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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름, 마지막 여름 방학, 그 마지막 하루..... 우리들의 젊음은, 어지러울 정도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금각도 역시 우리들과 같은 벼랑 끝에 서서, 대면하고 대화하였다. 공습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우리들과 금각을 가깝게 만들었다.
늦여름의 고요한 일광이 구경정의 지붕에 급박을 입히고, 곧바로 내리쏟는 빛은, 금각의 내부를 밤과 같은 어둠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이 건축의, 불후의 시간이 나를 압박하며, 나를 멀리하고 있었으나, 머지않아 소이탄의 불에 타 버릴 그 운명은, 우리들의 운명으로 접근해 왔다. 금각은 어쩌면 우리들보다 먼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금각은 우리들과 같은 생을 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48,9
기다려도 기다려도 교토는 공습을 당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9일, 도쿄의 번화가가 불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들었건만, 재화와는 무관히 교토의 상공에는 투명한 초봄의 하늘만이 있었다.
나는 거지반 절망에 빠져서 기다리며, 이 초봄의 하늘이, 마치 반짝이는 유리창처럼 내부를 보여 주지는 않지만, 내부에는 불과 파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였다. 나에게 인간적인 관심이 희박하다는 사실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빈곤도, 거의 나의 내면 생활을 좌우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재화를, 큰 파국을, 인간적인 규모를 초월한 비극을, 인간도 물질도,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깡그리 동일한 조건하에서 말살시켜 버릴 거대한 하늘의 압착기와도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다. 때로는 초봄 하늘의 심상치 않은 광채가, 지상을 덮어 버릴 정도로 커다란 도끼날의 시퍼런 빛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단지 그 낙하를 기다렸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낙하를.
나는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원래 내가 암흑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 관심은, 나에게 주어진 난문(難問)은 미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에게 작용하여 암흑의 사상을 품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52
교토는 공습을 당하지 않았으나, 공장에서 출장 명령을 받고는 비행기 부품의 발주 서류를 갖고 오사카의 본사에 갔을 때, 우연히 공습이 있었기에, 창자가 노출된 공장 노동자가 들것으로 운반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째서 노출된 창자는 처참한 것일까? 어째서 인간의 내부를 보면 끔찍해서 눈을 가려야만 하는가? 어째서 인간의 내장이 추한 것일까? 그것은 매끄럽고 젊음에 넘치는 피부의 아름다움과 완전히 동질의 것이 아닌가? 내가 자신을 추함을 무로 돌리는 이러한 생각을 쓰루카와에게서 배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떠한 얼굴을 할까? 내부와 외부, 가령 인간을 장미꽃처럼 속도 겉도 없는 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어째서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만약에 인간이 그 정신의 내부와 육체의 내부를, 장미의 꽃잎처럼 유연하게 뒤집어 감아서, 햇빛이나 5월의 산들바람에 드러나도록 할 수 있다면...... 63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행위, 여자를 밟았다는 그 행위가, 기억 속에서 점차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여자가 유산하였다는 결과를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사금처럼 내 기억에 침전되어, 언제까지고 눈부신 광채를 발하였다. 악의 광채. 그렇다, 설령 사속한 악이라 하더라도, 악을 범하였다는 명료한 의식은, 어느 틈엔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었다. 훈장처럼, 그것은 내 가슴 안쪽에 매달려 있었다. 91
토끼밭은 앉기에 좋았다. 햇빛이 그 부드러운 잎사귀에 흡수되어 자잘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기에, 그 일대가 지면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는 듯이 보였다. 앉아 있는 가시와기는, 걷고 있을 때와는 달리, 남들과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일종의 험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육체적인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불구자도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리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먼저 보는 쪽이 이긴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 가시와기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이 자기 주변의 세계를 훤히 내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98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세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
