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탐방 6탄 < 청도에서 고흥 구경 가기 >
< 다른 사람의 여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지도여서 주인 허락 없이 빌려 쓰기로 했다. 나눔의 정서로 용서하시길 바란다. >
일시 : 2018년 7월 25일 ∼ 27일 (2박 3일)
장소 : 고흥군, 보성군 일원.
참가자 : 안창성, 한경호, 황경철(3명)
2018년 7월 17일 오후 청도의 용궁횟집에서 모인 우리는 전라도 여행의 일부로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 3일 동안 고흥군 일대를 여행하기로 했다. 2017년 봄에 광양 매화 구경 갔다가 철이 이른 바람에 산수유 꽃만 보고 왔고, 9월에 화순 적벽과 운주사를 구경했으니 이번은 전남의 3번째 여행이 되겠다. 그래 봐야 3개 시(광주, 광양, 여수)에 20개 군을 거느린 전남의 극히 일부분밖에 보질 못하고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이니 감히 답사란 이름은 붙이질 못하겠다. 아래 지도의 공백 부분은 광주광역시이다.
< 전남 시군 한눈에 보기 >
여행 1일째 : 7월 25일(수) 청도 → 고흥
출발일인 7월 25일은 전국이 폭염 경보가 내렸는데 유일하게 고흥군만 폭염주의보였다. 폭염 주의보는 33°, 경보는 35° 이상인 날이 이틀간 계속되면 발령이 되니 그래도 2°의 서늘함을 위안으로 서쪽 여행을 시작했다. 9시에 모두 만나 황선생의 닛산 케시카이를 타고 '서(西)으로 가는 달처럼' 우린 출발했다. 이전과 조금 변화가 있다면 나도 운전을 할 수 있도록 9,000원을 들여서 3일간 보험을 넣었다는 점이고 그 외는 펜션에 잘 것도 아니니까 음식물이나 술 등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거창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도 취하고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안선생이 앞으로 여행에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될 만한 엄청난 지식을 우리에게 베풀었다. 그것은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커피 전문점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곳에서 커피 마시는 것을 당연시해서 세 가지의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몰라서 당한다는 것이다. 즉, 혼자 마시기에 부담스러운 양의 커피를, 별다른 맛 차이도 느끼지 못하면서, 값만 비싸게 마신다는 것이다. 물론 일행과 나누려고 종이컵 하나를 달라고 하면 공짜로 주는 곳이 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이고, 그래도 대부분 사람은 이런 불편과 낭비를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찾아보든지 아니면 휴게소 계산하는 점원에게 물어보면 어디엔가 싼 커피를 판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휴게소에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번듯이 있는데 휴게소 다른 곳에서 자판기 커피가 아닌, 가격이 싼 원두커피를 파는 곳이 있다고?
< 글자가 작아 친절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정확히 그런 상식 밖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
원두커피 에스프레소. 카운트 위에 아주 작은 간판이 있고 주문을 하니, 아가씨가 오랜만에 파는 듯 커피를 바로 내려 준다. 한 잔에 1,500원. 두 잔을 사서 황선생은 식당에 있는 컵에 나누어 주었다. 황선생은 커피가 맞지 않고 한 잔의 양은 너무 많아 우리 것을 조금 나누어 주면 우리도 양이 적당해져 오히려 좋았다. 이곳 커피는 프랜차이즈보다 양이 조금 적었지만, 오히려 그게 적당했다. 커피 맛? 거기에서 거기다. 작년 9월 화순 갈 때 우린 이 휴게소 건물 바깥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 한 잔에 4,100원짜리 커피를, 그것도 줄을 서서 기다린 후 2잔을 샀다. 오늘 작은 지혜로 5,200원을 절약했다. 이후로 고속도로 휴게소 프랜차이즈 커피는 우리에게서 아주 멀리 사라졌다.
길이 멀어 시간이 거의 점심때가 되었기에 안선생이 추천하는 가장 가까운 맛집인 고흥군 두원면 다미식당을 목적지로 하도록 내비년에게 알려 주었다. 다미식당은 그야말로 시골 한적한 길가의 지나치기 쉬운 집이었는데 내비년을 며칠 전 업그레이드했다고 하더니 상당히 정확히 안내해 준다. 안선생이 40대 후반 아줌마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했지만 아줌마는 들은 척 만 척하기에 내가 출입문을 가리켰다. 거기에 “돼지 족탕, 한정식, 백반 정식”이라고 이 집 전체 메뉴가 간단명료하게 코팅되어 있었다. 돼지 족탕은 돼지고기 홀릭에 빠진 내가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날씨가 날씨인지라 포기하고 한정식 3상을 시켰다. 이때 날씨가 얼마나 더웠냐하면 우리가 소주를 시키지 못할 정도였다면 실감이 날 것이다. 게다가 안선생이 아줌마에게 별미(別味)로 “뭔가 더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정중히 요청했건만 아줌마는 “나오는 것 보고 시키세요.”라고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냉담히 거절해버렸다. 이런 경우 쓰는 용어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한다(樹慾靜而 風不持)”를 패러디한 “손님은 음식을 청하고자 하나 주인은 허락하지 아니한다.”(客慾請而 主不許)가 걸맞을 듯하다. 그야말로 허걱!
