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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02. [역경의 열매]
오성삼 (1-20) 오늘의 내가 나 되었음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내 인생의 전반부는 아이들과 노는 것이 좋았던 철부지 어린시절을 빼면 내내 비가 내렸다.
물에 젖은 성경책과 찬송가 한 권을 남긴 아버지, 재봉틀에 의지해 아들 셋을 홀로 키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시던 어머니. 그분들이 가난과 함께 주신 것은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한 힘이었다.
120명을 뽑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응시생 122명 가운데 121등을 한 내가 선생님이 될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겪은 어려움이 어디 한두 가지였을까. 하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이고 내가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대학시절 대학 건물에서 새우잠을 자고 배를 곯아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추운 겨울날 교문 앞에서 입학시험 문제지를 팔 때 수위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대학 교수의 꿈을 키웠다. 병마로 ROTC 임관을 못했을 때도 흔들렸을지언정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등병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원 준비를 했다. 유학생활 중 겪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장학금을 타지 못하면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어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 가난도 감사했고, 대학시절부터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준 월드비전과 정수장학회 장학금도 큰 선물이었다.
나는 결국 대학교수가 되었고 교육대학원장 일을 맡아보며 전국 134개 교육대학원장협의회 회장도 되었다. 정수장학회 총동창회 회장과 서울 시내 가난한 집안의 고등학생들에게 연간 90억여원을 지급하는 하이서울장학위원회 위원장 역할도 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받았던 도움을 조금씩이나마 갚기 시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갚아도 마음의 빚이 날마다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든 생각이 보잘것없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겪고 느낀 것들을 모으고 마무리할 시기가 다가오는 시점에, 교육학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누군가에게 작은 깨달음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장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비는 끝이 났고 지금 나는 힘들게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싶다.
"일요일 예배를 끝내고 교회를 나오던 두 친구가 있었다. 교회에 나오자마자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두 친구는 교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도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 친구가 조바심을 내며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비가 그치기는 할까?' 다른 친구가 말했다. '자넨 그치지 않는 비를 본 적이 있나?'"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도 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비가 없듯이 인생에서 끝나지 않는 시련은 없다.
인생을 살아오며 내가 남에게 감동을 주기보다는 남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선물을 받아왔다. 고백하건대 오늘의 내가 나 되었음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주변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도움 때문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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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47년 경기도 출생,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대학원 교육학 박사,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건국대학교 농업교육학사, 건국대 교수, 건국대 교육대학원원,장 전국교육대학원장협의회회장, 국제교육진흥원원장, 건국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장, 현재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장
***[역경의 열매] 오성삼 (2) 내 유년의 8할은 아버지가 일하던 보육원 종소리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리 38번지. 경원선을 타고 가다 동두천역에 내리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육원이 하나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 보육원은 오래전 문을 닫았지만 그곳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흔적들은 아직도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 5월, 우리 가족은 보육원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그곳으로 이사했다. 안흥리에 대한 첫 인상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교회 옆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 정차했을 때 교회 옆으로 흘러내리는 냇가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무거운 해머로 냇가의 큰 돌을 내리치면 그 밑에 있던 물고기들이 기절해 떠오르고 애들은 그 물고기를 건져내곤 했다.
신앙심이 깊으셨던 아버지는 보육원 일을 하시며 그곳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교회를 증축하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다. 나와 내 동생은 보육원에서 살면서 원생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끔찍한 종소리의 시그널이다. 내가 종소리에 대한 낭만을 잃어버린 것은 어린시절 보육원의 종소리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보육원 사무실 앞 왼쪽에 미군 탱크의 톱니바퀴를 쇠사슬로 매달아 붉은 페인트칠을 해놓은 육중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통솔하는 수단은 종소리였다.
종소리가 '땡땡 땡땡' 두 번씩 울리면 식사시간을 알리는 신호요, '땡땡땡 땡땡땡' 세 번씩 울리면 소리를 듣는 즉시 모이라는 신호다. '땡땡땡땡…' 연속적으로 울리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상황을 알리는 비상 신호다. 종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이들을 곤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식당으로 모이게 했으며 흩어져 놀던 아이들을 보육원 앞마당에 줄 서게 했다.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는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소리였다. 추석과 크리스마스, 설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외 없이 나오는 메뉴가 있었다. 아침과 저녁은 보리와 옥수수가루가 반반씩 섞인 밥에 시래깃국 김치와 새우젓이다. 점심엔 밀기울로 만든 수제비나 옥수수가루로 쑨 죽이 배급됐다.
보육원에서는 마치 생선가게 생선을 크기대로 분류하는 것처럼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나이와 덩치에 따라 소치, 중치, 대치로 나누어 배식할 때 양을 달리했다. 아무리 먹어도 늘 허기를 느끼는 아이들은 소치에서 중치로 편입되거나 중치에서 대치로 편입되는 것을 군대에서 진급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아멘."
그 시절 이 노래를 참 지겹게도 불렀다. 식사기도인 셈이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불러야 했는데 기도하는 동안 자신의 밥이 도난당하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밥그릇을 덮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실눈을 뜨고 주변 경계를 하면서 목청만 높여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식사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손님이 방문할 때면 우리는 '땡땡땡 땡땡땡' 즉시 집합 소리를 듣고 달려와 손님을 위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손님은 대부분 미군 병사들이었다. 일요일이면 미군 병사들의 예배시간에 성가를 해주기 위해 미군부대 내에 있는 교회로 갔다. 예배가 끝나면 한 주 동안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보리밥과 새우젓을 싫어하던 내게는 미군 병사들과 함께하는 그 식사야말로 한 주 동안 허기진 배를 채우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곰처럼 다음 일요일이 되기까지 영양을 비축하는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3) 아버지, 물에 빠진 보육원생 구하다 33세에 소천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신앙생활에 열중이시던 모습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입대해 보병 장교가 되셨다. 초등학교 1, 2학년 시절, 토요일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대에 놀러가곤 했다. 병사들은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주었고 간혹 생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나 모형 자동차와 같은 조그만 선물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병사들의 사랑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식사 시간마다 병사들의 배식이 끝나면 막사를 돌며 식사기도를 하셨다. 기도는 식사에 대한 감사 기도의 성격을 넘어 고향에 계신 병사들의 부모님과 가족을 위한 기도의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식사 후 아버지는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병사들의 식기에 일일이 물을 따라주셨다.
아버지는 동두천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분이다. 군에서 자재를 공급받고 병사들을 동원해 교회를 지은 것이다. 이제는 화재로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목조건물이던 동두천감리교회가 아버지께서 지으신 교회다. 전역 후에는 동두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동성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열정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군에서 예편한 직후 잠시 양계장을 운영했다. 아버지의 일과는 집에서 30여분 떨어진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나이 많은 걸인 한 사람과 마주쳤다. 아버지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에게 입혀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는지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 아침식사를 대접해 보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새벽기도를 갔던 아버지가 뜻밖의 손님을 모시고 왔다. 잔뜩 겁에 질린 손님은 양손에 닭 두 마리를 거머쥐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는 손님과는 대조적으로 상기된 표정이었다. "여보,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닭을 두 마리나 내려주셨어요. 어서 아침 준비하구려."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셨다. 그즈음 우리 양계장에는 종종 밤손님이 찾아와 닭을 훔쳐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날 손님은 운이 나쁘게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던 아버지에게 덜미가 잡힌 것이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닭 도둑에게 식사를 대접해 보냈다. 속이 터지는 것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군에 복무하실 때도 집안 살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급여는 병사들이 휴가 떠날 때 부모님 선물 사라고 교통비 하라고 나눠주고, 길거리 불우한 사람들 식사하라며 주고, 교회에 헌금하느라 바닥이 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장사를 해서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5월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가시던 아버지는 100명이 넘는 고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성학이란 원생이 물에 빠진 걸 보고 물에 뛰어드셨다가 목숨을 잃으셨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아직도 기억에 남는 추도사의 한 구절이 있다.
