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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책 보는 미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조선시대 호색한들이 많았지만 예종의 아들로 사촌형 성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제안대군은 여자를 극도로 꺼렸다. 그의 부인이 미인이었지만 마주앉지도 않았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에는 성(性)이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남성들은 외도를 큰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고전에는 여색을 가까이 한 호색한들도 적지 않게 나온다.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1347~1416)은 젊은 시절, 여자 문제로 큰 곤경에 빠졌다. 연산군때 대제학을 지낸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그가 예천군수로 있을때 여러 기생들과 문란하게 어울리다가 고발됐다.
평소 하륜의 인물 됨됨이를 높게봤던 경상관찰사 김주(1339~1404)가 "한 고을에 머물러 있을 자가 아니다"라며 감싸줘 위기를 모면한다. 김주는 후일 이방원이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제1차 왕자의 난(1398)' 때 정도전 측 인사로 분류돼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자 김주의 아내가 하륜을 찾아가 무릎 꿇고 "남편을 살라달라"며 간청했다. 하륜이 지난날을 떠올리고 적극 구명에 나서 김주는 목숨을 건졌다.
조선후기 음담패설집인 <고금소총>에도 수많은 명사들이 이름을 올렸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이자 조선 선조 대의 최고 명신 중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했고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전쟁 중 5번이나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전란이 수습된 선조 32년(1599) 우의정, 그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서인이었지만 당파에 초연했으며 문장에 뛰어나 다수의 시와 저술을 남겼다. 청빈한 삶을 살아 청백리에도 봉해졌다. <고금소총>에서 그의 모습은 무척 뜻밖이다.
사진2. 사대부가 여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조선시대에는 성이 남성의 전유물이기는 했지만 엄격한 자기수양이 중시된 만큼 무분별한 호색은 지탄 받았다.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이항복은 도원수 권율(1537~1599)의 딸과 결혼하면서 데릴사위로 처가에 들어간다. 이항복은 미모의 여종에 반했다. 이항복은 장인에게 조용한 곳을 얻어 독서에 전념하려 한다고 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이항복은 새로 마련한 집에 수시로 처가의 여종을 불러들였다.
뒤늦게 내막을 알아차린 권율이 현장을 급습하자 때마침 여종과 같이 있던 이항복은 다급한 나머지 이불로 여자를 감싸 덮었다. 방을 둘러보던 권율이 "당장 이불을 치워라" 하고 명했다.
하인들이 이불을 들어올리자 여종이 이불 속에서 툭 떨어졌다. "벗은 여자를 감추는 게 과연 어렵소이다"라고 이항복이 능청스럽게 웃자 권율도 할 말을 잃은 채 따라 웃고 말았다.
이항복은 또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월사 이정구, 일송 심희송 등 당대 내로라하는 시인들과 서울 교외에서 술판을 벌였다. 모두들 거나해지자 누군가 "세상의 소리 중 무엇을 최고로 치는가" 물었다.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답게 "밝은 달 아래 누각 꼭대기를 지나는 바람"이라고 답했고
이정구는 "산속 초가에서 선비의 시 읊는 소리"라고 했으며
심희송은 "붉은 단풍에 스치는 원숭이 울음"이라고 했다.
모두들 고상한 말을 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나선 이항복이
"첫날밤 미인의 치마끈 푸는 소리처럼 듣기 좋은 소리가 어디 있겠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송언신(1542~1612)의 일화는 엽기 그자체다.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한 그는 이황의 문인으로 당쟁의 선봉에 서서 서인을 공격했다. 따라서 서인이 쓴 실록의 평가는 매우 비판적이다. 실록은 "음탕하고 상스러운 행실이 많아 교양 있는 사람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고 논평한다.
<고금소총>에 그런 그가 여자를 밝혀 "평생에 1000명을 채우겠다"고 늘 호언장담하고 다녔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책은 송언신이 병든 노파나 행상하는 여자, 나물 캐는 여자까지 가리지 않고 겁탈했다고 소개한다.
그가 강원관찰사 때 관동지방을 순찰하다가 원주의 한 호장(향리의 우두머리) 집에 머물게 됐다. 송언신은 호장의 딸이 마음에 쏙 들었다. 딸은 추파를 던지는 관찰사의 행동이 미심쩍어 제 어미와 잠자리를 바꿨다.