< 밥그릇도 보이지 않으니 국도 안 나온 상태에서 급히 찍었구나. 성질은. >
음식이나 걸 그룹이나 누가 센터를 차지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자리를 큰 냉면 그릇에 담긴 붉은 것이 차지했다. 얼핏 봐도 팥죽인데 이 지방의 특별한 보양식인 문어를 넣은 팥죽이라고 한다. 그 외의 찬이야 왼쪽 위에 양념게장, 찐 양배추, 그 아래 접시가 ‘순태’라고 부르는 갈치속젓이고 김치, 고구마 줄기, 채소 겉절이, 감자채, 물김치, 돼지 수육, 깻잎장아찌, 열무 물김치 정도이다. 특별한 것은 후식(後食)이라기도 무엇하고 반찬이라기는 더욱 이상한 완두를 넣은 백설기 떡이었다. 식사 후 수박을 따로 준 것을 보면 반찬으로 준듯한데 아마 겉에 있는 양념장에 찍어 먹으라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식사 후 차량 운전은 내가 하기로 했다. 처음 운전하는 SUV 차량이지만 운전 시야가 높아 오히려 편했다. 다만, 가속페달과 브레이크가 내 차와 달리 좀 뻑뻑한 느낌이었지만 이것도 곧 적응되었다. 고흥반도에서 아래로 내려가 녹동항 근처에서 소록대교를 지나니 소록도 한센인 병원이 오른쪽에 보인다. 한센인 병원은 나올 때 들리기로 하고 그대로 직진해 소록도에서 거금대교를 지나니 거금도인데 거금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산면에 속한다. 금산면에는 우리나라 프로 레슬러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기념 체육관이 있어 어릴 때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던 기억으로 가보았다.
< 1929년생인 김일 선수는 국내 씨름 선수로 지내다가 역도산의 활약을 듣고 1956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1957년 일본 프로 레슬링의 아버지인 역도산(한국명 김신락)의 1대 제자가 되었다. 그의 후배로 무하마드 알리와 누워서 세기의 대결을 벌인 안토니오 이노끼 선수가 있는데 실제로는 김일 선수와 한 방을 사용할 정도로 친한 선후배 관계지만 그 당시의 반일 감정을 이용해 흥행을 성공으로 이끈 인물이다. 김일 선수는 귀국 후 장영철, 천규덕과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다가 2006년에 돌아가셨다. >
1970년대 처음 TV가 나왔을 무렵, 승부를 유리하게 이끌던 그가 상대방의 반칙―팬티에 흉기를 숨겨 와 공격을 하든지, 비겁하게 눈알을 후벼 파는 등을 많이 한 것으로 기억한다―으로 피를 흘리거나 괴로워하다가 거의 카운트에 들어가 패배할 지경이 되었을 때 전 국민은 모든 것을 바르게 응징하는 정의의 박치기 한방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당시 무언가도 모르고 어디에서 생겼는지도 모르는, 그러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잡히지 않는 한(恨)을 박치기 한방으로 풀어주던 그는 모든 국민의 카타르시스적 영웅이었다.
< 멀리 보이는 건물이 한센병을 앓는 환자가 기거하는 곳이라 하나 일반인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
다시 차를 돌려 거금대교를 지나 소록도로 들어와 좌측의 길로 접어드니 국립 소록도병원이 나타난다. 이 병원은 일제가 1916년 국내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을 위해 세웠던 소록도 자혜의원이 시초다. 이곳은 한국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불린다. 일제에 의해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은 이곳으로 강제 연행됐고, 말할 수 없는 차별과 노동 착취의 대상이 되어 죽어 간 곳이다. 소록도가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이 된 이유가 여기서 출발한다.
소록도 병원에서 다루는 한센병이야말로 그 역사가 길어 인류와 함께한 병이다. 구약성서 레위기 13장에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나병의 역사는 실로 오래됐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 불치의 나병을 치료해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마르코 복음 1장 40∼42절, 루카 복음 5장 12∼13절)는 걸로 보아 예수 당시에도 나병(癩病)은 불치의 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벤허'에서도 주인공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문둥병에 걸려 나병 환자끼리 모여 살다가 죽으면 시체를 버리는 웅덩이가 있는 산골짜기 동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둥병, 혹은 하늘이 천벌을 내린 것이라는 뜻으로 천형(天刑)이라고 하다가 문둥병의 한자식 이름인 나병(癩病)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그러나 이 나병 역시 멸시, 차별의 뜻을 가졌다고 해서 한센병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한센은 1879년 환자의 결절에서 나균을 처음 발견한 노르웨이의 의학자 이름이다.
