할 거야.
주칠칠이 웃었다.
제가 말했죠. 이 세상에 갈 수 있는 길이 한 길만 남아 있다면 첫번째로
그 길을 갈 사람은 분명히 심랑일 거라구요.
웅묘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그 불은 어떻게 해서 난 건가?
단숨에 난 십 장 밖 한 가옥의 지붕에 떨어졌지. 깃대가 쓰러지면서
지붕을 깨뜨렸는데 나는 아예 그 지붕에 큰 구멍을 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웅묘아와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동시에
물었다.
그럼 그 구멍으로 들어 갔나요?
백 사람 중에서 아흔아홉 명은 내가 그 구멍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쾌락왕도 예외는 아니었어. 왜냐하면 사람이 위기를 느낄
때는 숨을 곳만 있으면 금방 들어가 숨으려고 하니까. 이것은 사람의
본능이야. 자고이래(自古以來)로 다 그랬지.
하지만 당신은 예외였겠죠.
주칠칠의 말에 심랑이 탄식을 흘렸다.
쾌락왕과 같은 사람과 머리싸움을 하기 위해서 나는 언제나 일반사람들과
상반된 생각을 해야 했소. 그래야 쾌락왕은 점점 어리둥절해져서 내
마음을 읽지 못하게 될 테니까.
웅묘아가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했나?"
난 지붕에 구멍을 뚫은 뒤 몸은 비록 들어갔지만 손은 여전히 지붕을
붙들고 있었지. 그리고 쾌락왕이 부하들에게 집을 포위하라고 호령하고
있을 때 난 즉시 빠져 나온 거야.
주칠칠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은 당신을 보지 못했나요?
그 찰나의 순간이 바로 그들에게 가장 혼란한 때였소. 그리고 쾌락왕도
이미 그 쪽으로 돌아갔을 테니 지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
그는 웃음 짓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기회는 찰나이니 금새 사라지지. 그들은 자기들이 쳐들어 왔을 때
감히 몰래 나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을 테지.
주칠칠은 생긋이 웃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약점이죠.
웅묘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나였다면 나는 비록 무슨 일이든 할 담력은 있지만 그 순간만은
절대 나오지 않았을 거야. 그 순간은 집 안이 바깥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주칠칠이 물었다.
그 다음에는요?
나는 몰래 빠져나온 뒤, 곧 한 그루의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가 즉시
내려와서는 몸을 나무로 가리며 숨었소. 그리고 사람들이 공격하러 몰려올
때, 나는 그 틈을 이용해서 역시 사람들 틈에 끼어 들어갔지. 이때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도 날 보지 못했소.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왜 다른 곳에 숨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틈
속으로 갔죠? 너무 위험하잖아요?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쾌락왕의 눈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오.
난 오로지 그의 눈만 피할 생각을 했지 다른 사람은 크게 상관이 없었소.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기에 쾌락왕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요. 더구나 그 사람들은 모두 악으로 돌진하고 있어서 나는 전혀 힘도
들이지 않고 따라 가기만 하면 됐었지. 그리고는 재빨리 그들 틈에서 벗어
난 것이오. 나는 전혀 힘도 들이지 않았고 나중에 사들 뒤로 쳐지게 되자
더더욱 나를 주의하는 사람은 없었소.
주칠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듣기에는 재미있군요.
웅묘아도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재미있는 일은 난 생각하기도 싫어.
주칠칠은 다시 웃음 짖더니 말했다.
이런 재미있는 일은 이 세상에서 심랑말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을
거예요.
심랑이 미소 지었다.
당시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요행이었던 것 같군. 당시의 매 순간마다 나는 무수히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었소. 만약 그 중에 한 번이라도 잘못 결정을 내렸거나 몇 초 늦었다면
지금 난 여기에 서서 말하지도 못했을 거요.
주칠칠이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당신이 말 안 했으면 몰랐는데 듣고보니 식은 땀이 막 나오네요. 심랑,
제발 부탁이에요. 다음부터는 제발 그렇게 모험하지 말아 주세요. 네?
이때, 왕련화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소제도 당신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만약 조금이라도 지혜가 떨어지거나 동작이 느렸다면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오.
심랑이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여겼군, 그런가?