"오종섭 집사님은 서른 세 살의 나이, 꼭 예수님만큼만 세상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처럼 그는 고아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가셨지만 그가 남긴 많은 일들과 거룩한 죽음은 우리의 가슴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진 동산에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생겼다. 하나는 아버지의 무덤, 다른 하나는 그 고아의 무덤이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4) 가난·질곡의 시절 극복하게 해준 유산은 '믿음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겨준 것은 교회에 들고 가시던 성경책과 찬송가뿐이었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와 장남인 나 그리고 어린 남동생 둘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날들을 생각하면 뜯어 먹고 살 수도 없는 성경책과 찬송가는 너무 초라한 유산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역경을 만날 때마다 믿음의 유산이야말로 가장 값진 유산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5년제 '고등공민학교'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학령기를 놓친 학생들이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운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고등공민학교 5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6학년 과정을 배우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5년 과정조차 엉망으로 보낸 채 졸업을 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골중학교의 모집 정원은 2개 학급 120명이었다. 입학원서 마감 결과 122명이 지원했다. 결국 두명만 떨어지는 입학시험을 응시생 122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러야 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미술 등 과목별 필기시험을 치렀고 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팔굽혀 펴기와 같은 체력장도 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명을 탈락시키기 위해 상당히 비효율적인 입학시험을 치른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합격자 발표였다. 불합격자 두 명만 개별적으로 통보해주면 될 일을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에게 다음주 월요일 오전 9시에 발표한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수험생 일부와 학부모들이 건물 앞으로 모였다. 120명의 합격자 명단이 벽에 붙었다.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환호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와야 할 이름이었기에 모든 이들의 관심사는 불합격자 두 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무심히 합격자 명단을 훑어보던 난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낙방하는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단 말인가?'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여기서 내 인생 종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중에 합격자 명단 끝에 자투리 종이가 붙었다. 보결생 명단이었다. 두 학생의 이름이 붙었는데 첫 번째 이름이 내 이름이었다. '보결생'이란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 '장학생'으로 착각한 나머지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결로 합격했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더 큰 문제는 수석 보결생의 타이틀을 얻어 입학한 시골 중학교에서 내가 점점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이 지나갔다. 학년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어머니는 용단을 내리셨다. 나의 교육을 위해 안흥보육원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는 모자 가정을 위한 시설에 방을 얻고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보내준 재봉틀을 얻어 의류수선을 시작하셨다. 수년 동안 놀아 노는 것이 지루해질 무렵 시작된 새로운 생활은 나의 학교생활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그 시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가난과 고통의 빗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기도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비로소 바느질을 끝내고 잠자리에 누우시던 어머니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를 하셨다. 그 시절 어머니의 처절한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라기보다 좌절하지 않도록 자신을 격려하는 기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5) 대입시험문제지 복사해 팔며 '교수의 꿈' 키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다가왔다. 취업을 한다 해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머지않아 군대에 가야 하는 문제도 있었기에 취업보다는 대학 진학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일어나 기도하는 소리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면서 차츰 철이 들었고 공부도 하느라 해서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았지만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다.
건국대학교 농업교육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농업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학과니 인기도 별로 없을 것 같고 그해 처음 생긴 학과여서 미달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더구나 농고에 다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서 접수 마감 결과 경쟁률이 1.3대 1이었다. 낮은 경쟁률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떨어져야 할 상황이었다. 떨어질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까지 다녀온다는 것이 무모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날 새벽 떨어질(?)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기차를 탄 것은 내 인생에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험장에 도착해 1교시 시험이 시작되면서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다. 결시생들이 발생해 경쟁률이 0.8대 1로 미달된 것이다. 합격이 보장된 행복한 시험이었다. 살아가면서 간혹 이런 상상도 해본다. '내가 만일 떨어질 것이 두려워 그날 아침 시험장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 날 새벽, 망설임 끝에 선택한 순간의 결정이 내 인생 행로를 극적으로 바꿔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봄철 꽃봉오리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랑의 빵' 모금으로 잘 알려진 한국월드비전에서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주었기에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일 새벽 6시 30분, 하루 한 번뿐인 서울행 아침 열차를 타고 왕십리역에서 내려 건국대학교까지 걸어갔다. 같은 과 친구들은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하는 나를 매우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를 과대표로 뽑아주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사연을 학과장 교수가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군 고생스럽게 통학하지 말고 내 연구실에서 지내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대학건물에서 학창생활을 시작했다. 통학시간을 공부하는데 투자할 수 있었다.
대학 1년 과정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고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짐 꾸러미에서 지난해 치른 입학시험문제지를 발견했다. 전년에 출제된 문제를 과목별로 다시 적어 등사기로 밀었다. 원서를 접수하러 오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대학교문 앞에 좌판을 벌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저녁이면 양쪽 바지 주머니 속에 지폐가 가득했다.
시험지 장사는 다음 겨울방학에도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새 경쟁자가 생겨났다. 나보다 싼값으로 시험문제지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정문을 지키던 수위들이 교문 앞 잡상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까칠하게 굴던 수위아저씨가 그날따라 언짢은 일이 있었는지 단속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수위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뒤척이며 생각해낸 것이 대학 교수가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이 대학의 교수가 된다면 오늘 나를 조롱하던 그 수위는 내가 교문을 지나칠 때마다 거수경례를 하겠지. 그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당당하게 교문을 지나는 나는 얼마나 쾌감을 느낄까.' 이런 생각이 유치하게 보이지만 약자가 되면 유치하리만큼 사소한 것들에 인생을 걸기도 한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6) 궁핍한 대학생활… ROTC 임관 '늑막염'으로 좌절
대학교 2학년이던 1967년 7월,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더위를 피해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바캉스를 즐기던 그 여름, 나는 대학신문사 편집장이던 농화학과의 황형, 대학방송국장이던 축산대학의 윤군과 공과대학 건물에 있던 학교 방송실에서 생활했다. 그때 우리는 잠자리로 건물 옥상을 주로 이용했다.