날씨가 워낙 더워 나무 그늘 따라 놓인 데크 길을 걷기도 힘들어 우린 중앙공원까지만 가기로 했다. 가는 중간 ‘검시(檢屍)실’과 ‘감금실’의 건물이 문화재청 등록 역사적 건물로 보존되고 있었다. 검시실은 당연히 시체를 검사하는 곳이지만 이곳은 환자의 시신을 실험체로 사용하는 등 비인도적 만행이 자행된 곳이다. 또한 감금실은 인권탄압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이곳에 감금이 되면 기본권 박탈은 물론 감금, 금식, 강제노동, 체형 등이 행해졌으며 이곳에서 나갈 때는 예외 없이 정관 절제(精管 切除)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금실 벽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다.
단종대
이 동(李 東)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일제하 제4대 수호 원장시절
그의 명을 거역한 벌로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단종 수술을 받은 환자의 시
< 소록도 중앙공원의 “잘 가꾸어진” 측백나무 숲. 아마 일제 치하 한센인의 노고로 그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싱싱하고 한껏 푸른 ‘당신들의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소록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4대 원장인 수호 마사히데 (周防正秀) 원장이다. 공원의 중심부에 동상이 없는 화강암 기단이 하나 서 있는데 이것이 그가 환자들에게 강제 기부를 받아 세운 자신의 동상의 흔적이다. 그는 4월 20일을 보은 감사일로 정하고 한센인들에게 자신의 동상을 참배하며 그의 은혜에 감사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상은 일제 말기 전쟁물자로 구리공출의 대상이 되어 사라지고 화강암 기단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1933년 부임한 그는 이곳을 나병 환자들의 천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이곳에 있는 대부분 건물과 도로, 선착장 등이 그가 재임해서 원생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것들이다. 그렇게 강제노역과 가혹행위 등을 일삼던 중 1942년 환자인 이춘삼에 의해 살해되었다.
수호원장은 전직 경찰이나 헌병 출신의 일본인을 간호 주임으로 마을마다 배치했고 그 중 ‘사토(佐藤)‘라는 간호 주임이 악명을 떨쳤다 한다. 그는 원생들을 끌어내어 마을 순환도로를 내고 석축을 쌓고 바다를 메워 선착장을 만들며 채찍으로 원생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게다가 원생들이 죽으면 병원균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화장을 했고 그래서 문둥이들은 한센병 발병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 처참한 몰골로 한 번 죽고, 죽은 후엔 검시한다며 시신을 해부하여 또 죽고, 마지막엔 화장(火葬)으로 시신이 불태워져 죽으니,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중앙공원의 구라탑, 문둥병 시인 한하운이 친필로 쓴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희망적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나는 가혹한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한센병은 나아도 한센인이다.” >
1945년 해방 직후 소록도 한센인들은 인권탄압 중단과 자치권을 요구하다가 친일파 의료진의 폭동 진압 요청을 받은 고흥군의 향토치안 조직에 의해 무더기로 죽임을 당했다. 이때 학살된 이들의 유골 84구가 2001년 소록도병원 앞뜰에서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는 인간이 아니었고 나라를 찾은 후에는 국민이 아닌, 늘 그냥 그대로인 “문둥이”였다.
가슴 저린 역사의 현장을 뒤로하고 일단 숙소를 잡은 후 저녁을 겸한 술자리를 갖기로 하고 녹동항으로 가기로 했다. 녹동항에는 몇 군데 숙박업소가 눈에 보였지만 그리 깨끗한 느낌이 없었다. 물론 항구니까 물류가 풍부하여 다양한 음식이나 지나치는 사람들의 살 냄새나는 시장 구경 등의 장점이 있지만 그 이면에 뜨내기손님이 많은 까닭에 바가지와 불친절, 담배 연기에 찌던 눅눅한 이부자리 등의 단점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인에게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시내로 들어와 작은 모텔이 보여 교회 주차장에 차를 잠시 세우고 두 사람이 숙박시설을 알아보기 위해 갔다.
문의 결과, 5분 정도 떨어진 녹동신항 쪽으로 가면 연안 여객선 터미널이 있고 그 주변에 새로 지은 모텔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모텔에 들어가 깨끗한 모텔을 추천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우리가 하루 묵을 스카이 모텔 주차시설도 넓고 방도 깨끗했다. >
여름철 방을 잡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샤워이다. 일단 더위 때문에 증발하려는 정신을 샤워로 조금 잡아 놓고 카운트에 가서 주변의 식당과 유흥 음식점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횟집은 참빛횟집이고, 식당은 어촌회관이나 대원식당을 추천했다.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니 걸어서 5분 거리라 한다. 차로 오면서 프라자 호텔, 프라자 음악홀 등이 들어간 큰 건물이 있었는데 그 1층이 모두 식당가라는 것이다.
