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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님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존교하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인사와 축복의 말을 건네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서로 보면서 인사하실까요?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인 최초의 복음서입니다. 그래서인지 마가는 시작을 하면서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감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게 되죠.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시면 예수가 이 세상의 왕임을 선포하면서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 마가복음 1장 1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여러분 이 구절은요. 로마 황제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어느 비문에 쓰인 문구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 비문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어요. 신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은 그로 인해 도래하게 될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건 세상에 복된 소식이며 이 왕은 칭송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어떤 비문에 적어놓은 것이죠. 따라서 이 마가복음 1장 1절은 적어도 당시 로마 사람들이 볼 때에는 신성 모독의 메시지와 같았던 것이죠.
그런데 마가는요 이 로마인에게 신성 모독과 같은 이 표현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느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기록해 줍니다. 27절을 보실까요?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세.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빌립보 가이사랴 여기에 대해서 한번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요. 예수를 죽이려 하던 그때에 헤롯 대왕에게 하사했던 땅이 있습니다. 헤롯 대왕에게 이 지역을 네가 다스리라고 하면서 하사했던 땅이죠.
그런데 헤롯 대왕이 죽게 되자 이 영토를 넷으로 분할해서 세 자녀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영토를 다스리면서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사람, 그 왕을 섬기는 왕을 성경에서도 우리는 분봉 왕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여러분 지도를 한번 보여드릴게요. 지도를 보시면 붉은색이 있고 초록색이 있고 노란색이 보일 겁니다. 네 지역이죠. 그런데 세 자녀에게 나눠준 거예요. 붉은색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 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등장 인물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과 가족들이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고 사자가 현몽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켈로와 라고 두려워서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자 사자가 다시금 현몽해서 야 그러면 갈릴리 지방으로 가라. 그래서 나사렛에서 예수님께서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구약에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이죠. 초록색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 밑에 지역을 보시면 잘 안 보이실 텐데 나바테라는 그러한 지역이 있어요. 제일 밑에 그 나라의 공주를 이 헤롯 안티파스가 아내로 삼아서 살았던 거죠.
그런데 이복 형제 빌립 1세의 아내가 너무나 이쁘고 아름답고 또 그가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거라 이복 형제 빌립 1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 의해서 책망을 받잖아요. 3주 전에 말씀을 나눈 것 같은데 책망을 받고 결국 세례요한을 참수시켰던 분봉왕이죠.노란색 지역 헤롯 필립 2세 아까 말씀드렸듯 1세하고 다른 인물이죠. 2세는 헤로디아의 딸이었던 살로메를 아내로 맞이해서 살게 됩니다. 앞서 말했던 아켈라오하고 안티파스는 말디스라는 여인의 자녀로 친형제예요.
반면에 빌립 2세는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로서 이복 형제였던 것이죠. 당시 빌립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임명해 준 이 로마 황제에게 너무나 감사했던 거예요. 그래서 헬몬산 끝자락에 위치한 피니아스라는 지역의 로마식 건물을 만들면서 로마식 도시를 화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헌정하는 도시로 의미하는 그 이름을 담아서 헌정하게 되죠. 그래서 빌립보라는 것과 가이사 당시의 황제를 시저 가이사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을 붙여서 이름을 짓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과 황제의 이름을 비춰서 빌립보 가이사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게다가 이 도시는요 바엘 신전이 있었고요. 판신이라는 신전을 만들면서 우상숭배를 아주 많이 했던 그러한 지역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도시며 로마 황제를 숭배하던 이곳에서 로마 황제가 아닌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누구를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라 한복판에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거예요. 질문의 답변은 제자들이 하게 되는데 세 가지 답변을 내놓습니다. 우리 28절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제자들이 여자와 이르되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아,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세례요한 엘리아 선지자 중에 하나 이렇게 세 가지 답변을 내놓은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세 가지 답변은요. 세례 요한이 참수 당한 이후에 예수님의 소문이 헤롯 왕가에 들려지자 그 왕궁에서 대화 가운데 나왔던 표현 중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6장 14절 15절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났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아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에 하나와 같다 하되
이렇게 왕궁에서도 언급됐던 그러한 이름이죠.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가 자행했던 세례요한의 참수 사건 목을 뱉잖아요. 그래서 잔추 사건이 이복 동생이었던 빌립 2세, 그리고 그가 다스리던 다이아라에까지 소문이 분명히 퍼졌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이 지역과 빌립 2세가 다스리던 이 지역 모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그가 그저 세례요한 때로는 엘리아 아니면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뤘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대답을 들으신 거죠.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그 대답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 질문을 하신 이유는 두 번째 질문을 위한 마중물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지금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지난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면서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마음,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데에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은 사실 제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예수를 따라 다녔기 때문에 이 대답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 수준이 어떠한지가 드러나게 되잖아요. 이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3년 동안 니들이 이러한 신앙을 살았구나라는 평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미래까지도 결정지어질 수 있는 믿음의 문제였다는 거예요. 만약 제자들마저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주님은 세례요한입니다. 선지자 중에 한 사람입니라고 고백했다면 그렇게 이해했다면 이들은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속빈 강정과 같은 존재였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묻습니다. 다른 사람 말고 너는 너 나를 누구라 하면 여러분 이 질문 앞에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한번 좀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답을 베드로가 하죠. 뭐라고 합니까? 29절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십니다.