우리는 식량이 떨어져갈 즈음이면 주머니를 털어냈고 그래도 여의치 않을 때면 닥치는 대로 일해 끼니를 장만했다. 쌀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공사판에서도 일했다. 며칠째 비가 내려 공사판 일은 중단되고 어디서 식량을 구해야 할지 막막하던 어느 날이었다. 황형과 윤군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갔고 결국 건물엔 나 혼자만 남았다. 끼니를 굶어본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때처럼 몸을 추스르기조차 힘겨운 적은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쌀자루를 탈탈 털어보니 겨우 한 줌 정도 모아졌다. 냄비에 담아 벌겋게 달아오른 전열기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냄비가 나뒹굴고 쌀은 시멘트 바닥에 쏟아졌다. 젖은 손으로 전열기에 냄비를 올려놓다가 감전이 되는 바람에 냄비를 엎은 것이다. 한동안 흩어진 쌀알들을 망연자실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흩어진 쌀을 한 알 한 알 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울컥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이 감정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치 어린시절 고향 하늘의 별을 세듯 쌀알을 세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낡거나 흐려지지 않는 나의 기억이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3학년이 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ROTC 후보생(8기)이 되었다. 대학 생활과 군사 훈련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1, 2학년 때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500명당 한 명꼴로 대학에 배정된 5·16장학금(현재의 정수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제 대학 건물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학교 주변에 월세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까칠한 수위에 대한 복수의 길이 점차 넓어지는 것 같았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라. 지금 이대로라면 내가 교수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내 인생의 빗줄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9년 12월 22일 오후. 수도육군병원에서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ROTC 임관 신체검사에서 늑막염이 발견되어 임관 불가 판정이 났다는 통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2년 전 ROTC 입단 신체검사 때 지원자들 가운데 최초로 완(完)자 판정을 받은 나였다. 꿈같아서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현실이었다. 쪼들리는 시간을 쪼개고 힘겨운 생활을 연장해가면서 지난 2년 동안 여름방학이면 병영훈련을 받고,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총을 들고 훈련에 임하던 그 수고와 노력이 날아가고 만 것이다. 함께 훈련 받았던 ROTC 후보생 가운데 낙오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영양실조에 과로까지 겹친 결과였다.
그토록 절망적이던 순간 본능적으로 지금껏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찾았다. 내 인생 행로에 직진의 파란 신호등 대신 잠시 기다리라는 노란 신호등을 켜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목적지에 이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아픔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의 여정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늑막염이 불치병에 걸려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넷이란 젊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7) 병세 호전됐지만 임관 못하고 이등병 입대
1971년 10월 15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문교부와 국방부 공동으로 대학생 군사교육 문제를 놓고 전국 대학총·학장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탄원서를 들고 갔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그길로 나가 중앙청 주변 목공소에서 피켓을 만들어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나는 출동한 중앙청 경비대에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호송됐고 유치장에서 그날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즉결심판에 넘겨지기 직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종로경찰서 출입기자 4명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들에게 그간의 억울함을 털어놓았다.
"나는 대학에서 2년간 ROTC 후보생으로 훈련받았던 사람입니다. 임관을 앞두고 질병 때문에 임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임관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제 병세가 회복되어 입대 영장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2년간 훈련과정을 모두 무효로 하고 논산훈련소 신병 과정부터 시작해 사병으로 모든 복무 기간을 마쳐야 한다는 국방부의 조치를 받은 것입니다."
ROTC 제도가 생겨난 이후 지난해까지 나처럼 질병에 걸려 임관할 수 없는 경우 ROTC로 복무하는 기간만큼 하사로 복무하도록 되어 있는데 갑자기 과거 훈련 과정에 대해 아무것도 인정해주지 않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금년부터 제도가 바뀌었다면 그 규정은 새로 훈련받는 사람들부터 적용돼야지 규정을 소급 적용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그래서 1인 시위까지 벌이게 된 것이다.
대학시절 교련 교육을 이수한 사람도 복무기간을 3개월 단축해주는데 2년간 ROTC 훈련을 받아온 사람에게 그간 훈련 과정을 단 하루도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응암동에 있는 지방법원으로 넘겨져 결국 즉결심판에서 벌금을 물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녁나절 몇몇 신문에 나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어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당시 내 사례는 5·16 이후 미국 대학생들에게 실시되는 예비역 장교 양성 제도를 국내 대학에 들여온 ROTC 사상 최초의 억울한 희생 사례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날 겪었던 부당한 제도의 폐해는 다행스럽게도 이듬해 개정되었지만 새로 개정된 제도는 그 효력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장교 훈련을 마친 나는 논산훈련소에 입대해 신병 훈련을 받았으며 복무기간을 모두 채우고 전역해야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뒤인 스물다섯 살에 비로소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다. 장교 훈련을 마친 내가 나이 어린 병사들 틈에 끼여 군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1주일에 한 번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편지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편지 내용은 대부분 성경을 인용한 것이었다. 특히 욥이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원치 않는 어려움을 인내한 결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구약성서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어머니 편지는 우체국에서 우표 열 장을 사서 한 장은 편지에 붙이고 나머지 아홉 장을 동봉해주시던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내가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다. 나의 마음 시린 군생활 3년을 데워준 것은 내무반의 난로보다 따뜻함이 묻어나던 어머니의 편지들이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군생활을 하는 나에게 출애굽기며 창세기고 잠언이다.
새벽마다 교회에 갈 수는 없지만 한 주일에 두세 번은 탄약고 주변의 말번 보초 근무를 서고 돌아오는 길에 군인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철모랑 총을 벗어놓고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8) '입양아' 심부름 조건 美유학 항공권 얻어
1974년 11월 28일. 3년 가까이 복무한 군 생활이 끝났다. 제대하는 날 곧바로 서울대학교가 있던 동숭동에 갔다. 대학원 입학원서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경제적인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3년 가까운 군 생활을 마치고 받은 제대비 5000원으로 입학원서를 산 후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 동두천으로 향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대학원 준비를 했었고 무난히 합격했다. 1975년 서울대 대학원의 입학금을 포함한 첫 학기 등록금은 8만3950원이었다. 등록금을 걱정하던 그때 정부정책으로 학자금 융자제도를 실시한다는 가뭄에 단비 같은 뉴스가 전해졌다. 같은 교회 집사님께서 보증을 서주어서 등록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인생의 수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주셨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입주 가정교사로 받은 돈으로 책을 사고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은행융자를 갚아나가기에 부족했다. 연체가 되자 나는 물론 보증인에게까지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대학원에서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 다시 한국월드비전 장학금을 받게 됐다. 대학 4년간 받아온 월드비전 장학금을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받은 것은 당시 월드비전 이윤재 회장님 덕분이다. 힘겨웠던 나의 대학 시절을 지켜보았던 그가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월드비전 병원을 통해 치료받도록 도와주셨다.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밀어준 도움의 손길이었다.
모교인 건국대 사범대학에서 조교 자리도 얻어 다소간 생활의 여유를 찾았다. 그렇게 석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 신분이긴 하지만 대학 강단에도 섰다. 강의에 대한 설렘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고정 수입이 없었기에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때마침 정수장학회(당시 5·16장학회) 동창회의 간사를 맡으면서 고정 수입이 확보돼 미국 유학준비에 착수했다. 1년의 준비 끝에 드디어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대학교로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1980년 12월 중순이었다. 2주 뒤면 미국에서의 대학 학기가 시작되는데 생활비는커녕 비행기표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학생 비자를 받아들고 미국대사관을 나와 광화문 지하도를 힘없이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구약성서 창세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 그는 아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아버지 우리가 제사를 드리러 산에 가고 있는데 제사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지요?"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제사에 쓸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래 그거야. 내가 미국에 가서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준비해 놓으실 것이다.' 이 믿음만 간직하면 나의 유학 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학창시절 수많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던가. 어차피 빈손으로 시작한 인생 또 한번 부딪쳐보리라.
며칠 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미국에 입양되는 아이들을 에스코트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았다. 두 아이는 하와이 공항까지, 세 아이는 로스앤젤레스(LA)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미국행 왕복 비행기표를 제공 받는 행운(?)을 잡았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9) 장학금은 꿈도 못꿀 상황에 내앞에 다시 구세주
1981년 1월 4일. 미국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희뿌연 하늘에 눈발이 펄펄 날렸다. 앞으로 전개될 험난한 유학 생활의 전주곡 같았다. 비장한 각오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첫 학기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흡사 링 위에서 노련한 선수에게 얻어맞는 신출내기 권투선수 같았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코피가 줄줄 흘렀다.