우린 거금도 들어올 때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그 휴게소 앞에 고흥 9미(味)라고 해서 돌에 새겨둔 것을 보았는데 1미 참장어, 2미 낙지, 3미 삼치, 4미 전어, 5미 서대, 6미 굴, 7미 매생이, 8미 유자향주, 9미 붕장어라 되어 있었다. 1미 참장어는 흔히 갯장어라고 하는데 일본어로 ‘하모’라 불리는 고기다. 더운 지금이 제철이긴 하다. 2미 낙지도 있지만, 갯벌에서 잡는 낙지와 통발로 잡는 낙지가 다르니 겨울철 펄 낙지가 비싼 만큼 부드럽고 맛이 월등하다. 삼치, 전어, 굴, 매생이는 제철이 아니고 서대는 말린 것이 있던데 기회 되면 사갈 생각은 있으나 더위가 문제다. 유자 향주는 유자 액과 한약재를 섞어 만든 막걸리인데 기관지 관계에 효험이 있는 약술이라고 하지만 이런 달콤한 술은 내 취향이 아니다. 9미 붕장어는 흔히 ‘아나고’라 불리는 것인데 요즘은 회보다는 아무래도 비브리오 때문에 구이를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계절에 맞게 ‘하모’를 회나 샤부샤부로 먹거나 붕장어를 구이로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참빛식당’의 먹다가 조립한 붕장어구이. 오늘 처음 소주 구경에 주탐(酒貪)이 폭발하여 사진도 잊고 있다가 겨우 이런 형편없는 음식 사진을 보이게 되어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1㎏에 90,000원인데 제법 큰 놈 2마리의 양이다. 그저 먹을 만한데 내일 아침 먹을 어촌회관 한정식에 비교하면 맛 대비 엄청 비싼 편이다. >
거나하게 취해 오다 보니 CU가 바로 옆이다. 소주와 맥주, 안주를 사서 모텔 방에서 한잔 더하고 시간도 모르게 뻗었다.
여행 2일째 : 7월 26일(목) 고흥 → 보성
황선생은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러 가고 원래 늦잠을 자는 두 사람은 잘 만큼 실컷 자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략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하루 일정을 의논했는데 우선 아침은 어제 다미식당(24,000원)과 참빛식당(120,000원)의 경험으로 미루어 한정식으로 결정했다. 한정식을 추천받은 대원식당과 어촌회관 중 어디를 선택할까를 고민하다가 ‘식당’보다는 ‘회관’이 고급스러워 아침은 어촌회관에서 먹기로 하고 식사 후 모텔로 돌아와 양치 등을 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 어촌 회관 8,000원짜리 아침 정식의 거룩한 모습. 바지락이 얼마나 통통한지, 고등어가 얼마나 간이 적당한지, 콩나물국은 왜 그렇게 시원한지, 여행 중 식사로는 이 집이 가장 좋았다. >
식사 후 녹동시장 구경을 갔지만 아침부터 내리쬐는 볕을 감당하며 사야 할 별것이 없기에 금방 포기하고 에어컨이 빵빵한 차로 돌아왔다. 해변 따라 난 길을 가다 보니 고흥은 섬에 가까운 반도인데 어업보다 농업이 더 중심산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들판이 평야라 부를 정도로 넓었다. 대부분 간척의 흔적이 보이던 중 마침 바닷가 작은 주차시설이 있어 차를 세웠다.
<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들판인 걸 보면 이곳이 간척지임을 알 수 있다. >
< 바로 옆에 “오마 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이 있다. >
날씨가 너무 더워 “오마 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은 그냥 사진만 찍고 돌아섰지만, 이 글을 쓰면서 오마 간척 한센인을 조사한 내용을 편집해 인용한다.
『오마도(五馬島)는 전남 고흥군 도덕면에 있는 섬이었으나 간척공사를 통하여 육지가 되었다. 바둑판처럼 반듯한 모양으로 잘 정리된 330만 평의 농경지는 예전에 바다라는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둑을 쌓아 만든 비옥한 땅으로 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만재도 등 다섯 개의 섬이 '말(馬)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마도 간척사업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고흥반도 앞 오마도 일대의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어 소록도에 거주하는 음성 나환자들의 사회복귀를 지원하고 자활정착을 돕기 위해 당시 소록도병원 조창원 원장이 인솔하여 한센병 환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바닷물막이 공사였다.
