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純祖) 장녀 : 명온공주(明溫公主,1810~1832) - 안동인 김한순(金漢淳)의 아들 동녕위 김현근(東寧尉 金賢根) 3 녀 :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 안동인 김연근(金淵根)의 아들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 4 녀 :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 해평인 윤치승(尹致承)의 아들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년 음력 10월 13일 ~ 1832년 음력 6월 13일)는 조선의 왕족이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녀이다. 출생일: 1810년 10월 13일 (음력) 사망일: 1832년 6월 13일(21세) (음력) 부친: 순조(純祖) 모친: 순원왕후 김씨 배우자: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자녀: 없음 가계 1810년(순조 10년) 음력 10월 13일[1]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녀로 태어났다. 성은 이, 본관은 전주이다. 문조(효명세자)의 친동생이며, 복온공주와 덕온공주의 친언니이다. 덕온공주의 모후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출신으로, 김조순의 딸이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집안이 풍양 조씨 가문과 함께 조선 말기 세도 정치의 절정기를 이끌어 나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이기도 하다. 공주 시절 8살 때인 1817년(순조 17년) 음력 5월 11일 정식으로 공주에 봉해져 명온공주(明溫公主)라 하였다. 이후 1823년(순조 23년) 음력 5월 10일 명온공주의 부마를 간택하기 위해 전국의 12세부터 15세까지의 남자들에게 금혼령을 내렸으며,이 해 음력 6월 2일 진사를 지낸 안동 김씨 김한순의 아들이자 명은공주와는 동갑내기인 김현근을 부마로 정하고 동녕위(東寧尉)에 봉했다. 그리고 음력 7월 20일 명온공주와 김현근의 가례가 열렸다. 명온공주가 궁궐 바깥에 새로운 살림을 꾸리게 되자 1824년(순조 24년) 음력 9월 8일에는 효명세자가 공주의 집에 다녀갔고, 1826년(순조 26년) 음력 3월 28일에는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순조와 효명세자가 함께 직접 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죽음 1830년(순조 30년) 음력 5월 6일 오빠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1832년(순조 32년) 음력 5월 12일, 명온공주의 바로 아랫동생인 복온공주가 혼인 2년만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겨우 한 달이 지난 음력 6월 13일, 명온공주도 오랜 투병생활 끝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순조는 장례를 복온공주의 예에 맞춰 진행하도록 하고, 직접 명온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한편 명온공주의 남편인 김현근은 1868년(고종 5년) 음력 8월 26일 사망하였다. 김현근에게는 사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가족관계 홍석주가 쓴 명온공주 묘지명에 따르면 2차례 임신을 하였으나 모두 일찍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의 적장녀. 효명세자의 동복 동생이자 복온공주, 덕온공주의 언니가 된다. 1810년(순조 10) 왕실에 명온공주가 태어났다.[2] 태어날 당시 성별을 가리지 않고 왕실의 후사가 귀한 시절이었고, 오랜만에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공주였으므로 그야말로 금지옥엽으로 자랐을 것이다. 오빠 효명세자는 동기 간의 우애가 깊었는데, 특히 나이가 비슷한 명온공주와 정이 도타웠다. 효명세자는 삼매연림(三妹連林)이라는 글에서 "명온이는 성품이 영명하고, 기골이 청수하며 시문에도 능통하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청수(淸秀)하다는 말은 빼어난 미인에게 쓰는 말이며, 효명세자는 명온공주를 소식의 누이에 비교하여 매란여사(梅蘭女史)라는 호를 붙여 주었다. 또한, 효명세자는 사흘만 얼굴을 보지 못해도 그리워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시를 보낼 때는 한시에 한글 음을 병기하고 번역과 주석을 달았다. 주로 한글로 문자를 쓰는 여동생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효명세자, 《귀문도(龜文圖)》 그대와 나는 오누이로서 지기를 겸하였으니 나는 형이요 그대는 누이라 나이도 같지 않도다 한 뿌리에서 형체를 나눠 받아 우애를 같이 하고 임금과 중전께 기쁨을 드리고 은혜와 자애를 받았도다 네가 현숙하고 총명함이 많음을 사랑하니 금옥 같은 자품에 빙설 같은 모습이로다
예정된 혼인 817년(순조 17) 8세의 나이로 명온(明溫)이라는 작호를 받고,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823년(순조 23년)순조는 부마를 간택하고자 12세에서 15세까지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금혼령을 내렸다. 5월 22일 초간택, 5월 27일 재간택, 6월 2일 삼간택을 행하였고, 세 번에 걸친 간택은 모두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었다. 최종적으로 낙점된 사람은 진사 김한순의 아들 김현근이었다. 김현근은 선원 김상용의 8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9대 외손인 명온공주와는 이성 친족이다. 사실 간택은 형식적인 것으로, 이미 김현근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동생 복온공주의 부마는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였고, 덕온공주의 부마는 윤의선이었는데, 그는 안동김씨 김이위의 외손이었다. 뒷날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까지 생각한다면, 철저히 준비된 혼인으로 보인다. 1824년(순조 24) 9월, 공주는 궁궐을 떠나서 살게 되었다. 이때 효명세자가 직접 공주의 집에 다녀갔고, 1826(순조 26)에는 순조와 효명세자가 함께 공주의 집에 찾아오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죽음 1832년(순조 32) 명온공주는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혼인한지 9년 만이었다. 장례 절차를 주관할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여서 진행하였다. 명온 공주(明溫公主)가 졸서하였다. 하교하기를, "병이 비록 짙고 오래 끌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만에 하나 다행하기를 바랐는데, 지금 길이 갔다는 기별을 듣게 되니, 서럽고 서럽도다. 상위(喪威)가 이토록 겹쳐 참으로 인정으로는 감내하지 못하겠으니, 서럽고 서럽도다. 졸서한 명온 공주의 상(喪)에 온갖 상수(喪需)를 한결같이 복온 공주(福溫公主) 상사(喪事)의 예대로 거행하고 동원 부판(東園副板) 1부(部)를 실어보내도록 하라." 《순조실록》 순조 32년 6월 13일 여담 동녕위 김현근에게는 정신 질환이 있었다. 의원들이 치료하지 못하여 무당들을 불렀는데, 밤낮으로 무당들이 대나무 칼춤을 추며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도궁(竹刀宮)이라고 부르다가 죽동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태가 쓴 (이규태의 600년 서울)이라는 글에 실려있는 이야기로 출처가 명확하지 않고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신빙성은 떨어진다. 고모 숙선옹주가 명온공주 생각하여 지은 《月夜懷明溫(월야회명온)》이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월야회명온(月夜懷明溫) 명월도계전(明月到階前) 밝은 달이 계단 앞에 이르니 청광여견인(淸光如見人) 맑은 빛이 사람을 보는 듯하네 요지봉루야(遙知鳳樓夜) 멀리 봉루를 생각하는 밤 분향음시신(焚香吟詩新) 분향하고 시를 읊조리니 새로워지네