시카고의 첫 겨울에는 한국에서 기대하던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등록금 내고 방을 얻고 남은 돈은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병과 함께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주일이면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건만 광화문 지하도 속에서 약속해 주셨던 하나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1라운드가 끝나고 내게 날아든 성적표는 그야말로 부시시(B,C,C)했다. 유학 오기 전 미국 학생들은 매일 춤이나 추고 맥주나 마시며 연애나 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가난한 우리나라에서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대학에 다녔는데 부자 나라인 미국에 와서 설마 등록금 걱정이야 하겠는가라고 내심 여유를 부린 게 사실이다. 그런 나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우선 수업방식이 한국과 너무나 달랐다. 한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수업시간에는 주어진 토픽에 따라 논리 정연한 토의에 참가할 수 있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암기식 교육과 정답 찾기 훈련에 길들여진 내가 논리적 사고와 언어훈련이 잘 된 미국 학생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2학기가 문제였다. 장학금을 받거나 조교 자리를 얻어야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으련만 그 학점 가지고는 어디 가서 말도 꺼내지 못할 입장이 된 것이다. 여름방학동안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근근이 먹고사는 문제나 해결할 정도일 뿐 등록금을 해결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노동허가서가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구질구질한 일들로 버텨가던 어느 날 이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크나큰 모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른 아침, 서둘러 사범대학 학장실을 찾았다. 학장님을 만나기 전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커닝 페이퍼 작성하듯 요점을 정리했다. 그의 출근을 기다리며 기도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수많은 기도를 해보았지만 그날의 기도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 뒤 학장님이 출근하셨다.
"학장님, 전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한국 최고의 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이제 보다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 대학에 유학을 왔는데 지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그 순간 무너져 내리는 하늘 위에서 구세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샘, 부산에 가보았나요?" 그는 내 이름을 미국식으로 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부산은 왜 묻는단 말인가. 하긴 부산에 가보긴 했다. 신혼여행이랍시고 부산 자갈치시장에 가서 장어구이도 먹어보았다고 말했다. 구세주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해군장교로 부산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참으로 고맙게도 내가 대답하기 좋은 질문만 해주었다. "당신은 크리스천인가요?" 신바람이 난 나는 학장님을 만나기 위해 복도에서 기다리며 하나님에게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비서를 불러 장학금 신청서를 건네주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0) 전과목 성적 'A' 받고 조교로… 월급 받으며 공부
하나님의 도움으로 등록금 문제가 해결된 후 고마운 학장님께 뭔가 보답해 드리고 싶었다. 장학금을 받을 만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성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었다. 일단 지난 학기보다 3학점 많은 12학점을 신청하고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불빛이 깜박일 무렵 집에 날아든 성적표에 A자 4개가 보기 좋게 찍혀 있었다. 전 과목 A학점을 받은 것이다. 성적표를 받던 날 학장님은 나를 미국 교육학계의 거장 월버그(Herbert J Walbeg) 박사에게 소개했고 월버그 박사는 나를 연구조교로 채용해주었다. 이로 인해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매달 700달러를 급여로 받게 됐다. 그때부터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매달 100달러씩 보내드리는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조교로 임명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하던 날 아침이었다. 지도교수 연구실 바로 옆에 있는 조교 사무실 문을 열려는 순간 문에 붙은 내 이름을 발견했다. 문에는 나를 포함한 5명의 조교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알파벳 순서도 아니고 대학원 입학 순서도 아닌데 어떤 기준으로 내 이름을 맨 위에 붙여 놓았는지 궁금했다. 다른 조교에게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건 일이 서투르고 적응이 필요한 신참을 격려하기 위한 교수님의 배려 때문이야. 너도 여기서 생활하다 보면 언젠가 다른 사람을 격려해줘야 할 때가 올 거야. 그때 다른 사람 이름을 네 이름 위에 붙여주도록 해."
월버그 박사의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분에게 받은 감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내 이름 위로 후배 조교 두 사람의 이름이 붙을 즈음, 교육학 학술지에 월버그 교수와 우리 조교들의 공동연구 논문이 게재되었다. 학술지를 받아봤을 때 미국 학술지에 내 이름이 처음 실렸다는 기쁨보다 당연히 맨 처음에 적혀 있어야 할 지도교수 이름이 우리 조교들 이름 중간에 끼어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컸다. 직위에 관계없이 그 논문을 시작해 마무리할 때까지 기여도가 큰 사람부터 이름이 게재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놀랍고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월버그 박사를 비롯한 교육학자들이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을 때의 일이다. 발표와 토론이 자꾸 길어져 많이 지연되고 있었다. 월버그 박사가 내 자리로 다가와 단상으로 올라가 발표자나 토론자들이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면 경고 종을 울려 달라고 주문했다. 발표회장 어딘가에 벽시계가 붙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상에 올라갔는데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내게 그는 당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건네셨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마스 시즌, 조교 사무실 내 책상에 카드 한 장과 조그만 선물상자가 놓여 있었다. 지난번 학술발표회장에서 당황스런 부탁을 해서 미안했다는 월버그 박사의 카드와 함께 당신이 차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교육의 첫걸음은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이라던 그분의 평범하지만 뜻 깊은 가르침은 언제나 따뜻한 마음과 섬세한 배려를 잃지 않고 제자를 감동시키는 스승의 모습 자체였다.
유학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아이들 문제였다. 시카고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무렵 딸아이 수정이가 세 살, 아들 경인이가 두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다. 나와 아내가 각각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맡길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수정이는 시카고한인봉사회가 시카고시의 재정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탁아소에 맡길 수 있었지만 경인이는 너무 어려 돈을 주고 개인 가정에 맡겨야 했다.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1) 두살배기 아들 아침마다 헤어지지 않으려 울어
미국 시카고 유학시절의 아픔이 하나 있다. 지금도 아내가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을 생각하면 가슴앓이를 하는 일이다.
세 살이 된 수정이는 탁아소 앞에 내리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내 옷을 꼭 잡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곳 생활에 빨리 적응해 갔다. 문제는 두 살 된 경인이였다. 아침에 아기 돌봐주는 집에 경인이를 맡길 때, 녀석은 돌아서는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한참동안 울었다. 학교 가서도 아이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경인이를 외갓집에 보내기로 했다. 당시 아내가 여행사에 다녔는데 한국을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사례비 100달러를 주고 경인이를 김포공항까지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착잡했다.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낯선 사람과 12시간 이상 비행기에 태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가며 유학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기도 했다.
다음날 경인이를 데리고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으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와 아내의 마음은 형용키 어려운 슬픔에 젖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이 가까워오자 경인이를 한국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경인이를 낯선 아저씨에게 넘겨주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말없이 눈물만 닦아냈다.
집에 돌아오니 후회뿐이었다. 그날 우리 부부는 학교와 직장에 나갈 생각도 잊은 채 벽시계를 쳐다보며 지금쯤 비행기가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하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경인이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외갓집에 잘 왔다는 연락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비행기에서 아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외할아버지와 함께 열흘이 넘도록 안과에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후회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를 한국에 보내고 2주가 지났을 무렵 아내가 다니던 여행사가 파산을 하는 바람에 아내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괜스레 아이만 한국으로 보낸 꼴이 된 것이다.