소록도에 거주하던 음성 나환자들이 1962년 6월 1일 정부로부터 사업인가를 얻어 소록도가 아닌 육지에 자신들의 독립적인 정착촌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풍양반도와 봉암반도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오마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대공사에 병든 몸을 이끌고 거의 맨손으로 공사를 시작한다. 당시 정부는 이 평야에서 연간 5만석 정도의 양곡을 생산하여 치유된 음성 나환자의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일반 영세농가와 각각 1500여 세대씩 입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음성 나환자들은 풍양면에서 오동도까지 385m, 오동도에서 오마도까지 338m, 그리고 오마도에서 서쪽으로 도양읍 봉암반도까지 1,580m... 이렇게 긴 바다를 거의 맨손으로 메워 방조제 안쪽에 소록도의 2배 330만 평의 농토를 조성한다. 지금처럼 번듯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트럭은 물론 경운기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시절에 맨손과 원시적 방법인 괭이와 삽, 손수레가 그들이 가진 장비의 전부였다.
그러나 물막이 공정의 80~90%가 끝났을 무렵에 한센인들은 피와 땀의 결실도 보지 못하고 희망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총선을 의식한 군사정부가 "한센병 환자(그때는 '문둥이'라 함)와 육지에서 함께 살 수 없다"며 간척사업을 극렬히 반대해오던 지역주민들의 민원에 굴복하여 한센인들을 쫓아내고 사업 주체마저 몰수하여 행정관청인 전라남도와 고흥군으로 사업 주체를 이관해버린 후 1988년 공사는 완성되었다. 맨손으로 간척사업에 나선 한센인들은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려고 바쳐진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크기만큼 점점 더 우리들의 천국과 인연은 멀어져 가고 결국엔 당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고 절규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소설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4년 8월 실미도 사건과 함께 오마도 사건의 진상규명이 시작되었다. 조사 결과 국가가 행한 극심한 차별, 비인도적인 만행, 야만적인 처사들이 공개되었고 정부가 개입해 한센인들을 돌보기는커녕 폭행, 감금, 강제노역, 낙태, 심지어 총살까지 자행했다는 인권유린 사실을 확인 발표하였다. 이명박 대통령 때인 2009년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가 소록도를 찾아 정부를 대표해 한센인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다음은 “오마 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 있는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와 함께 새겨진 글이다.
아으 슬프도다!
오호통제라!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
우리 비원의 숙원 사업이었던 오마도 간척공사를
1962년 7월 10일에 착공하였으나 세계적인 대(大)기만극으로
1964년 5월 25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1964년 5월 25일
국립소록도병원 오천 원생 일동 애곡』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제 강점기 때는 타민족에게, 해방 후에는 같은 민족에게 가혹한 박해와 탄압, 노동 착취와 인권 말살을 당한 이들은 당시 기댈 곳조차 없었다. 그들은 한과 억울함을 품은 채 이제 거의 죽고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정치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거늘 작금의 양승태란 이름을 가진 대법원장이란 작자가 저지른 일과 사법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한 그를 끝까지 두둔하여 진실을 덮으려는 사법부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태를 보면 과연 저자들이 법의 한 귀퉁이라도 공부한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은 마지막 희망의 보루마저 무너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듯하니 법과 정의는 지금 상관관계를 잃어가고 있다.
다시 차를 타고 풍양항을 거쳐 도화면 발포항에 도착했다. 발포항에는 조선 시대 전라좌수영 5관 5포 중 하나인 발포진이 위치했던 곳으로 이충무공이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인 1582년 36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종 4품인 수군의 만호라는 관직으로 18개월 동안 근무했던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에는 발포역사전시체험관이 있는데 노 젓기와 전시체험관, 전투 모습을 탐방객이 직접 3차원 화면으로 접할 수 있는 영상 체험실, 당시 장군복과 투구를 비치한 포토 존과 벤치가 있고 무료입장이라 여름날 몸도 식힐 겸 들러 볼 만한 곳이다.
< 직원 한 명인 조촐한 체험관. 입장료 1,000원이라 되어 있지만 무료임. >
나로도에 가기 위해 나로1대교를 지나니 동일면 소재지의 내나로도가 나온다. 다시 길을 따라가니 나로2대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니 봉래면 소재지인 외나로도로 들어간다. 나로도 수협 앞에 주차한 후 수협 간판을 보니 나로도의 한자명이 ‘羅老島’라 적혀 있다. ‘라’의 뜻이 새그물이니까 그물질은 어업, 그럼 고기잡이 노인 섬이란 뜻인가. 바로 앞에 수협 회센터가 있고 회를 떠주는 집은 따로 있었는데 회센터에 들어가니 병어와 붕장어가 제철인 듯 많이 보였다. 그러나 박스째 파니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싱싱한 고기 구경만 하고 나와 세븐 일레븐에서 커피 두 잔을 주문해 세 명이 나누어 마시고 나니 더 할일이 없다. 포두면의 포두식당이 맛집이라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기로 했다.
