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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떠나가는 배 (1)
럭비공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사람을 럭비공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 시대가 그러했다.
- 럭비공 같은 시대.
그랬다. 어떤 사건이 어느 나라에서 누구에 의해 발생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비단 춘추시대 초기의 특징만은 아니었다.
춘추시대 중, 후기는 물론 전국시대 전반에 걸친, 5백여 년 간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춘추전국시대 특유의 현상이었다.
정장공의 죽음에 이은 정(鄭)나라의 쇠락과 각 제후국들의 어지러운 이해 관계는 '럭비공 같은 시대'를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기(紀)나라를 멸망시키려다가 실패하고 세상을 떠난 제희공은 여러 아들과 딸을 두었다.
그 중 선강(宣姜)과 문강(文姜)이라는 딸이 있었다.
둘 다 천하절색이었다.
언니인 선강은 위나라 임금 위선공(衛宣公)에게로 시집갔고, 문강은 노나라 임금 노환공(魯桓公)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두 자매 모두 미증유(未曾有)의 성 스캔들을 낳는 장본인이 될 줄이야.
먼저 선강(宣姜) 이야기부터 해보자.
선강은 아버지 제희공의 명에 의해 위선공에게로 시집을 갔다.
그래서 선강(宣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위선공의 부인 강씨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래 선강이 시집가려고 했던 사람은 위선공이 아니라 그 아들인 세자 급(急)이었다. 다시 말하면 위선공은 며느리로 맞아들일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이었다.
위선공의 이름은 진(晉).
그는 일찍이 이복동생인 주우가 위환공을 죽이고 임금자리를 빼앗자 형나라로 망명했었다. 그 후 주우 일파가 노재상 석작에 의해 주살됨으로써 본국으로 돌아와 군위에 오르는 행운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위선공은 사람됨이 음탕하여 여자라면 미추(美醜)를 가리지 않고 밝혔다.
그가 아직 공자이던 시절, 즉 아버지 위장공(衛莊公)이 재위하던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내궁에 놀러갔다가 아버지의 첩 이강(夷姜)과 눈이 맞아 관계를 맺었다. 그 후로도 그는 서모(庶母)인 이강과 불륜관계를 유지하여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의논한 끝에 그 아들을 궁 밖 여염집에 맡겨 기르게 했다.
그 아들이 바로 세자 급(急)이다.
그 뒤 위환공, 주우에 이어 위선공이 즉위했다.
위선공은 망명 시절 형나라 공녀와 결혼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위에 오르자마자 정부인인 형녀(邢女)를 박대하고 서모인 이강과 터놓고 부부생활을 하였다. 여염집에 맡긴 급(急)도 데려와 세자로 삼고는 우공자 직(職)에게 맡겨 궁중생활을 익히게 하였다.
세자 급(急)의 나이 16세가 되었을 무렵, 위선공은 세자 급(急)을 장가들이기 위하여 제희공에게 사자를 보내 청혼했다. 제희공 역시 쾌히 승낙했다.
제나라로 갔던 청혼 사자가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자 위선공은 며느리감의 생김새가 궁금하여 물었다.
"얼굴은 보았느냐?"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들은 바에 의하면 천하절색이라고 합니다."
"천하절색?"
"그림을 그려놓으면 벌과 나비가 모여들 정도로 미색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 말에 위선공은 딴 마음이 생겼다.
그 후로 그는 솜씨가 뛰어난 장인(匠人)을 모아 기수(淇水)가에다 높은 누대를 새로 짓게 했다.
명목상으로는 영빈관을 짓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때 이미 선강(宣姜)을 가로챌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윽고 누대(樓臺)가 완성되었다.
일찍이 위나라에서는 보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황홀한 건축물이었다. 위선공은 그 누대를 신대(新臺)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신대 낙성식에 앞서 세자 급(急)을 불러 심부름 하나를 시켰다.