아이가 보고 싶어 눈물로 지새던 아내가 한국에 있는 경인이를 데려와서 다른 집 아이와 함께 돌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 가족이 헤어져 살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경인이를 데리고 있을 바에야 다른 집 애를 함께 봐주면 돈도 벌 수 있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나갈 때처럼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어와야 할 판이었다. 꼭 6개월만의 일이었다. 우리는 경인이가 한국에서 돌아오는 전날 밤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전과 달리 기다림의 밤이었기에 잠을 못 자도 행복했다. 경인이가 김포공항을 떠날 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 아빠를 만나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경인이는 낯선 아주머니를 이모라고 부르며 배웅 나온 할머니에게 인사까지 하며 떠났다고 했다.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 경인이를 태운 비행기가 도착했다. 입국 수속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점퍼를 입고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경인이의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머리를 짧게 깍은 경인이를 확인하는 순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 6개월 동안 저 어린아이를 먼 곳에 보내놓았던 부모의 죄책감의 눈물이고 그리움의 눈물이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말고 살아야지,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가족이 함께 겪고 이겨내리라 다짐했다.
이제 두 아이 모두 성장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경인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베트남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다. 수정이는 미국 보스턴대학 로스쿨, 조지타운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후 국내 굴지의 법률회사에서 공정거래 담당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가 되면 당시 유학생 부모의 힘겨웠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2) 박사 과정 마지막 1학기 남기고 뜻밖 위기
1984년 1월 1일. 이른 아침 딱정벌레 모양의 폭스바겐 비틀에 기네스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들처럼 이삿짐을 차곡차곡 실었다. 조그만 차에 19인치 컬러TV 이불 취사도구 등을 싣고, 뒤쪽 꽁무니에는 애들 자전거 두 대를 달았다. 그 작은 차에 네 식구가 탔다. 출발부터 눈 속을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낡은 차를 밀어주던 시카고의 이웃 사람들을 뒤로하고 박사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향했다.
자동차들이 털털거리며 달리는 우리 자동차를 앞질러가면서 모두 웃었다.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사흘 만에 플로리다의 주도 탈라하시에 도착했다. 플로리다주립대학교 기혼자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플로리다의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고 잘 풀렸다. 학과에 배정된 예산이 남아 등록금을 보조받을 수 있었던 뜻밖의 횡재가 그랬고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두 달 동안 돈버는 일을 하지 않고 학교와 집을 오가고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 여유도 누렸다.
하지만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팔자를 타고나지 못한 내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닥쳤다. 중국식당에서 일하는 아내의 벌이만으로 우리 식구의 생활을 꾸려나가기는 어려웠다. 탈라하시에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우리나라 도깨비시장처럼 쓰던 물건을 사고팔았다. 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일요일은 교회에 가야 하기에 토요일만 장사를 했다. 장사 경험이 생기자 다른 유학생과 함께 화물차를 빌려 차로 6시간이나 떨어진 항구도시 세인트피터즈버그에 가서 물건을 사오며 물건을 팔았다.
그러던 중 사범대학 부속 연구소에 조교 자리를 얻었다. 등록금이 해결됐고 급여도 받을 수 있으니 행운이었다. '해가 나있는 동안 풀을 말려라'라는 미국 속담처럼 이참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학업에만 열중해 가능한 한 빨리 공부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생활을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여름방학에도 학점을 취득했다. 다행히 내가 물을 말리던 기간에는 비가 내리는 날도 구름이 끼는 날도 별로 없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필요한 것들을 넉넉히 채워주셨다.
이듬해 여름 박사과정에 필요한 모든 학점을 취득하고 내 일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박사학위 취득 종합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수요일 하루만 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에 8시간씩 실시되었다. 이 시험에 합격해 한 달 뒤 구술시험을 보았다. 그렇게 종합시험에 합격해 박사학위 논문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 계획서가 논문 심사를 위해 구성된 교수단에게 승인받아야 비로소 논문을 쓰는 것이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전되었고 방학을 반납하고 계절학기 수강을 계속한 결과 1987년 1학기가 끝날 무렵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가면서 절박한 상황을 몇 번쯤은 겪게 마련이다. 학창시절 내내 가난을 운명처럼 달고 지내온 내가 가장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은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때였다.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연구조교를 하며 등록금을 면제받고 생활비 일부를 보조받아 근근이 유학생황을 꾸려가던 때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외국인이 조교를 할 경우 플로리다 출신 학생들에 준하는 등록금은 부담해야 하는 규정이 생긴 것이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1000달러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액수지만 그때 내게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3) 국내 교수 채용공고에 3만5000피트 상공서 기도를
미국에서 돈을 빌릴 곳도 없었지만 한국에서 돈을 보내줄 사람도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며칠이 지났다. 등록마감일이 다가오던 날,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도움을 청한 곳이 미국의 월드비전 본부였다. 전화번호를 뒤져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 있는 월드비전 본부의 주소를 알아내어 그곳 회장님께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무니햄 회장님. 저는 한국에서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 유학을 온 학생입니다. 가난하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한국 월드비전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저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아들을 에스코트해주는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얻어 미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에 조교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제가 다니는 대학의 등록금 규정이 바뀌어 학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은 지금, 등록해야 할 1000달러를 도와주거나 빌려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청하오니 저의 어린 시절부터 도움을 준 월드비전이 풍요의 땅 미국에서 제 꿈이 좌절되지 않도록 내 인생에 한 번 더 징검다리를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나의 절박함이 전해졌나보다. 며칠 뒤 등기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위기의 순간에 징검다리를 놓아달라는 한국인 유학생의 간절한 편지에 회장님 사모님께서 격려의 편지와 함께 100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니햄 회장께 보낸 편지는 신임 회장 테드 앵스트롬(Ted W. Engstrom) 박사가 읽어보고 1000달러 수표를 보내준 것이었다. 이제 고인이 된 앵스크롬 회장님과 격려편지를 보내주신 사모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등록금을 내기 전에 복사 가게에 들렀다. 그 소중한 수표를 복사했다. 수표를 등록금 창구에 내고 나면 절박한 순간의 흔적이 사라져 버릴까 싫어서였다. 유학시절 가장 절박한 순간인 마지막 학기에 도움을 받은 수표는 언젠가 어느 누구에겐가 돌려주어야 할 '마음의 빚'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 책상서랍에는 그때 복사해 놓은 수표가 들어있다.
박사학위 논문이 끝나갈 무렵, 내가 목표로 한 건국대학교에서 교수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드디어 도전의 순간이 다가오는구나.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며 고생을 참았던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까.' 각종지원 서류와 논문들을 챙겨 건국대학교 교무처로 우송했다. 초조하게 몇 주를 보내던 무렵 전화가 왔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지원자 아홉 명 가운데 1차 서류 심사와 논문 실적 심사에서 세 명을 선발해 면접한다는 내용이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신용카드 할부로 비행기표를 장만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심신이 피로했지만 무수한 상념이 떠올랐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것 같았지만 나에겐 절박한 기도였다.