야심한 밤에 송언신이 어미를 딸로 잘못 알고 덮쳤다. 어미가 "도둑이야" 소리치자 송언신은 "나는 관찰사지, 도둑이 아닐세"라고 말했다. 어미는 관찰사의 위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종 때 무인 김효성은 야인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워 무과 출신인데도 병조판서에 올랐고 계유정난(1453)때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는 데 적극 협력해 정난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에 따르면, 무인 기질이 강했던 그의 엽색행각은 송언신에 못지않다.
김효성은 여자가 많았고 부인은 그런 그를 심하게 질책했다. 어느 날 김효성이 귀가하다가 부인 곁에 검은색 모시 한 필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천은 어디다 쓸 것이오" 하고 물으니 부인은 정색을 한 채 "당신이 여자한테 빠져서 마누라를 원수같이 대하니 중이 될 마음으로 모시를 물들여 왔소이다" 하였다.
김효성이 웃으며 "내가 여색을 좋아하여 기생, 여의사부터 양가 규수, 천한 사람, 코머리(관기의 우두머리 또는 주모), 바느질하는 종 할 것 없이 얼굴이 곱기만 하면 꼭 사통해 왔으나 여승은 아직 한 번도 가까이 해본 적이 없소. 부인이 여승이 되겠다니 이는 내가 진정 바라는 바요" 하니 부인은 기가 막혀 승복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사진3. 무희.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효종의 사위 박필성(1652∼1747)은 당시로는 기록적이라고 할 수 있는 96세까지 살았다. 그는 효종과 안빈 이 씨의 딸 숙녕옹주(1649~1668)와 혼례를 올려 금평위에 봉해졌다. 숙녕옹주는 불행히도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한다.
부마는 재혼과 축첩이 법으로 금지됐다. 그 역시 옹주가 죽은 뒤 80년간 홀로 살았다. 영조 17년(1741) 영조는 박필성에게 궤장을 하사해 그의 공을 치하했다.
그러나 작자 미상의 <좌계부담>에 따르면, 그의 실제 생활은 결코 모범적이지 않았다. 그는 정력의 화신이었다. "백 살이 가까운 나이에도 이틀에 한 번꼴로 사랑을 나누었으니 너무나 뛰어난 정력을 어찌 일반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좌계부담>은 기술한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1417~1468·재위 1455~1468)는 어린시절부터 염문을 뿌렸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는 세조가 14세때 기생 집에서 자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적고있다.
세조가 기생과 함께 단잠에 빠져있는데 마침 그 기생의 기둥서방이 들어왔다. 놀란 세조는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쳤고 추격전이 십리나 벌어졌다. 세조는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겼고 세조의 종적을 찾지 못한 사내는 욕을 퍼부면서 돌아갔다.
곧 근처 인가에서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바라보더니
"자미성(紫微星)이 유수(柳宿·동방의 28개 별자리 중 24번째 별자리)를 거쳤으니 임금이 버들에 의지한 상이다. 이상한 일이로다"라며 중얼거렸다.
세조가 다음 날 알아보니 그 사람은 관상감(기상대)에 근무하는 관리였다. 후일 왕이 된 후 이날의 일을 기억해 관상감 관리를 찾았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대신 자손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들과 달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1466∼1525)은 여색을 끔직이도 싫어했다. 예종이 죽은뒤 왕위계승 1위 후보였지만 권력의 각축 속에서 사촌형 성종에게 보위를 양보해야 했던 '비운의 왕자'다.
<용재총화>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음식과 남녀의 정은 사람들의 큰 욕망이지만 지금 색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그중 한 명이 제안대군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나 부녀자는 더러우니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며 부인과 마주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안대군은 육체적으로는 아무 이상 없었지만 희한하게도 여성의 성기를 혐오하는 증세가 있었다고 야사는 전한다. 그런 까닭에 자식은 두지 못했지만 성종을 비롯해 조카 연산군, 중종 등 역대 왕들과 사이가 좋아 천수를 누렸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21.90세에 이틀 마다 사랑 나눈 임금의 사위 [조선 호색한]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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