불안이 전혀 없고, 발붙일 곳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독창적인 삶이 시작되었지. 자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자살하기도 하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야. 안짱다리가 내 삶의 조건이고, 이유이며, 목적이자, 이상이고..... 삶 그 자체이니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니까. 원래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치스러운 불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105,6
늙은 과부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은, 아름답지도 않고, 신성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 추하고 늙었다는 점이,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나의 내적인 상태에, 부단한 확증을 주는 듯이 여겨졌어. 어떠한 미녀의 얼굴이라 할지라도, 전혀 꿈도 없이 쳐다볼 때, 이 노파의 얼굴로 변모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니? 나의 안짱다리와, 이 얼굴과..... 그렇지, 요컨대 실상을 보는 게 내 육체의 흥분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거야. 나는 처음으로, 친화의 감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믿었지. 그리고 문제는, 나와 대상 사이에 있는 거리를 어떻게 좁힐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답게끔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거리를 유지할까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알겠니? 그때 나는, 그곳에 정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도달하고 있다는 불구의 논리, 결코 불안에 휩싸이지 않는 논리에서, 나의 에로티시즘의 논리를 발명한 거야. 세상 사람들이 탐닉이라고 칭하는 것과 닮은꼴의 허구를 발명한 거지. 은폐물이나 바람과도 비슷한 욕망에 의한 결합은, 나에게 있어서는 꿈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보는 것과 동시에, 숨김없이 보여지고 있어야만 했지. 내 안짱다리와 내 여자는, 그때 세계의 밖으로 내던져져 있었지. 안짱다리도 여자도, 나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어. 실상은 그쪽에 있었고, 욕망은 가상에 불과했지. 또한 보고 있는 나는, 가상 속에서 끝없이 전락하면서, 보여지는 실상을 향하여 사정(射精)하는 거야. 내 안짱다리와 내 여자는, 결코 서로 접촉하는 일이 없이, 결합하지도 못하고, 함께 세계의 밖으로 내던져진 채로..... 욕망은 끝없이 솟구쳤지. 왜냐 하면, 그 아름다운 다리와 내 안짱다리와는, 이미 영원히 접촉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 생각이 이해하기 힘든 걸까? 설명을 필요로 할까? 하지만 내가 그 이후로, 인심하고,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은, 너도 알겠지? 불안도 없어. 사랑도 없고. 세계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도달하고 있는 거야. 이 세계를 일부러, ‘우리들의 세계’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의 ‘사랑’에 관한 미몽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있어. 그것은 가상이 실상과 결합하려는 미몽이라고 - 이윽고 나는, 결코 사랑받지 못한다는 내 확신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양태라는 걸 알게 됐지. 이것이 내가 동정을 버린 전말이야. 108
어느 날 나는, 방 뒤꼍에 있는 밭에서 작업을 하던 도중에, 자그맣고 노란 여름철 국화에 벌이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본 적이 있다. 햇빛이 가득한 가운데 금빛 날개를 붕붕거리며 날아온 꿀벌은, 수많은 국화꽃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벌의 눈이 되어 보려고 하였다. 국화는 한 점의 흠집도 없이 노랗고 단정한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금각처럼 아름답고, 금각처럼 완전하였지만, 결코 금각으로 변모하는 일이 없는 국화꽃 한 송이일 뿐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확고한 국화, 한 송이의 꽃, 아무런 형이상학적인 암시도 지니지 않는 하나의 형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이처럼 존재의 절도를 유지함으로써, 넘칠 듯한 매력을 풍기며, 꿀벌의 욕망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형태도 없이, 비상하고, 흐르며, 약동하는 욕망 앞에서, 이렇듯 대상으로서의 형태에 몸을 숨긴 채로 숨쉬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형태는 서서히 희박하여져, 무너질 듯, 떨며 전율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화의 단정한 형태는 꿀벌의 욕망의 본떠서 만든 것이며, 그 아름다움 자체가 예감을 향하여 꽃피운 것이니까, 지금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형태의 의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형태야말로, 형태도 없이 유동하는 삶의 거푸집이며, 동시에, 형태도 없는 삶의 비상(飛翔)은, 이 세상의 모든 형태의 거푸집인 것이다...... 꿀벌은 그리하여 꽃의 깊숙한 곳으로 돌진하여, 꽃가루에 뒤범벅이 되어, 도취감에 빠져들었다. 꿀벌을 받아들인 국화꽃은, 그 자신이 노란색의 화려한 갑옷을 입은 벌처럼 되어, 지금이라도 줄기로부터 벗어나 비상할 듯이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167,8
영원의, 절대적인 금각이 출현하여, 내 눈이 그 금각의 눈으로 변모할 때 세계는 이처럼 변모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변모한 세계에서는 금각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미를 점유하며, 그 밖의 것들은 흙먼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이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전에 금각의 정원에서 창녀를 밟은 이후로, 또한 쓰루카와가 급사한 이후로, 내 마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과연 악은 가능할까?’ 169