"하나님! 제가 드리는 기도는 지난날 지상에서 하던 기도와 달리 3만5000 피트 상공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제껏 힘든 순간마다 도움을 청했던 기도가 어떤 것은 응답을 받고 어떤 것은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제게는 다시는 일어날 힘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 목사님들은 말합니다.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그런데 지금 저는 도저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역경의 열매] 오성삼 (14) 교수부임 첫 사업으로 '외국인 근로자 일요대학'
하나님께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가 3만5000피트 상공에서 드린 기도를 들어 주셨다. 1987년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교육프로그램평가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고 몇 년 뒤 첫 보직으로 평생교육원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동두천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 정류장에서 외국인 근로자가 차에 오르며 어눌한 우리말로 물었다. "미아리까지 가려고 하는데 요금이 얼마인가요?" 피부색이 검고 남루한 작업복을 입은 외국인 근로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버스 기사는 다른 승객들이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욕을 하며 뒷좌석으로 가라고 했다. 저들도 요금을 내는 승객인데….
그 순간 시카고에서 시내버스를 타던 기억이 났다. 미국에 도착해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던 첫 토요일, 나는 시카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그때 나 역시 미국인 버스 기사에게 다운타운에 있는 시어스 타워까지 가는 데 요금이 얼마인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미국인 버스기사는 나의 어눌한 영어와 다소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보며 나를 안심 시켰다. 자기 뒷좌석이 비어 있으니 앉아서 창밖 구경을 하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때 버스 기사의 친절함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다음날 오후 총장실 문을 두드렸다.
"총장님. 제가 일요일이면 건국대학 주변 뚝섬유원지를 지나 교회에 가는데, 외국인 근로자들이 뚝섬유원지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공장이 쉬는 일요일에 할 일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지요. 일요일에 굳게 잠긴 대학 강의실 문을 열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모아 가르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제가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총장님께 일요일마다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국어와 역사 문화를 가르치고 가끔 문화 탐방을 떠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억울한 일을 당한 외국인들을 위해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교과서를 만들어 무료로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점심은 대학 구내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대학병원을 설득해 무료진료 프로그램도 접목하는 것도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의 열정에 찬 이야기를 듣던 윤형섭 총장님이 물었다. "오 원장 좋은 생각이긴 한데 거기 들어가는 예산을 어떻게 조달하지요? 더구나 매주 일요일 그들을 가르칠 교수진은 또 어떻게 구성할 수 있겠어요?"
나는 잠시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총장님 저는 이제껏 사람들이 감동하고 하늘이 감동하는 일이라면 필요한 돈은 하늘이 내린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습니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를 믿고 맡겨주세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윤 총장님이 거절할 분이 아님을 잘 알기에 소신대로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날 '하늘이 감동하는 일은 하늘이 돈을 내린다'는 말은 내가 한 이야기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의 입을 빌려 하신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의 '외국인 근로자 일요대학'이다. 나의 기대처럼 하늘의 응답이 오기 시작한 것일까. 계획이 발표되자 코리아헤럴드 외국인 여기자가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다. 기사가 실린 뒤에는 기사를 읽은 외국인 한 분이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블라디미르 타호노프(박노자) 교수였다.
"원장님! 저는 박노자란 사람인데 러시아 출신이고 현재 경희대학교 객원교수로 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통해 소식을 알았습니다. 감동적인 프로그램인데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5) "한국어 배우자" 외국인 근로자들 전국서 몰려
외국인 근로자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학생들이 16개국 200여명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주 6일 근무였는데, 하루 쉬는 일요일을 반납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강의를 해주겠다고 지원한 교수들의 이력서가 87통이나 접수되었다. 박노자 교수를 비롯한 8명을 일요대학 교수로 선정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들이 강의료 한 푼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돈을 써가며 강의를 했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는 점이다.
교수진의 열정과 학생들의 참여가 어우러져 외국인근로자 일요대학은 1997년 5월 출범했다. 멀리 대구에서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새벽기차를 타고 올라왔고, 토요일 야근으로 밤샘을 한 뒤 학교에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학생 수가 늘었다. 건국대학교 대학병원의 전신인 민중병원은 외국인근로자들의 무료 건강검진에 참여했다. 당시 파업을 하던 병원노조가 일요일을 반납하고 이들의 건강검진을 위해 하루 종일 의료봉사를 해주기도 했다.
외국인근로자 일요대학은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지만 그중 '외국인 근로자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많은 사회단체들이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 가정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하지만 당시엔 외국인 근로자를 한 곳에 모이게 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 심시위원으로 참여한 선생님들이 원고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코리언 드림을 안고 힘겹게 찾아온 그네들이 한국에서 경험한 사연이 대부분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그리워하는 사연, 한국인 고용주에게 학대받는 사연, 피부색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받는 모멸감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말하기 대회 원고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10명의 원고가 최종 심사를 통과했다.
그런데 최종 심사를 통과한 방글라데시 출신의 샤하눌 이슬람이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 단속 나온 법무부 직원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며칠째 수감된 그를 면회 갔을 때 그는 "선생님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얼마 안 있으면 제가 추방된대요"라고 말했다. 면회를 마치고 교도소 관계자와 면담을 했다. 수감된 우리 학생이 이번 토요일에 열리는 한국어 말하기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특별조치를 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다.
1997년 11월 30일. 외국인근로자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국내 방송사와 신문사의 취재진들이 모였다. 최종 본선에 나선 외국인근로자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그들이 한국사회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행사를 마무리하는 나의 스피치 시간이 됐다.
"오늘 저는 말하기 대회를 앞두고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의정부교도소에 구금된 여러분의 친구 샤하눌 이슬람이 제출했던 원고를 대신 읽고자 합니다."
'저는 어려운 일 더러운 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6개월째 월급도 못 받고…봉급을 달라고 하면 사장님은 '너희는 불법체류자야 알아?' 하며 소리치고 우리 모두 같은 아시아 사람인데 마음에는 국경이 없는 것 아닌가요'
이번 말하기 대회의 우승을 꿈꾸며 그가 제출한 원고를 대신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장내는 숙연해졌다. 이곳저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누가 시작했는지 빈 과자 상자를 돌리며 샤하눌 이슬람을 위한 모금이 시작됐다. 그날 행사는 방송과 신문에 비중 있게 보도되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 항의전화가 왔다. 국가기관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단속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대학이 불법 체류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6) 일요대학 외국인들 "DMZ 땅굴을 보고싶어요"
'외국인 근로자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끝난 며칠 뒤, 대회에서 1등을 한 나이지리아 출신 악슨 프랑켄이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님, 상금 50만원 가운데 25만원은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어요. 나머지 25만원은 일요대학의 어려운 학생을 돕는 데 써 주셨으면 해서 가지고 왔어요." 그에겐 큰돈이었을 텐데…. 마침 같은 국가에서 온 토니 오조피아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 방울토마토 재배하는 것이 꿈인 그는 공장에서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온 이후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나이지리아로 돌아갈 비행기 표조차 살 돈이 없었고, 일하던 중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후 부당한 해고까지 당했다.
프랑켄이 전해 준 봉투를 받아든 오조피아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린 손가락을 붕대로 감은 채 병원도 못가고 진통제 몇 알로 견디고 있는 그를 보며 나이지리아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의정부에 가서 손광운 변호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딱한 사연을 들은 손 변호사가 공장주를 상대로 무료소송을 진행해주었고 결국 승소판결을 받아 밀린 급여와 상해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손마디가 잘린 것에 비하면 충분한 보상은 아니지만 그는 만족해했고 그 정도 금액이면 나이지리아에 가서 조그만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며 한 많은 대한민국을 떠났다.