< 1인 10,000원인데, 참가오리 회가 싱싱하다. 회 옆에 소라와 낙지를 함께 볶은 것이 있고 찌개는 가오리 찌개. 회를 찍어 먹으라고 준 장(醬)이 젓갈에 고추와 마늘을 다진 것이라 신기했다. 나머지는 물김치, 들깻잎 조림 등 그냥 그런 반찬이다. >
포두식당은 가오리 회가 싱싱하고 회를 뜨고 남은 부분으로 매운탕을 끓여 시원한 맛을 내었다. 그러나 가오리 회와 소라 낙지 볶은 것이 너무 질겨 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먹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또 날이 더운데 실내에 에어컨이 신통찮아 흐르는 땀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좋은 재료를 사용한 것은 맞는데 그 좋은 재료가 손님의 치아에는 맞지 않으니 딱할 뿐이다. 차림표를 보니 한정식(특) 50,000원, (대) 30,000원이고 백반 한정식(중) 20,000원, (소) 10,000원이라 되어 있다. 한정식과 백반 한정식의 차이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집에서 가장 싼 메뉴를 먹는 셈이다.
< 팔영산(八影山)의 모습, 산의 정기가 여덟 군데 모여 볼록볼록 기이한 형태의 산이 되었다. >
< 오늘 여행의 주된 목적지가 “팔영산 능가사”인데 楞伽寺의 ‘楞’은 원래 ‘棱’인데 이를 불교에서는 ‘楞’으로 쓴다고 한다. 두 글자 모두 뜻은 ‘모 릉’, 즉 ‘모서리’라는 뜻과 ‘엄할 릉’으로 쓰인다. 절이란 뜻의 ‘伽’와 합해지면 ‘한 귀퉁이에 있는 절집’이란 뜻이다. >
< 이를 “능가사 사적비”에는 ‘愣伽寺’로 적어두었다. ‘愣’은 소리는 ‘릉’이지만 뜻은 ‘멍청할 릉’이니 ‘멍청한 절집’이 되고 만다. 제발 좀 불교에 원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적기를 바란다. >
< 대웅전은 보다시피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집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보기가 시원하다. 자연석으로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으로, 굵은 서까래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 >
안내문을 보니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후기 전라남도 남해안 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 가치가 크다고 한다. 건물 전체가 기울어졌던 것을, 1999년 해체하여 2001년 3월에 완전히 복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 날이 훤하여 대원사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차 세울 곳이 있어 좀 쉬어가기로 했는데 장미꽃 다발이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버려져 있다. 라벨지에 “명성플라워”라고 적혀 있어 휴대폰으로 찾아보니 순천에 명성플라워가 있다. 누군가가 순천 명성플라워에서 꽃을 주문해 상대에게 주었는데 상대방은 여기에 버리고 가버렸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바치는 것은 자기의 마음 속 사랑을 꽃다발에 이입한 것이니 여자가 꽃다발을 버린 것은 남자의 마음 속 사랑을 버린 것이다. 버려진 꽃다발은 시들고 시든 꽃잎이 떨어져 흩어지면 그 사랑도 잊히고 흩어질까? 버려진 남자의 사랑처럼 꽃다발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어 나에게 비극적 상상을 요구하고 있다. >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元寺)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길이라 하는데 걷기 좋은 길,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 보기 좋은 길 등, 무엇이라도 뽑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나라인지라 무슨 이유로 이 길을 선정했는지 길옆 벚나무 길이 걷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차로 가기에는 도로 폭이 너무 좁다. 가는 도중에 군립(郡立) 백민 미술관에 들러 무료로 잠시 땀도 식힐 겸 작품 감상을 하였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북한 작가들의 미술 작품과 우즈베키스탄 같은 옛 공산주의 연방국의 작품이 몇 점 있어 이채로웠다. 바깥에는 조각품도 몇 점 있었지만, 워낙 볕이 강한지라 멀리서 피사체를 당겨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여러 시기와 여러 나라 화가들 작품이 조금은 산만하게 몇 점씩 전시되어 있었다. >
< 대원사는 특이하게도 수자령(水子靈 : 낙태나 유산으로 죽은 아기의 영혼)을 위로하는 지장기도 도량이다. 그래서 아기의 영혼들이 추울까 봐 뜨개질한 모자를 쓴 작은 부처들이 대원사 곳곳에 있는데 태어나지 못한 영혼들이 소복하게 붉은 모자를 쓰고 모여 있는 풍경은 조금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
< 대원사 ‘부모공덕불’의 앞면인데 감실 안 부처의 모습은 운주사에서 본 석조 불감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어 현대에 와서 모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대원사 ‘부모공덕불’의 뒷면인데 그 형식은 운주사 석조 불감과 같다. 그러나 운주사 석조 불감은 그 연대가 고려 때 양식임을 알 수 있으나 이 탑은 언제 때의 것인지, 또 어딜 보니 이 탑을 귀자모신(鬼子母神)탑이라고도 한다고 해서 그런 특별한 탑 형태가 있는가 하여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귀자모신탑이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
부처님 당시 ‘하리티’라는 야차(夜叉) 귀신이 있었는데 그는 아기를 유괴해 잡아먹으므로 사람들이 부처님께 호소하였다. 부처는 ‘하리티’의 500명 자식 중 막내를 신통력으로 감추었다. 7일 동안 미친 듯이 제 자식을 찾아 헤매던 야차 귀신이 부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너는 500명의 자식을 두고도 마음이 아픈데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생각해 봤느냐?’ 하면서 야차 귀신을 깨우쳐 불제자가 되게 하였다. 그 후 ‘하리티’는 어린 유아를 보호하고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사랑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원사 ‘부모공덕불’은 앞면에는 아버지 불상이, 뒷면에는 어머니 불상으로 되어 있다.