"송나라로 가서 송장공의 안부를 묻고, 또한 나의 안부도 전하고 오너라."
이를테면 친선사절이었다.
세자 급(急)은 위선공의 분부대로 사절단을 구성하여 송나라로 떠나갔다.
위나라 도성에서 송나라 수도인 상구까지는 천릿길에 가깝다. 오고 가는 데만도 한 달 이상의 시일이 걸린다. 위선공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는 세자 급(急)이 떠나가자마자 다시 좌공자 설(洩)을 불러 명을 내렸다.
"너는 지금 즉시 제나라로 가서 강씨를 친히 영접해 오너라. 시간을 지체해서는 예가 아니니 서둘도록 하라."
위선공의 재촉에 좌공자 설(洩)은 서둘러 제나라로 달려가 선강을 데리고 와서는 새로 지은 신대에 들여앉혔다. 선강(宣姜)은 그 곳이 자신의 신방(新房)인 줄만 알았다. 물론 송나라로 떠나간 세자 급(急)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선강이 앉아 있는 신방으로 위선공이 들어갔다.
선강(宣姜)은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자신의 신랑인 줄 알고 첫날밤을 보냈다. 그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첫날밤을 치른 사람이 세자 급(急)이 아니라 그 아버지 위선공임을 알았다. 그러나 어쩌랴. 물은 이미 엎질러진 뒤인 것을.
그날 이후로 선강(宣姜)은 위선공의 애첩이 되었다.
이 일은 위나라 백성들 사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위나라 백성들은 노래를 지어 부르기 좋아했다.
<신대(新臺)>라는 제목의 유행가가 도성 거리마다 불려졌다.
신대는 화려하고
기수(淇水)의 물은 도도하게 흐르는데
좋은 낭군 찾아 이 곳까지 왔건만
거저같은 자에게 가로채였구나.
고기를 잡고자 친 그물에
어찌하여 기러기가 걸렸는가
좋은 낭군 찾아 이 곳까지 왔건만
척시같은 자에게 가로채였구나.
'거저'란 뚱보를 이르는 말이요, 척시란 곱사등을 가리킴이다.
둘 다 흉물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위선공의 음탕함을 의미한다.
다시 풀어보면 좋은 낭군을 찾아 머나먼 위나라까지 왔는데, 뜻밖으로 흉물보다 더 음탕한 위선공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는 노래인 것이다.
송나라로 떠나갔던 세자 급(急)은 한 달이 조금 지나 본국으로 돌아왔다.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신대로 들어가보니 자신의 아내가 될 선강(宣姜)은 이미 아버지의 첩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세자 급(急)은 아버지와 달리 성품이 어질고 착했다.
그는 원망하거나 아쉬워하는 마음 없이 서모에 대한 예로써 선강(宣姜)을 잘 대해주었다.
신바람이 난 것은 위선공이었다.
그는 선강(宣姜)을 얻은 뒤로 신대에 틀어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강은 천하절색의 외모에 걸맞게 잠자리 기술도 뛰어났다.
위선공은 그러한 선강(宣姜)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육체에 빠져 3년간이나 신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 총애하던 서모이자 첩인 이강(夷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선강(宣姜)은 아들 둘을 낳았다.
큰 아들의 이름은 수(壽)였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삭(朔)이었다.
선강에게 빠진 위선공은 지난날 세자 급(急)을 총애하던 마음이 모조리 수(壽)와 삭(朔) 두 아들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장차 세자 급을 폐하고 두 아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후계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세자 급(急)은 온유하고 조신하는 성품이라 조금도 덕을 손상하는 일이 없었다. 흠을 잡아내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위선공은 좀처럼 세자 급(急)을 폐하려는 자신의 속마음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다만, 좌공자인 설(洩)을 불러
- 네가 공자 수(壽)를 잘 보살펴 다음날 군위에 오를 수 있게 하라.
하고 암시만 주었을 뿐이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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