또 부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이다.하매
원문에 보면 주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아로 메시아죠. 메시아라는 뜻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잖아요. 구약에 보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있죠. 왕, 제사장, 선지자 그들을 기름 부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죠. 따라서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보았더니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진정한 참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자기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 또한 이 땅에 오신 목적, 그리고 고난과 죽음 이후의 부활 사건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께서 고통당하고 죽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 고백이 있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시는 거죠. 31절 같이 읽어보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것은요. 여러분 베드로가 고백했던 메시아의 사역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가르쳐준 거죠.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항변하다는 것은 무슨 짓 할때 또한 바람을 꾸짖을 때 사용했던 꾸짖다는 그러한 표현이에요.
감히 제자인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 거죠. 여러분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항변했을까요? 3예수님 지금 무슨 말씀하십니까? 로마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이제 곧 회복될 때가 왔는데 고난을 받고 죽는다니 무슨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까? 멱살을 잡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붙잡았더니 어깨를 붙잡고 예수님 도대체 무슨 말씀하십니까? 막 이러면서 항변을 했겠죠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 사역이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 사역과는 달랐던 거예요. 너무나 달랐던 거예요. 그래서 항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질문입니다. 뭐가 달랐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이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이 뭐가 달랐을까요? 그 해답이 33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33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노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차이가 있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셔서 죽으시는 거예요.
반면에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왕위에 올라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주님께 말씀 하신 그 말씀에 항변하는 것은 주님이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고난을 받고 죽습니까? 안 됩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왕으로 등극하셔야 됩니다라고 항변하고 있는 거 아주 강하게 어필한 것이죠.
문제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느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느냐에 따른 생각의 차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세요. 우리 이사야 55장 7절 8절 우리 한목소리로 크게 읽어봅시다.
악인은 그의 기를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그 뿌리를 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의 뿌리가 항상 하나님의 일에 있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태복음의 말씀도 동일한 것이 있는데 이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 짧은 대화 가운데에 하나님과 사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요.
먼저 마태복음에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게 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복되다 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오 육신의 아니라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 고백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그렇게 선언을 해주셨죠.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예수를 붙잡고 항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항변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렇게 선포하셨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시시때때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거예요. 사실 이 고백이 인간인 내 지식과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왜냐하면 탈락한 본성을 가진 죄악된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결코 알 수도 없고 고백할 수 없는 것이 신앙고백이에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 8절 9절에는 이런 말씀을 주시는데 우리 천천히 읽어보시는데 새번역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해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혈육으로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알게 하시면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신앙고백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 내 지식과 내가 가진 지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성령께서 고백해 하실 때에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셨다. 그것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내가 그냥 인위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할 수도 있지만 그거는 진정한 고백이 아니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십니다라고 내 속 깊은 곳에서 고백해 하는 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고백해 하시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고 고백하셨다는 이 사실에 인정하시고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이 믿음으로 고백되어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꼭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신앙 고백했잖아요. 그런데 1시간이나 지났습니까? 10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아니죠. 신앙 고백하고 바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 붙잡고 광단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예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꾸짖으셨던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마태복음에서는 한마디 더 붙여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사.
여러분 사탄은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라 그렇게 권면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릴 때 그리고 말씀에 집중해서 들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고 나도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어요. 저도 말씀을 들을 때 제가 전하지 않고 들을 때 그런 마음이 생기거든요. 말씀 하나님의 말씀 정말 생명과 같고 다했다. 내가 저 말씀 붙잡고 살아가리라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 문을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괴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여러분 그 괴리감은요. 아마도 사탄에 의해서 넘어짐으로 찾아오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날 붕어빵 나눔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신내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하다가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20년 동안 교회를 다니시면서 장로님까지 하셨는데 그분이 신내림을 받았는지 그분과 교제하면서 무당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한참 안타까워하시는 권사님의 모습을 제가 보았습니다.