< 대원사 극락전의 모습인데 오른쪽 절집 때문에 갑갑한 느낌이다. 대원사 전체가 좁은 터에 8개의 작은 연못을 만들고 머리로 두드리는 큰 목탁이니, 엄청난 크기의 염주, 연화문, 황금색으로 빛나는 연화불국(蓮花佛國)이란 종각 등 갖가지 건축물과 석물들을 배치해 두었다. 그 느낌은 좋게 말하면 지장기도 도량답게 아기자기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궁 속과 같이 갑갑하다. >
대원사 바로 옆에 티베트 박물관이 있었지만 피곤하여 “특미관”의 녹돈(綠豚 - 녹차 돼지)으로 식사 후 보성 관광모텔로 돌아와 간단히 한잔 더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여행 3일째 : 7월 27일(금) 보성 → 청도
일어나 세수 후 아침은 중앙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보니 이 집 제육볶음이 맛있다고 하지만 아침으로는 너무 무거워 7,000원짜리 정식을 주문했다. 그런데 아줌마가 움직일 생각도 않고 손녀딸과 노닥거려 조금 짜증이 났다. 나중에 이야기하는데 이미 아침 손님을 삼십여 명을 치러 진이 다 빠졌다는 것이다. 음식은 일반 가정에서 먹는 음식 위주라서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속이 편하였다.
< 북엇국이 시원하고 풋고추에 갈치속젓이 짭짤하게 입맛을 돋운다. 김에 밥 한술 올리고 쪽파김치 곁들이니 별맛이다. >
청도로 돌아오는 길에 섬진강 휴게소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한잔한 후 의령 다시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내가 너무 차를 빨리 몰아서 하는 수 없이 의령 의병박물관에 들러야 했다. 의병박물관이라고는 하나 의령에서 출토한 국보와 보물들도 전시해 놓았는데 중요한 유물은 복제품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에 대한 유물과 활약상을 전시해 놓았는데 그것보다 가장 갑갑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점은 임진왜란 후 논공행상에 대해 적어두었는데 실제로 전쟁에 나가 싸운 사람보다 선조를 모시고 몽진을 떠난 신하들이 훨씬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니 나라꼴이 개판 오 분 전이 될 수밖에.
한쪽에 우륵 전시관을 따로 조그마하게 설치해 두었는데 나는 우륵이 의령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그는 원래 가야국 사람으로 성열현(省熱縣)에 살았는데 그곳이 지금의 의령군 부림면 근처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진흥왕 때 신라로 귀화해 가야금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륵박물관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것이 규모나 시설 면에서 훨씬 커 여긴 겨우 의병박물관의 한 켠을 차지할 뿐이다. 게다가 우륵과 관계있는 유물이 존재할 리 만무하니 경주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국보 195호 “토우 장식 장경호(長頸壺-긴목 항아리)” 복제품을 전시하고 그 외는 신라 토우 중에 가야금 연주하는 악공들 토우를 복제품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 국보 195호 “토우 장식 장경호(長頸壺-긴목 항아리)”. 토끼, 뱀, 새, 거북이와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는 악공의 모습을 토우로 만들어 항아리에 붙였다. 이런 항아리는 실생활에서 사용한 것은 아니고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는데 이런 형식의 항아리가 현재 4개가 발굴되었다 한다. 아마 내세에서도 여러 동물들과 함께 음악과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며 잘 지내길 기원한 것인가? >
그 중에 경주에서 발굴된 “토우 장식 장경호”를 의령 우륵 전시관에 둔 것은 가운데 가야금 연주자를 보라고 전시해 두었는데 개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고 아래 사진의 토우만 집중적으로 보였다.