나는 졸업을 앞둔 일요대학 학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들이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 때 건국대학교의 일요대학 선생님들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고국에 돌아가서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바랐다. 설문을 통해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알아보았다. 예상과 달리 1위는 비무장지대에 있는 땅굴이었다. 그곳에 가려면 비무장지대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신분증이 필요한데 외국인 근로자에게 신분증이 없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던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살던 그들이 좀처럼 방문할 수 없던 땅굴 견학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졸업여행을 도와 준 분은 국군기무사령부의 오세인 대령이다. 그는 전방 사단 기무부대에 연락해서 우리 졸업여행단 버스를 에스코트하도록 지시했다. 철원평야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기 위해 철책을 통과하는 순간, 버스에 나누어 탄 외국인 근로자 200여명이 환호성을 질렀다.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1997년 겨울, IMF 외환위기 충격이 온 나라를 흔들 때마다 실업자들이 생겨나고 경기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앞두고 있었지만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을 찾는 발길이 끊겼다. 일요대학의 제1회 졸업식을 앞둔 12월 21일, 일요대학 학생들과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정신지체아 수용시설 다니엘복지원을 방문했다.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이 제과제빵과정 실습장에서 구워낸 빵을 매일 무료로 전해주던 곳이다.
일요대학을 졸업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저마다 자기네 나라 음식들을 장만해왔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모금함에 넣었던 돈으로 복지원생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했다. 산타복장을 한 외국인근로자 한 사람이 가져간 선물을 나눠주었다. 복지원 방문은 일요대학의 졸업식 시간에 맞춰 끝났다. 아무도 축하해줄 사람이 없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졸업식장에 복지원생들이 함께 참석해 졸업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졸업식 노래가 옛날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듯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7) 교장 부임후 첫 실험 "가장 긴 점심시간을 주자"
2004년 여름, 대학 재단으로부터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교육학자로서 일선 학교현장을 경험하고 강의실로 돌아와 졸업 후 교사가 되기를 꿈꾸는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원 학생들에게 실제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했기 때문이다.
국제교육진흥원장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당시 공개채용을 통해 교육인적자원부 기관장이 되었기에 이임 인사를 하기 위해 안병영 장관을 만났다. "오 원장, 고등학교로 간다면서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어요."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에겐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장관님, 저는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 제게 찾아온 뜻밖의 행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국제교육진흥원장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입니다. 교육학을 강의하는 제가 잠시 교과서를 내려놓고 일선 학교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됩니다."
2004년 8월 1일, 건대부고 교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학교 분위기 쇄신과 학교 발전을 위한 점검의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 구성된 부장 교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교육부에서 공식일정을 잡아 주었고, 붉은 카펫이 깔린 교육부 대회의실에서 브리핑을 해주었다. 우리 일행에 대한 중국 교육부의 파격적인 대우는 내가 얼마 전까지 교육인적지원부 국제교육진흥원장으로 일하면서 주한 외교관들과 업무적인 교류를 한 덕분이었다. 다음해,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중국 저우지 교육부 장관이 공식 일정 가운데 시간을 내어 건대부고를 방문하기도 했다.
건대부고 교장으로 취임하고 조금 지났을 때였다. 점심시간이면 18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급식을 받기 위해 학년별로 줄을 서곤 했다. 길지 않은 점심시간에 전체 학년이 점심식사를 마쳐야 했고 전교생이 점심식사를 하고 나면 곧이어 5교시 수업 시작종소리가 울렸다. 교사와 학생 모두 빠듯하게 돌아가는 고등학교 생활에 여유를 주고 싶었다.
교사들과 의논 끝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점심시간을 시도했다. 식사 시간 30분에 자유시간 60분. 서울 시내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점심시간을 90분으로 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대학입시를 향해 한 시간이라도 더 공부를 시켜야 하는 상황에 학부모들의 반응은 어떨까 궁금했다. 점심시간이 길어진 이후 학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나무 그늘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를 하고 체육관에서 탁구를 즐기는 학생들로 교내에 생기가 넘쳤다. 반면 갑작스레 길어진 점심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스러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을 위해 별도의 프로그램개발이 필요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오케스트라 연주 탈춤공연 사물놀이 등을 마련해 준다면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고등학생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고 문화공연을 향유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학생들의 점심식사가 끝나면 미8군 밴드가 교정 느티나무 아래서 공연을 시작했다. 학교현장의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은 가정에서 학교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시큰둥하던 학생들이 부모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나게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활기를 찾고 즐거워지면서 건대부고의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8) "학생에게 자율성을"… 4色 교복을 자율 선택하게
건대부고의 여름교복을 결정하기 위해 학부모 대표들과 담당 부장교사를 비롯한 학교운영위원 남학생과 여학생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장기 고등학생들의 조이는 불편한 여름 교복을 활동이 간편한 티셔츠 형태로 바꾸기로 했고, 이날 4가지 색상의 티셔츠 교복 샘플이 배달됐다. 티셔츠를 선보이자 반응이 각각이었다.
교사와 학교운영위원들은 단정한 흰 색, 학부모들은 세탁에 신경이 덜 쓰이는 짙은 감색, 여학생대표는 핑크색, 남학생대표는 베이지색이 무난하다고 했다.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댔다. "왜 학생들의 교복은 언제나 흰색 아니면 어두운 색이어야 하나요. 교복은 우리가 입는 옷이니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주세요. 핑크색 티셔츠를 교복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절대로 안돼요. 어떻게 남학생들이 핑크색 교복을 입겠어요."
좀처럼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이쯤에서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교장인 저에게 결정 권한을 위임해주면 어떨까요?" 눈에서 눈으로 전해지는 그들의 메시지를 의식하며 이야기했다. "금년부터 우리 학교의 여름교복은 여러분이 원하는 4가지 색깔로 정합니다. 각자 취향대로 골라 입도록 하세요. 이의 없죠?" 그래서 4가지 색의 티셔츠로 디자인된 건대부고의 여름교복은 '유니폼'이 아니라 '멀티폼'이라고 불렸다.
새 여름 교복을 착용하는 첫날 아침, 학교 건물 5층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흰색과 핑크색 노란색에 가까운 베이지색 감색 티셔츠를 착용한 남녀 고등학생 1800여 명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교문에 들어서는 모습은 잠시 학교가 코스모스 활짝 핀 들판으로 변한 것 같았다. 조회가 있는 날이면 운동장은 그야말로 꽃밭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의 유리창 틀은 왜 모두 하얀 페인트로 칠해 놓았을까. 교정에 설치된 벤치는 나무도 아니면서 왜 모두 브라운색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학교 유리창 틀 몇 개를 노란색과 하늘색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교정의 벤치들이 주변 꽃밭의 색상과 조화를 이루게 바꿔갔다. 이런 시도들이 색의 변환만으로도 조직문화와 조직 풍토를 바꿔 가는 데 효과 있었다.
건대부고 교장 임기를 마칠 무렵 다시 재단으로부터 건국대학 교육대학원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임기를 시작하면서 학교 현장 중심의 교원 양성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고등학교 교장으로 지내는 동안 여러 교사들을 만나 대학의 교원양성 과정에 습득한 지식과 기능이 현장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 자주 질문했었다. 그런데 교사들 대부분이 대학에서 수강한 교과목과 강의 내용이 학교 현장에서 교사직을 수행하는 데 의미 있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내가 맡은 교육대학원생들의 교육이 실제 학교현장에 유용한 지식과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교수진과 교육과정을 개편하고자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교육대학원장협의회 정기총회에서 내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로인해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대상으로 추진하려던 현장 중심의 교원 양성을 전국 대학원에 권장하는 쪽으로 업무계획이 수정됐다.