왕련화는 감히 대답을 못했다. 그는 곧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쾌락왕의 부하들은 모두 저 불에 주의가 집중이 되어 있을 텐데 이
틈에 탈출하는 것이 어떻소?
비록 지금도 기회가 있지만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
왜지요?
지금 비록 심랑이 불에 타죽었다지만 아직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소. 아마
곧 소문이 퍼질 것이오. 밖에 있는 초소도 이 소식을 듣는다면 분명히
방비가 소홀해질 테니 우리는 그때 빠져나가는 것이 더욱 쉬울 것이오.
왕련화가 감탄을 했다.
심 형의 지혜를 과연 소제는 따라 갈 수가 없군요.
주칠칠이 냉소를 쳤다.
흥, 지금 무슨 아부를 하는 거죠? 나 같으면 당신을 이곳에 남겨 놓을
거예요.
왕련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소제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신음소리는 마치 저 작은
화신사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심랑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화신사를 지날 때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봤소?
웅묘아는 멍해졌다.
그...... 그것은 우리가 주의하지를 않았네.
심랑은 잠시 생각을 했다.
왕 형, 수고스럽지만 한 번 갔다와 주시겠소?
왕련화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 현명한 배치군요.
그는 비록 내심 백만 번 싫었어도 어쩔 수 없이 달려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신법은 매우 사뿐했고 절묘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갈채를
보내게 했다.
그는 먼저 화신사의 주위를 번개같이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두 알의
돌을 주워서 창문으로 던지는 동시에 곧장 문으로 쳐들어갔다.
심랑이 미소 지었다.
저 자는 확실히 인재야.
웅묘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의 재능을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조금 전에 죽였을 것이네.
주칠칠도 거들었다.
그는 비록 악인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갈게 하지만 결코 혐오감은
주지 않아요. 김불환 같은 부류들과 비교한다면 그가 훨씬 고명하죠.
세상에 저 자와 같은 악인도 더는 없을 거요. 김불환을 왕련화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 김불환은 단지 소인이고 그는 악인 중의
군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심랑의 말에 주칠칠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요. 그는 악인이라도 결코 악질적이지는 않았어요. 어느 때는 사람
같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더구나 흐름을 잘 타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과
죽자살자 늘어지지는 않죠. 바로 심랑이 오자마자 저를 풀어준 것처럼
말이에요. 만약 김불환이었다면 계속 물고 늘어졌을 거예.
웅묘아가 웃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총명한 점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때 왕련화가 쏜살같이 달려왔는데 얼굴 표정이 매우 괴이했다. 눈빛은
주칠칠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심랑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소?
심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막 말문을 열려고 할때 주칠칠이 큰소리로
물었다.
대체 누구죠? 어서 말해봐요!
왕련화는 신비스럽게 웃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그녀를 보지 못했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이미 탁자
밑에 누구가에 의해 숨겨져 있었소. 그리고 매우 크게 내상을 입은 듯
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랑이 단숨에 달려들어갔다.
주칠칠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 그녀, 그녀가 대체 누구죠?
왕련화가 또박또박 내뱉었다.
유령궁주 백비비요.
초저녁의 화신사는 더욱 음산하게 느껴졌다. 화신(花神)이란 이름은
아름다운 신의 대명사 같았지만 역시 다른 모든 절간과 마찬가지로
음산했다. 아름다운 화신이든 추악한 악마이든 다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심랑은 문 밖에서 들어온 한 가닥의 미약한 광선을 빌어 백비비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백비비 같지 않았다.
지금 탁자 아래에 있는 그녀는 이미 과거의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백비비가 아니었다. 또 그토록 간악, 음흉, 악독하여 사람을 전율케 하는
유령궁주도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단지 가련하고 평범한 소녀였고 오로지 남들이 그녀를 구해
주기를 바라는 소녀였다. 그녀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그녀도 심랑을 봤다.
그녀는 금새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심랑, 당신은 왜 아직 죽지 않았죠? 당신은 왜 또 왔죠? 당신은 왜 지금
여기에 있어야죠?
심랑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이 비록 내게 그렇게 대했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온 것을 당신은 기뻐해야 할 것이오.
백비비가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살려주는 것은 원치 않아요. 난 죽으면 죽었지 당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저는 사랑스럽지 않을
뿐더러 제가 가증스럽고 무섭다고 생각할.......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면서 통곡했다.