< 사진 왼쪽에 가야금 연주하는 토우가 있으나 그는 철저히 무시 되었다. 항아리에서 토우의 모습과 표정이 흥미롭다. 잔뜩 발기한 성기를 앞세운 남자의 한껏 긴장된 얼굴과 외설적으로 엉덩이를 내민 여자의 뒤돌아보며 웃는 얼굴이 이 둘 사이에 곧 엄청난 역동적이며 생산적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자의 여유롭고 탐욕적인 큰 입에 비해 남자의 작아서 절박한 입은 곧 닥칠 미래의 슬픈 나의 모습인 듯 애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옛사람들의 해학적 세계관은 그 앞의 긴 끈처럼 생긴 뱀이 개구리 다리를 물고 있는 모습까지 한가롭게 보이게 한다. >
< 남산떡방아간의 망개떡, 종로식당 소고기 국밥과 함께 의령 3미 중 하나인 다시식당의 메밀 소바. 평상시 점심으로 늘 메밀 면을 먹는 나로서는 내가 만들어 먹는 메밀 면보다 맛있다는 걸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밋밋한 맛이었다. 온면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점심 후 운전을 교체해 황선생이 핸들을 잡았다. 청도 풍각 ‘보신각’까지 와 곧 사라진다는 축산물을 안주로 해서 한잔한 후 우린 즐거운 스트레스를 안고 헤어졌다.
< 보성 관광모텔 앞 회전 교차로. 일반 신호등에서는 신호를 어길 수 있지만 여기선 어길 신호가 없다. 그리고 과속 자체가 저절로 통제되니 교통사고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듯하고 사고가 나도 인사사고가 아닌 접촉사고 정도이다. 교통 체증이 없어 스트레스가 적다. 이번 여행에서 원리만 지키면 회전교차로가 신호등보다 교통체증도 없고 빠르며 편리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청도에도 현대자동차 대리점 앞 오거리나, 화양 사거리 등에 설치하면 좋을 것 같다. >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일시적 보험 가입 후 내가 운전할 수 있다는 점. (1일 3,000원 정도)
2. 휴게소 커피 프랜차이즈의 진실을 배운 점.
3. 회전 교차로의 유익함을 깨달은 점.
4. 여행은 즐거운 스트레스라는 것.
2018년 9월 14일 脫稿함.
2018년 고흥 나들이 결산서 (7/25-27) | ||||
순번 | 품명 | 금액 | 합산 | 비고 |
1 | 용궁 횟집 | 84,000 | 84,000 | 07월 17일 |
2 | 자동차 보험 | 9,000 | 93,000 | |
3 | 생수 3통 | 2,550 | 95,550 | |
4 | 통행료 | 8,600 | 104,150 | 현풍-순천 |
5 | 커피2잔 | 3,000 | 107,150 | 거창휴게소 |
6 | 통행료 | 800 | 107,950 | |
7 | 다미식당 | 24,000 | 131,950 | 중식 |
8 | 커피2잔 | 4,000 | 135,950 | 거금편의점 |
9 | 숙박비 | 40,000 | 175,950 | 스카이모텔 |
10 | 참빛식당 | 120,000 | 295,950 | 아나고 구이 |
11 | 야식 | 13,300 | 309,250 | CU |
12 | 어촌회관 | 24,000 | 333,250 | 조식 |
13 | 커피2잔 | 3,000 | 336,250 | 나로도7/11 |
14 | 포두식당 | 30,000 | 366,250 | 중식 |
15 | 통행료 | 1,700 | 367,950 | 보성 |
16 | 숙박비 | 50,000 | 417,950 | 보성관광모텔 |
17 | 특미관 | 48,000 | 465,950 | 석식 |
18 | 야식 | 7,000 | 472,950 | 해그린마트 |
19 | 중앙식당 | 21,000 | 493,950 | 조식 |
20 | 커피2잔 | 3,000 | 496,950 | 섬진강휴게소 |
21 | 다시식당 | 24,000 | 520,950 | 중식 |
22 | 통행료 | 2,700 | 523,650 | 보성-남순천 |
23 | 통행료 | 4,100 | 527,750 | 광양-군북 |
24 | 기름 | 80,000 | 607,750 | |
25 | 청도 보신각 | 33,000 | 640,750 | |
26 | 계 | 640,750 | ||
1인 지출액 | 213,600원 | |||
안선생님 | 213,600원 | 계좌 번호 | 763-06-002451 | |
한 | 213,600원 | |||
황 | 104,150원 | 기 지출액 109,450원 | ||
첫댓글 다리에 힘빠지면 국내여행 가라 던데 이 상태로 여행을 다녀서 언제 23개 시군의 전라남도를 모두 다닐 수 있겠소?
좀 더 분발하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