무엇보다 대학 강의를 담당할 만큼 능력 있는 초중고 교사들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초중고등학교 교사들 가운데 박사학위를 지닌 일선 교사들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겸임교수들은 교과지도법, 학급 경영 교육 실습 등 주로 현장 경험이 필요한 교과목을 맡았다. 기존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학교현장에 취약한 교수들만의 교육대학원 운영보다는 현장경험이 풍부한 우수한 초중고교 교사들에게 일정비율 강의를 맡김으로서 현장중심의 교육대학원 운영을 시도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19) "남은 삶 참교육에" 21대1 경쟁뚫고 송도高로
교육대학원생들의 4주간 교육실습은 국내 학교의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해외 교육실습의 문호를 열어 놓았다. 교직의 국제화뿐만 아니라 날로 늘어나는 다문화 가정의 학생과 학부모를 이해해야 할 예비교사들에게 외국에서의 교육실습을 통해 미래형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 분포한 12개 국가의 학교들과 교육실습협력학교를 체결해 실습생들을 파견했다.
교육대학원장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했고 노력의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가장 실현하고 싶었던 소외 계층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대한민국 희망학교'를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조기에 꿈을 접어야 한다면 서글픈 일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위한 특수목적고등학교가 필요하듯 성적이 뒤처지는 학생들이 좌절 대신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하지 않은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해 대한민국 희망학교를 출범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교육대학원장 임기가 끝나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럴 때마다 나를 위로하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나는 계획을 세울 뿐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 그분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뜻이 있다면 또 다른 기회에 보다 좋은 일을 맡겨주실 것이다.'
2012년 8월 31일. 65세 대학교수의 정년을 10개월 남겨놓고 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간 신문을 넘기던 내게 우연히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장 초빙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광고 내용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초빙교장의 지원자격이 65세 이하였고, 취임 날짜는 내가 교수 정년을 마치는 그 다음 날, 9월 1일자 발령이라는 사실이었다. 대부분 학교들이 한두 달 아니면 길어야 3개월 정도를 남겨놓고 교장 공채를 하는데 10개월 뒤에나 발령하는 학교장 공모를 미리부터 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평소 신문광고를 눈여겨보지 않던 내가 그날 아침 우연히 학교장 초빙광고를 본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하나가 있었다.
월드비전 후원. 학창시절 월드비전의 도움을 받아 공부할 수 있었던 나였기에 마음의 빚을 덜어낸다는 생각으로 국내외 아동 10여명을 10년 넘게 후원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 정년을 앞두고 후원 아동을 점차 줄여나가야 했기에 월드비전 후원팀에 연락을 해놓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시기였다. "혹시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월드비전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도록 하기 위한 뜻이 계신 것은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어느새 확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장 공모의 경쟁률이 무려 21대 1이나 되었다고 한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몇 사람만의 최종 면접이 있던 날이었다. 심사위원들과의 최종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만약 교장을 공개 모집하는 이유가 대학 진학률을 높이고, 특히 일류대 진학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면 지금의 저는 부적격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이 학교의 교장이 된다면 저의 관심사는 이 학교를 입학하는 성적 하위 25%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담임역할을 할 계획입니다. 훗날 이들 학생들이 송도고등학교를 입학한 것, 그리고 오 교장을 만나게 된 것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최종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최종 면접을 마친 때로부터 2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렇게 시작된 송도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 벌써 한 학기가 지났다. 이제 신학기의 시작과 더불어 이 학교의 발전과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발전을 위해 그동안 경험해 오고 구상해 온 교육프로그램들을 시작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오성삼 (20·끝)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마음의 빚'… 이젠 사회환원을
내겐 갚아야 할 빚이 참으로 많다. 더러는 갚았고 더러는 갚아가고 있지만 앞으로 갚아야 할 빚이 훨씬 더 많게 느껴진다. 일부 빚을 갚았다고 감히 말하는 것은 어쩌면 무례하고 잘못된 표현일 수도 있다. 내가 갚아야 할 빚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마음의 빚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건 내가 이전에 받은 도움을 돌려주려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너무 미약함을 느낀다. 그 많은 도움이 있었건만 나의 무능함과 노력 부족으로 충분히 나눠줄 만큼 열매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돈과는 거리가 먼 교직에 종사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제일 먼저 마음의 빚을 갚은 곳은 월드비전이다. 유학생활 마지막 학기 가장 절박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곳이기에 우선 돌려주고 싶었다. 교수 생활을 시작하고 책상 서랍에서 1000달러짜리 빛바랜 복사본 수표를 꺼내들고 한국월드비전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정작 전화를 걸었을 때 얼마나 돌려주어야 하는지 고민이 생겼다. 월드비전에 내가 받았던 도움을 돌려주리란 마음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얼마를 갚아야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얼마가 정답일까?' 그때 받았던 1000달러의 도움을 두 배로 늘려 2000달러를 갚으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 도움 때문에 오늘 내가 교수가 되었는데 단지 두 배로 갚는다면 내가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질책하며 정답 찾기에 골몰하다가 찾은 답은 받은 도움의 일곱 배, 7000달러다. 이유는 논리적이거나 산술적이지 않지만 명료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7이란 숫자가 정답일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7000달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2000달러는 내게 도움을 준 월드비전 본부에 감사의 마음과 함께 전해주시고 나머지 5000달러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날 오후 후원자들을 관리하는 부서의 직원이 직접 사무실을 찾아왔다. 당시 7000달러는 내 전세자금의 일부였다. 하지만 큰맘 먹고 행동에 옮긴 첫 번째 되돌림은 무거웠던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었다.
월드비전을 통해 국내 아동들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은 그 얼마 뒤의 일이다. 다달이 급여 통장에서 후원금이 빠져나갔다 그동안 나의 후원을 받는 가난한 나라 아동들의 감사 편지가 수북이 쌓여갔다. 편지를 받아들 때마다 혼자 되뇌곤 했다. "얘들아, 나도 예전에 너희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되었단다. 부디 희망의 끈을 놓지 말기 바란다."
대학시절 정수장학금(이전 5·16 장학금)의 도움은 4년 동안 험난한 강을 포기하지 않고 헤엄쳐 건널 수 있도록 해준 에너지였다. 2008년 아내와 큰마음을 먹었다. 학창시절 받았던 정수장학금을 어려운 후학들을 위해 이자를 후하게 붙여 2000만원으로 돌려주었다. 그 돈은 정수장학회 총동창회의 '되물림 장학금'으로 가난한 집안 고등학생 10명에게 돌아갔고 뜻을 같이하는 동창회원들이 참여해 지속사업으로 확대해가고 있다. '사랑의 되돌림'은 두레교회의 북녘동포돕기운동에 1000만원을 기부하고 매년 후원하는 해외아동을 늘리는 것 등으로 이어졌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하는 마음을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 하던가. 남에게 받은 도움 그것은 언젠가는 환원해야 할 마음의 빚이란 생각을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평온한 삶을 마감할까. '얻어 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꽃동네 이야기를 떠올리며 험난했다고 생각한 나의 학창시절은 차라리 풍성한 축복의 나날이었음을 깨닫는다. 지금 비를 맞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비가 그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며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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