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경주평야에 있던 사로국에서 시작하였다(기원전 57). 신라는 박, 석, 김 3성의 시조 설화에서 보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적 통합이 비교적 늦었다.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 때 부터였다. 이때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 종래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이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계속 이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왕을 부르던 칭호도 이사금에서 대군장이라는 뜻을 가진 마립간을 사용하였다.
신라는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 진흥왕에 이르면서 크게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나라의 면모가 날로 새로워진다 하여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정치 제도를 더욱 갖추어 나갔다. 전국적인 지방 제도인 주군 제도를 정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는데 이것은 신라가 선진 중국 문화와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 사회의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법흥왕 때에는 나라의 법령인 율령을 반포하고, 17관등과 모든 관리들이 입는 공복을 정하였다. 이것은 다양한 세력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으며 골품제를 정비하고 진골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때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 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또, 귀족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의 가야 땅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기반을 굳게 다지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어서,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이 무렵에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순수비이다. 진흥왕은 국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비축된 힘을 통해 신라는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신라는 삼국 통일로 영토와 인구가 많이 늘어났고.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힘을 합쳐 당 침략군을 몰아 내는 전쟁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도 생겨났다. 이렇게 달라진 사정에 따라 여러 면에서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통일 과정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가 곧 무열왕이다. 이후 왕위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거의 독점하였다. 무열왕과 그 뒤를 이은 문무왕은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왕의 권위를 크게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신문왕은 다른 진골 세력들의 반란을 누르고 전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신라는 이와 같이 무열왕의 직계 자손에 의해 왕권이 크게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문화도 융성해졌다.
통일 후 번영을 계속하던 신라는 3세기 후반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소수의 진골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과 귀족 사이에, 그리고 귀족들 서로 간에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귀족들이 농장을 늘리고 자신의 군대를 키워 서로 다투었지만, 국가는 이를 통제 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권력다툼은 혜공왕 때 시작되었다.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의 다툼이 시작되어 결국 혜공왕은 살해를 당해 이로써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이 끊어졌다. 이후 신라에서는 왕위다툼이 심해져서 150여 년 동안에 20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이 일어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지방에서도 반란이 이어졌다. 9세기 전반에는 웅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고,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모두가 중앙에서 벌어진 왕위다툼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신라 말의 사회 혼란은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중앙 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다. 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나라의 창고는 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에 왕이 지방에 관리를 보내어 독촉하였으나,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건의한 것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때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아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하였다. 농민들은 굶주린 끝에 고향을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 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9세기 말, 농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재정 부족을 이유로 관리를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자, 그 동안 억눌려 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조세를 거부하고 떼를 지어 각 지역의 관청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의 통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으로 변한 것이었다.
상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원종과 애노가 일어났고, 그 밖에 북원(원주)의 양길,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주(전주)의 견훤, 그리고 양길의 부하인 궁예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지방 호족들 중에는 농민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갖추고 차츰 힘을 모아 지역의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결국 후백제의 공격으로 쇠약해진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어 스스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었다(935).
불국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신라인들의 이상세계 건설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곳으로, 경주 남산으로의 여행은 시공을 초월해 신라 사람들의 산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
경주남산(동)은 남산의 깊은 솔숲 향기를 맡으면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의 전성기까지 신라 불교미술을 만날 수 있다. 먼저 남산에 남아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높이 9여미터 둘레 40여미터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인 기법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조각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8세기 말의 신라불상의 걸작이며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통일전, 통일신라의 아름다운 탑중의 하나인 경주남산리삼층석탑, 통일신라 전성기의 신라마애불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수십길 벼랑위 하늘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시는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등 통일신라 전성기의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불국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신라인들의 이상세계 건설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곳으로, 경주 남산으로의 여행은 시공을 초월해 신라 사람들의 산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
경주남산(서)는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는 신라석불의 보고이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 걸작인 경주배리석불입상,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크며 바위 속에서 현신하는 순간을 새긴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우뚝 선 경주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는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의 문화적 성숙기에 조성된 풍만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보이는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김시습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용장사지 등 실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초기까지 신라불상을 두루 만날 수 있다.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