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이창년 시인
금리(錦里) 이창년(李昌年) 시인은 나의 고향 경상남도 합천 삼가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대구로 나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문학 창작 교육을 받은 우리 문단의 신사이며 재원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중반쯤 ‘보리수시낭송회’에서였다. 당시의 시낭송회는 음향시설도 없는 다방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런대로 멋이 있고 낭만이 넘쳤다. 또한 문학 지망생들과 독자들이 많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황금찬, 최은하, 박현령 시인이 주축이 되어 매월 개최하는데 우리 문단에서 가장 오래된 시낭송모임이어서 초대시인도 많았다. 여기에서 이창년 시인과 통성명을 한 결과 고향 선배 시인임을 알고 무척 기뻤다. 그도 좋은 후배 하나 만났다며 한국 문단과 등단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박목월 시인이 주재하는 『심상』지에 등단을 희망하고 있으며 열심히 시 창작 공부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열심히 해서 꼭 성취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깔끔한 외모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어떤 사업체를 크게 경영하여 재산도 많이 모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가가 아닌 천성적인 시인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고 있었다.
내가 등단한 후 그에게 등단 잡지를 한 권 보냈더니 이제는 정식 시인 자격으로 어떤 낭송 모임에 초대해서 자작시를 낭송하게 하고 뒤풀이 장소에서 일일이 소개하는 자상함도 잊지 않았다.
그후 우리는 문단의 문학심포지엄이나 기타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나는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특히 술자리에 동석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의 호탕한 성품은 좌중을 휘어잡고 시 이론, 노래, 음담패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그를 요즘 문단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라고 부른다. 그가 기업을 경영할 당시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나 그가 통풍(痛風)으로 고생할 때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항상 동안(童顔)의 웃음을 잃지 않는다.
또한 그는 문우들과 선후배를 구분하지 않고 잘 어울려서 사귀고 술을 마신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문우들이 많다. 그가 주재하는 ‘이한세상’이라는 동인들도 그의 해학(諧謔)적 입담과 더불어 포용의 정으로 끌어안는다.
이 ‘이한세상’ 동인은 이창년에서 ‘이’를, 엄한정에서 ‘한’을, 변세화에서 ‘세’를, 그리고 송상욱에서 ‘상’으로 각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뽑아내어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이창년, 엄한정, 정송전, 이상규, 최재환, 변세화, 강우석, 황송문, 임상덕, 정명섭 시인들이 합류하여 동인지 제10집(2008)을 간행하고 상호 친목과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그는 첫 시집『바람의 門』(1980. 문예원) 발간 이후『겨울나비』『나의 빈 술잔에』『아침이슬 저녁노을』『너가 울메 나는 산이 되리』『동짓달 아흐레달』『미워할 수 없는 사람아』등을 상재했으며 에세이집『간이역』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문단활동에서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맥문학가협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거나 현재 재임 중에 있으며 한국문인산악회 문학상, 서포문학상, 한맥문학대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