저는 당신이 저를 불쌍히 여기는 것도 원치 않아요. 당신 당신 어서
나가세요. 나가세요. 어서 빨리 나가세요.
심랑은 여전히 조용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됐소?
백비비가 처량하게 말했다.
당신은 분명히 알면서 왜 저에게 묻는 거죠?
난 모르오.
백비비는 손으로 땅을 치면서 목이 메었다.
당신은 제가 쾌락왕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가 저를 다치게
했고 또 저를 이곳에 버렸어요. 저는 그의 용의를 알고 있죠. 그는 바로
저를 당신에게 보여 주려는 목적이었어요. 당신 이제 만족하시나요?
심랑은 침울하게 탄식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만족했냐고?
손 하나가 살며시 그의 팔을 안았다.
그것은 당연히 주칠칠의 손이었다.
백비비가 말했다.
가세요. 당신들은 어서 가세요. 내 악에서 그렇게 뜨거운 자세를 취하지
마세요. 주칠칠, 당신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서 나를
죽여봐요.
주칠칠은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조용히 탄식을 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을 미워한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길은 심랑에게로 옮겨졌다.
우리 그녀를 함께 데리고 가요.
심랑은 나무토막처럼 그 곳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웅묘아도 심랑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보고 죽어가는 여자를 홀로 이곳에 남겨
두라고 한다면 할 수 없을 것일세.
심랑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주칠칠이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신, 왜 말을 않는 거죠?
왕련화가 냉랭하게 말했다.
난 그가 왜 말하지 않는지 알고 있소.
뭣 때문이죠?
이것은 어쩌면 쾌락왕의 악독한 계책일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는 일부러
그녀를 이 곳에 남겨놓고는 우리들이 탈출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오.
우리에게 그녀가 있다면 우리는 탈출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주칠칠이 물었다.
심랑, 당신은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나요?
아니오.
그럼, 당신은.......
심랑이 탄식을 했다.
웅 형, 당신이 그녀를 안아 주겠나?
백비비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들은 정말로 저를 구해주려는 건가요?
웅묘아는 아무소리 않고 그녀를 안았다.
백비비가 말했다.
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들을 해하려 했는데 당신들은 오히려
저를 구해 주시려는 군요.
주칠칠은 눈을 깜박였으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말했다.
난 예전의 백비비만 기억하지 유령궁주인 백비비는 벌써 잊었어요.
심랑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말이 맞소. 유령궁주는 이미 죽었고 우리는 다만 백비비가
살아있기를 바랄 뿐이오.
백비비는 웅묘아의 어깨에 엎드려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왕련화가 탄식을 했다.
당신들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마음이 약하다는 것이오.
주칠칠이 응답했다.
우리의 마음이 약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여태까지 살아 있었을까요?
왕련화의 얼굴이 뜻밖에도 붉어지면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들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웅묘아가 물었다.
어떻게 가지?
심랑이 침중하게 말했다.
왕련화가 악장 서서 가고 나와 주칠칠은 맨 뒤에서 엄호를 하겠소.
우리는 중앙의 넓은 곳에서 밀고 나갑시다.
왕련화가 물었다.
넓은 곳? 어째서 산을 끼고......
산 근처에는 방비가 가장 삼엄할 것이고 중간의 넓은 곳은 오히려 소홀할
것이오. 더구나 이 불이 일어난 후에 그들은 아마도 불구경하러 산으로
올라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왕련화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당신이 옳군요.
웅묘아의 어깨에 엎드렸던 백비비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틀려요.
뭐가 틀리다는 것이오?
백비비가 처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이렇게 저를 대해 주시는데.......
왕련화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군요. 이곳은 그녀의 집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녀는 분명히 또다른
비밀 통로를 알고 있을 것이오.
백비비가 말했다.
제 상처가 비록 크지만 저의 풍시(風市),환도(環跳),양관(陽關), 세 곳의
혈도를 풀어준다면 저도 최소한 걸을 수 있을 것이에요. 그리고 여러분을
이 곳에서 벗어나도록 안내할 수 있어요.
웅묘아가 물었다.
이 길을 정말로.......
저는 비록 쾌락왕에게 패했지만 이 길만은 그도 아직은 모르고 있어요.
