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谷宗君書
(매곡종군서)
-初九日午後西村諸員入梅社而道遇此書-
-초구일오후서촌제원입매사이도우차서-
先社事言之痛矣向日罷會時畢意以不忍之說加之於不忍之地者皆知忿激所發然庶幾半心更思怎有好箇論議耶
(선사사언지통의향일파회시필의이불인지설가지어불인지지자개지분격소발연서기반심경사즘유호개논의야)
大抵此事議終不合列廟宇已成之後甚事不做而必於未事之前作此不忍之事耶至於梁頌列一自塗洗之後更不檢用衆目所覩若然列貴中所做不爲無得而必也
(대저차사의종불합열묘우이성지후심사불주이필어미사지전작차불인지사야지어양송열일자도세지후경불검용중목소도약연열귀중소주불위무득이필야)
故故作不忍之事耶政所謂家必自毁人必自侮此何異於眞靖後孫之自拔其碑耶不意吾家之有此景像也
(고고자불인지사야정소위가필자훼인필자모차하이어진정후손지자발기비야불의오가지유차경상야)
祖先之靈其旨曰予有後也耶不肖無狀忝在承祀之地不忍坐視其亡言不知栽敢此控訴吾家之禮生存亡在此一擧伏顊各自平心亟回忿激之論一以爲尊先之道一以爲保族之地千萬千萬
(조선지령기지왈여유후야야불초무상첨재승사지지불인좌시기망언불지재감차공소오가지예생존망재차일거복이각자평심극회분격지론일이위존선지도일이위보족지지천만천만)
初十日卽享祀正齋日也西村諸員泰堂虛因言整頓位序之意仍俟分定執事後設卓之
隥遂盤坐西上間曰涵祖之位自在中堂何必在上避嫌間間而於此乎設之正堂可也
(초십일즉향사정재일야서촌제원태당허인언정돈위서지의잉사분정집사후설탁지
등수반좌서상간왈함조지위자재중당하필재상피혐간간이어차호설지정당가야)
因堅坐不動嘻噫痛矣梅之人卽地光景尙忍言哉可勝道哉伊時泰會堂員於我恳請曰間間行祀旣是此堂傳來已例列僉執事今日此擧不可謂穩當何不於廟成後正位乎
(인견좌불동희희통의매지인즉지광경상인언재가승도재이시태회당원어아간청왈간간행사기시차당전래이례열첨집사금일차거불가위온당하불어묘성후정위호)
余等遂相顧曰不料一邊景色如是駭妄今宗君之書盶如彼堂員之言又如此吾輩今日之擧本歆試動靜之如何則不必於此固執惟在廟成後如何
(여등수상고왈불료일변경색여시해망금종군지서원여피당원지언우여차오배금일지거본흠시동정지여하칙불필어차고집유재묘성후여하)
措處耳遂相率罷歸然重口難防其臨歸酬答之言自不能無較若使傍觀只論其末稍則必曰仙源亦欠包容也已
(조처이수상율파귀연중구난방기임귀수답지언자불능무교약사방관지론기말초칙필왈선원역흠포용야이)
매곡(마을) 종군(종손)이 쓴 글
-초9일 오후에 서쪽마을(선원) 여러 종인들께서 매곡사당을 방문했는데 길에서 만나 이를 쓰다-
조상의 사당에 대한 언사로 아픔이 있는지라 지난번 파회 때에 참을 수 없는 말에다가 분위기가 보태어진 견고한 뜻을 모두 알고, 분격한 마음이 일어나 거의 반 마음(참된 마음 절반)으로 다시 생각하니 중구난방이라 어찌 좋다고만 하랴.
무릇 이 일은 논의가 끝나도 합의에 도달되지 않아, 설령 사당의 위패가 진열된 후에도 이를 간주(인정)하지 않아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반드시 참으려는 노력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그전에 일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대들보 하나를 올릴 때 까지 스스로 마음속 뒤끝을 씻어 없애야하며 많은 사람들 눈으로 검증된 것을 거듭 분별하지 못하거나 펼친 일에 대하여 수긍하여 이를 귀중하게 인정하지 않는 다면 기필코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참지 않는 것이 계속되어 관례가 된다면, 법도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가문은 반드시 저절로 훼손될 것이며,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업신여김을 당할 것입니다. 참된 것을 도모하여야할 후손이 스스로 비석을 뽑아버리는 것이니 이 어찌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이 같은 뜻밖의 상황이 향후 우리가문의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령스런 선조의 뜻은 종손인 나를 뒤에다(후순위)두는데 있으니 불초에게는 공적은 없고 욕된 일만 있으며 제사를 계승하는 처지라, 가만히 앉아서 바라만 보다가 그 같은 망언을 숙고하지 못하고 감히 싹을 키웠도다. 우리가문의 예(禮)가 생존하고 망하는 것은 하나로 일어서는데 있으니, 턱을 엎드리고 각자 시급히 평상심으로 돌아가 성난 논쟁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조상을 공경하는 도리를 하나로 함으로써 일가를 보존하는 근본에 최선을 다해줄 것을 호소하나이다.
*상단은 만남에 있어, 그 동안의 감정적 느낌을 적은 부분이며
하단은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 있었던 대화내용과 느낌 대한 글임.
초10일 즉,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제사를 올리던 날 서쪽마을(선원) 여러 종인들께서 평온한 사당에서 겸허하게 말을 정돈하여 위계순서의 뜻에 입각하여 기다려가면서 맡겨지는 일을 분명히 하였다. 후에 높이 우러러 보면서 서쪽 위 칸에 책상다리를 하시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함계선조의 신위는 사당의 가운데로부터 하필이면 싫어하는 칸을 피하여 위쪽에 모셔져 있었는데 이는 대청의 안당 칸으로 모셔야 옳은 것이라 했다.
분위기가 딱딱한 자리는 움직이지 아니함(평소 서먹했던 두 마을 사람들의 관계와 제사지내는 분위기를 동시적 함축적으로 묘사)으로 인하여 억지로 웃으며 탄식하는 아픔이리라. 매곡사람들이 즉석에서 그와 같은 형편에 오히려 침묵하니 가히 도리를 초월하였는데 이따금 모임의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종인들께서 나에게 간곡히 청했다. 칸칸이 제사를 행하는 것은 이미 사당의 관례로 전래되어 온 것으로 일을 집행함에 있어 모두가 함께 베푸는 것은 옳은 것이며, 후에 사당의 위패를 어찌 바르게 하지 않으랴. 금일 이에 대하여 거론하는 것은 가히 온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서로 지난날을 회고하며 말했다. 요량 없이 한쪽 경치만 보는 것은 혼란스럽고 허망한 일이라는 것과 종군(종손)의 글을 보면서 종인들의 말씀이 저것과 같으니 또한 우리무리들은 이것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금일 제사를 지내면서 사당준칙을 정함에 있어 동정여하를 검증할 수 있었으며 훗날 사당위패의 위치를 설정함에는 유아독존식의 고집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들은 것은 두루 정돈하여 처리하였으며, 제사를 파한 후 서로들 거느리며 돌아갔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행동은 신중을 기하였고, 입은 조심했는데 임하거나 돌아갈 때는 대답에 응하였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비교하지 않았기에 사당규칙의 말초부분(중요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논쟁에는 방관하였으나 중요부분에 대하여는 선원마을 일가 분들 역시 포용함에는 여전히 미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