이전에도 노사를 죽이겠다는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곧바로 그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설령 노사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 중대가리와 그 무력한 악은, 계속하여 무수히, 어둠의 지평선에서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을,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不壞)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정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
생각하는 도중에, 해학적인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금각을 불태운다면’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교육적인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 연못가에 계속하여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존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 시간의 응고물에 둘러싸여 유지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단지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도록 목수가 만든 작은 서랍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간이 그 물체의 형태를 능가하여, 수십 년 수백 년 후에는, 거꾸로 시간이 응고되어 그 형태를 취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일정하고 조그만 공간이, 처음에는 물체에 의하여 점령당하던 것이, 응결된 시간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영(靈)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중세의 동화 <부상신기(付喪神記)>의 서두에 이렇게 씌여 있다. “음양잡기(陰陽雜記)에서 말하기를, 기물(器物)이 100년을 지나, 변화여 정령을 얻고 나서, 사람의 마음을 기만한다. 이것을 부상신(付喪神)이라 칭한다고 한다. 이것의 의하여 세속에서는, 매년 입춘에 앞서서, 가정집의 낡은 구족(具足)을 처분하여, 길가에 버리게 되었는 바, 이를 매불(煤拂)이라 한다. 이것이 곧, 100년에서 1년 모자라는 부상신이 재난을 대신하게 된다.”
내 행위는 그처럼 부상신의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이 재앙에서 그들을 구하게 되리라. 나는 이 행위에 의하여, 금각이 존재하는 세계를, 금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뒤바꾸게 되리라. 세계의 의미는 확실히 변하겠지....... 205,6
그는 방화자가 아니라, 단지 산보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아마도 조금 따분하고, 조금 가난한, 그런 청년일 뿐이었다.
모두 빠짐없이 보고 있던 나에게는, 방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그토록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본 그의 소심함, 즉 학생식의 유치한 탈법의 기쁨, 불이 꺼진 성냥을 그토록 꼼꼼히 비벼 끄는 태도, 즉 그의 ‘문화적 교양’, 특히 그 다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잡동사니 같은 교양 때문에, 그의 자그마한 불은 안전하게 관리되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성냥의 관리자이며, 사회에 대하여 완벽하게 지체 없는 불의 관리자라는 사실을 자만하고 있으리라.
모든 옛 사찰들이, 유신 이후에 좀처럼 불타지 않게 된 것은 이러한 교양 덕분이었다. 어쩌다가 실화는 있어도, 불은 절단되고, 세분되어, 관리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에는 결코 그렇게 않았다. 지은원은 에이쿄3년(1431)에 불이 났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화재가 있었다. 남선사는 메이토쿠 4년(1393)에 본사의 불전, 법당, 금강전, 대운암 등이 불탔다. 연역사는 덴키 2년(1571)에 잿더미가 되었다. 건인사는 덴분 21년(1552)에 전쟁으로 불탔다. 삼십삼당간은 겐쵸 원년(1249)에 소실되었다. 본능사는 덴쇼 10년(1582)에 전쟁으로 불탔다.
그 무렵 불과 불은 서로 친밀하였다. 불은 이처럼 세분되어, 멸시당하는 일도 없이, 언제나 불은 다른 불과 손을 잡고, 무수한 불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인간도 아마 그러하리라. 불은 어디에 있거나 다른 불을 부를 수 있었고, 그 소리는 곧바로 전하여졌다. 절의 화재가 실화(失火)나 비화(飛火) 혹은 전쟁에 의한 것일 뿐, 방화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설령 나와 같은 사내가 옛날의 어느 시절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기고 있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절은 언젠가 반드시 불탔다. 불은 풍부하고, 방자하였다. 기다리기만 하면, 기회를 노리던 불이 반드시 봉기하여, 불과 불은 손을 마주 잡고,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 금각은 실로 보기 드문 우연으로 불을 모면하였을 뿐이다. 불은 자연이 일어났고, 멸망과 부정(否定)은 정상이며, 세워진 건물은 반드시 불에 타, 불교적인 원리와 법칙은 엄밀하게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설령 방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의 힘에 호소한 것이었기에,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것을 방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지상(地上)은 불안하였다. 쇼와 25년(1950)의 지금도 지상의 불안은 그에 못지않다. 예전의 절들이 불안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면, 현재의 금각도 소실되어야 하리라.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