저 이외에 이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의 웃음이 비록 처량하게 보였지만 그녀의 기색에는 여전히 오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오만할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왕련화가 중얼거렸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의 동굴은 더욱 어두웠다.
백비비는 품 속에서 극히 정교하게 만든 불씨를 꺼냈다. 불빛이 비록
밝지는 않았지만 악길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산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불씨를 잡으면서
앞장서서 안내했다.
웅묘아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결코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여자가 아니었다.
이 길은 상당히 길고 구비구비 굴절이 많았다.
하지만 주칠칠 등에게는 요 이틀 동안 다닌 길 중에서 가장 짧고 평탄하고
편한 길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위험을 벗어났다.
주칠칠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하느님, 우리가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군요.
웅묘아도 같이 웃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 생각해 봐도 아까 그 곳이 별로 무섭다고 생각되지
않는군. 심지어 적과 싸운 적도 없었잖아.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한 걸음이
아니라 반 걸음이라도 잘못 걸었다라도 우리는 끝장 났을 거예요. 비록
우리는 남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 위험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들은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갔다.
약 반 시진이 지났을까, 막다른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석판(石版)이
길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석판에는 쇠로 된 사다리가 곧장 위로
통하고 있었다.
백비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위가 바로 출구에요. 제가 먼저 올라가 보겠어요.
주칠칠은 급히 그의 손을 잡아끌면서 생긋이 웃었다.
우리 이제 옛일은 잊어요, 네?
백비비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나만 미워하지 않으면 됐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내 좋은 동생인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지금 그녀의 마음은 기쁨이 가득하며 더이상 미운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백비비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난 정말로 당신에게 감사 드려요.
백비비가 침울하게 말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저는 다시는.......
고개를 들어 수줍은 듯이 웃고는 쇠 사다리 위로 올라갔다.
심랑은 주칠칠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 일을 겪고 난 뒤, 당신도 많이 변했군.
그것은 제가 이제서야 당신이 정말로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여전히 질투하고 있었을 거에요....... 당신
조심하세요. 내게 나쁘게 대한다면 나는 더 나쁘게 변할 테니까.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질투덩이인 줄은 벌써 알았지.
웅묘아가 손뼉치면서 웃었다.
술꾼의 여동생이 질투덩이였었군.
주칠칠은 백비비의 가냘픈 몸이 기어오르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심랑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와 우리의 술꾼이 어떨 것 같아요?
술꾼이 좀 벅찰 것 같군.
난 아무리 봐도 그녀만이 내 올케될 자격이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예요.
백비비가 위의 석판 하나를 열자 곧 빛이 들어왔다.
밖은 이미 날이 밝은 것 같았다.
왕련화는 심호흡을 했다.
정말로 향기롭구나. 밖은 분명히 꽃이 만발한 아주 좋은 곳일 거요.
백비비는 밖으로 기어 나갔다.
한참 후,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위에 사람이 있을까요? 그녀에게 무슨 일은 없겠죠?
심랑이 잠시 생각했다.
쾌락왕은 이 길을 모르고 있다니까 별로 문제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비비의 머리가 보였다.
어서 올라오세요.
왕련화가 웃었다.
이제 내가 앞장설 일은 생기지 않겠군.
주칠칠은 심랑을 밀쳤다.
당신이 먼저 올라가세요. 당신은 우리들을 위해서 그토록 고생했으니
첫번째로 나가는 사람은 당신이어야 해요.
심랑은 약간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 출구는 너무 작아서 딱 한 사람이 들어 갈만 했다.
그가 머리를 위로 내밀자 그의 전신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 땅굴 밖은 뜻밖에도 온통 꽃으로 가득했던 백비비의 그 방이었다.
어쩐지 왕련화가 꽃의 향기를 맡더라니...... 어쩐지 백비비가 유령궁주로
변장할 수 있더라니...... 어쩐지 쾌락왕이 유령궁주가 있는 곳을 추적해
내지 못하더라니.......
이제보니 백비비가 살던 곳에는 그 유령의 소굴과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잘 때 남들의 방해를 받기 싫어했던 것은 바로
그녀가 유령궁주의 신분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심랑은 드디어 이 비밀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늦었다.
쾌락왕도 그곳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활들이 화살을 장착한 채로 그의 머리를 겨냥했다.