본관은 안동, 자는 성희(聖希)이다. 현종 대 이후로 정실 왕비가 자식을 낳는 일이 없었다. 순조도 효의왕후가 아닌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 7월 15일 경오 3번째기사. 세 명의 여동생들이 숲처럼 연달아 있다는 뜻이다. 소식에게 소소매(蘇小妹)라고 하는 시문을 잘 짓고 재주가 많은 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시를 쓸 때 한글 음으로 표기하고 번역과 주석을 다는 것은 당시 여성들이 한시를 짓던 방법이었다 1821년, 12세가 되던 해 효의왕후의 장례가 있었다. 그래서 14세가 된 1823년에야 간택을 시작했다. 동생 덕온공주도 순조의 장례로 16세가 돼서야 간택을 시작했다. 김한순의 아버지가 연천 김이양인데, 당대에 삼호정시사로 유명한 여성 시인 운초가 그의 첩이었다. 조선시대에 이성친족 간의 혼인은 아주 흔했기 때문에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동생 복온공주, 덕온공주의 부마 간택도 내정자가 있었다.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년 음력 10월 26일 ~ 1832년 음력 5월 12일)는 조선의 왕족이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차녀이다. 가계 1818년 11월 24일(순조 18년 음력 10월 26일)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차녀로 태어났다. 성은 이, 본관은 전주이다. 문조(효명세자)와 명온공주의 친동생이며, 덕온공주의 친언니이다. 덕온공주의 모후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김조순의 딸이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집안이 풍양조씨 가문과 함께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끌어 나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이기도 하다. 공주 시절 7살 때인 1824년 11월 10일(순조 24년 음력 9월 20일) 정식으로 공주에 책봉되어 복온공주(福溫公主)라고 하였다. 이후 13살 때인 1830년 4월 20일(순조 30년 음력 3월 28일) 삼간택을 거쳐 부사과를 지낸 안동 김씨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와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며, 김병주는 창녕위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 해 5월 20일(음력 4월 28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6]. 그러나 공주는 혼인 2년만인 1832년 6월 10일(순조 32년 음력 5월 12일) 1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순조는 현종의 딸 명안공주의 예에 맞춰 장례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조정의 관원들에게 장례에 미진한 부분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또 성복을 하는 날에는 순조가 직접 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일찍 사망하여 소생은 없었다]. 복온공주의 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에 마련되었으며, 훗날 남편 김병주와 합장되었다. 한편 당시 이 인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 지역의 이름을 공주의 무덤에서 유래하여 "공주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번동에는 복온공주와 김병주의 재사인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가 있으며, 이 재사는 2002년 9월 13일 서울특별시의 등록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복온공주가 사망하고 불과 한달 후인 1832년 7월 10일 (순조 32년 음력 6월 13일), 공주의 친언니인 명온공주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순조의 자녀는 셋째 딸인 덕온공주를 제외하고 모두 부왕보다 일찍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순조보다 오래 산 덕온공주도 1844년(헌종 10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편 복온공주의 남편 김병주는 1853년 3월 28일(철종 4년 음력 2월 19일) 사망하였다 복온공주가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갈 때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던 궁중술의 한 종류인 삼해주의 제조법을 가지고 간 후, 대대로 안동 김씨 집안에서 삼해주의 제조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삼해주는 1993년 2월 13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복온공주가 혼례 때 입었던 활옷이 남아있다]. 가족관계 조부 : 정조(正祖, 1752 ~ 1800) 조모 : 효의왕후 청풍김씨 (1753~1821) 생조모 : 수빈 박씨 (綏嬪 朴氏, 1770 ~ 1822) 아버지 : 순조(純祖, 1790 ~ 1834) 외조부 : 김조순(金祖淳, 1765 ~ 1832) 외조모 :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陽府夫人 靑松 沈氏, 1766 ~ 1828) 어머니 :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 ~ 1857) 오빠 : 익종(翼宗, 1809 ~ 1830) 언니 :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 ~ 1832) 이복언니 : 영온옹주 (1817-1829) 여동생 :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 ~ 1844) 시아버지 : 김연근(金淵根, 생몰년 미상) 남편 : 창녕위 (昌寧尉) 김병주(金炳疇, 1819 ~ 18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