여러분 디모데전서 4장 1절을 한번 보실까요? 디모데전서 4장 1절 우리 큰소리로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여러분 믿음에 떠날 수 있다는 사단이 전략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파고들면 우리가 준비하고 있지 않는 순간 어느 순간에 비옥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 6절 이하 9절에는 권면을 해주세요. 메시지 성경이라고 있는데 좀 쉽게 잘 구성된 성경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어요.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까지 그대는 믿음의 메시지로 양육받았고 건전한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 가르침을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예수의 귀한 종이 될 것입니다. 신앙을 가장한 어리석은 이야기를 멀리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훈련하십시오. 영적 무기력은 절대 금물입니다. 강조 영적 무기력은 절대 금물입니다.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하는 것은 유익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훈련받는 삶은 훨씬 유익합니다. 그런 삶은 현재는 물론이고 영원토록 그대를 건강하게 해줄 것입니다. 이 말을 믿고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말만 하는 성도가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훈련하는 일에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생각과 태도가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의 결론을 맺어 갑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부르세요. 제자들에게만 얘기한 게 아니라 무리와 제자를 함께 부르세요. 그리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예요? 제자들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죠.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앞 구절과 연결시켜 보면 아주 쉬운 가르침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 가시는 길 앞서서 가로막는 사탄이 되지 말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의 뒤를 따라오는 제자가 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자는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자는 맞지만 절대로 앞서가서는 안 되는 자들이죠. 예수님이 걸으셨던 고난의 길을 뒤따라 가겠노라고 결단하며 따르는 자들이 제자인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보다 앞서가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뒤따라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뭐겠습니까? 순종이에요. 순종 순종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순종은 단무지 순종은 단무지 단무지 단순하게 무 무식하게 지 지금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순종은 단순해야 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순종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순종은 무식해야 됩니다. 좀 안다고 이것저것 재고 따지면요. 순종 못합니다. 순종은 지금 해야 돼요. 지금 안 하면 틈이 생깁니다.공간이 생겨서 어디로 빠져나갈까 구멍을 보기 시작하고 도망가게 된다는 거 다시 한 번 따라할까요?
순종은 단무지
머릿속에 확 기억하시고 야 내가 순종을 어떻게 해야 될까 단순하게 하자. 무식하게 하자. 지금 하자. 이 마음을 저와 여러분들이 새겨서 저와 여러분의 단무지 순종을 가지고 살아가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며 따라가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3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시면 자기 목숨을 위하여 사는 자,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사는 자가 구분이 되죠.
여러분 이는 앞서 말했던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짓는 것과 평행을 이루는 그러한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따라서 자기 부인이 없으면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 사는 자가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제자는요. 목숨을 잃을지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생명을 우리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반면에 자기 목숨을 위해서 사람의 일에 얽매여 사는 사람, 결국 자기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임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된다는 것이죠. 이게 너무나 중요했던지 우리 주님께서 강조해서 덧붙이십니다. 36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뭡니까? 맞아요. 이거는 부정할 수 없어요. 다 가져도 죽으면 끝이잖아요. 목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동상이몽의 삶을 살면 안 되는 거죠. 겉으로는 예수님과 같이 따르겠노라고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제자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생명을 얻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힘에 겨워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그것이 옳은 길이면 그 길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눈을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자가 많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눈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뭐가 있다고 생명 생명이 있으니 그 길을 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제자들을 이끌고 아까 지도에서 봤죠. 저 위쪽이거든요. 헬몬산 끝자락에 위치한 그곳에 데리고 제자들을 가셔서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 곧 내가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길을 알아가게 될 텐데 그 과정 속에서 반드시 사두개인의 누룩이 너희들을 힘들게 할 것이고, 헤롯의 누룩 즉 권력이 너희를 힘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힘에 겹더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확신한다면 사단의 유혹을 조심하고 주를 보고 따라오는 자가 되어라. 제자가 되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유혹을 이기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뭐 합니까? 주일날 어떻게든 예배 드려보겠다고 노력하고 공예배 드려보기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 아니겠어요? 또한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고 말씀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순절 기간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자고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이러한 노력의 삶은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 누구보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기고 놀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 따라오겠노라고 나름대로 시간을 구별하고 마음을 구별하고 생각을 구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또 우리 신은혜 공동체 목회자로 세웠으니 저는 또한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요청을 합니다. 생명의 길 훈련의 자리에 더욱 열심히 감당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 제자가 되려면 주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분명한 고백 이게 뿌리가 내려져야 되죠. 그리고 그 뿌리 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아야 된다. 즉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기초로 해서 살아야 된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맞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열심히 훈련하여 주의 길을 따라가는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권면해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 앞에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고 단무지로 순종하셔서 한 주간도 믿음의 선한 싸움 잘 싸우시며 승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