쾌락왕은 의기양양하게 잔혹한 웃음을 띠고서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
심랑은 자신이 약간의 주저함이라도 보인다면 그의 머리가 곧 고슴도치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갔다.
그의 몸이 막 반이 노출되자 허리 뒤의 경문(京門),지실(志室), 두 혈도가
백비비의 섬섬옥수에 의해 찍혔다.
그 다음으로 주칠칠, 왕련화, 웅묘아.......
지금 백비비는 쾌락왕의 품 속에 비스듬히 안겨 아주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심랑, 주칠칠, 왕련화, 웅묘아, 네 사람은 일렬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들은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으며 그들의 심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유(自由)와 가장 근접해 있을 때 잡혔다.
그들은 또한 성공과 가장 근접해 있을 때 실패했다.
주칠칠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백비비는 그들을 보면서 달콤하게 웃었다.
생각 못했겠지? 만능(萬能)의 심랑도 드디어 실수를 했군.
심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쾌락왕도 우리를 찾아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 못했군. 당신은 우리들을 쾌락왕의 손에 넘기면서 남의 힘을 빌어
우리를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쾌락왕에게도 잘 보일 수 있었던 거야.
백비비가 은방울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당신은 이제서야 그것을 생각해 냈다니 너무 늦었어요.
쾌락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너희들은 이제서야 알았을 것이다. 본왕이 말한 좋은 조수(助手)란 바로
이 사람이지. 이 사람은 김무망, 열 사람을 합쳐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왕련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확실히 내 평생 처음보는 무서운 여자요. 이런 여자가 만약 또
있다면 세상 남자들은 아마 다 자살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백비비가 웃었다.
과찬의 말씀이군요.
웅묘아가 매섭게 말했다.
좋다. 네게 감탄을 금치 못할 따름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네가 어떻게
화신사에 있게 됐느냐는 점이다.
백비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심랑이 불에 타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어요.
심랑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했죠. 내가 심랑이라면 나는 어디로 갔을까? 결국 해답은 한
가지, 이 길 밖에 없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 곳에 왔고 또
당신들을 만나게 된 것이죠.
왕련화가 탄식을 했다.
심랑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봤지만 당신은 심랑의 마음을
꿰뚫어 봤군요. 결국 심랑은 당신보다 한 수 낮았던 거요.
주칠칠이 갑자기 냉소를 날렸다.
심랑은 그녀보다 못한 것이 아니에요. 다만 심랑의 마음이 그녀처럼
악하지 못했고, 그녀처럼 배은망덕하지 못했고 또 몰염치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왕련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죠. 심랑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마음이 너무 약한 것이라고
말이오.
쾌락왕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네와 본왕의 관점이 같군.
웅묘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네가 우리를 봤다면 왜 사람을 풀어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지?
백비비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봐요, 고양이씨. 당신은 그 점을 모르겠어요? 그때 내가 사람을 불러
공격했어도 반드시 당신들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오히려
당신들에게 탈출할 수 있는 틈을 줄지 모르는 일이었죠. 당신들의 머리는
별로 쓸모가 없었지만 당신들의 무공은 그런대로 괜찮았 때문이죠.
그래서 너는 중상을 입은 척 했던 것이냐?
그래요. 나도 상당히 고생을 하면서 당신들의 신임을 얻은 거예요. 난
비단 스스로 혈도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두 주먹을 날렸죠.
고것 참 상당히 아프던데요?
웅묘아가 외쳤다.
우리가 너의 거짓 중상에 속을 줄 어떻게 알았지?
백비비가 깔깔대며 웃었다.
당신들은 군자이기에 당연히 한 여자의 몸을 조사하지는 않을 테죠.
더구나 그때는 날이 어두웠고 또 내 얼굴은 워낙 창백했으니까.
주칠칠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가 반드시 너를 구해줄 거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백비비가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당신들은 비단 군자일 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기도 하죠. 바로 여기
웅묘아가 말한 것처럼 그는 절대로 죽어가는 여자를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심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가 입다물고 말하지 않은 것도 바로 당신에게 또다른 음모가
있을까봐서였소. 하지만 당신은 너무도 연기를 잘했소. 당신이 만약 계속
내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면 난 오히려 의심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날 보자마자 가라고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