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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 시인의 집>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뒤안
-정양시인을 찾아서
오 창 렬(시인)
1. 뒤안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에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 「내 살던 뒤안에」1〜4연
<탐방/시인의 집>의 발길로 정양선생 댁을 찾는 내 마음이 더듬거릴 때 앞의 시가 떠올라 왔다. 이 시를 두고 나는 또 잠시 막막했다. 댁을 찾아가는 실마리를 잡았으나 그것은 이기적인 입장에서만 다행한 일이었다. 달걀 꾸러미라도 들진 못할망정 저 참담한 풍경을 앞세워 손님 행세를 하는 것은 예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문맥이 달랐다면 위의 1〜2연은 생기 넘치는 봄풍경에 대한 서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란스럽게’에서는 불길함이 읽히고 ‘깔려’에서는 배타적 음모와 숨막히는 고통의 냄새가 배어나왔다.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팔매질’에 쫓기는 ‘구렁이’에서는 아픔과 처절함이 온몸을 휘감을 듯하다.
저 돌팔매에 쫓기는 구렁이의 참혹한 이미지를 우리는 윤흥길의 「장마」에서 두근거리며 만난 바 있다. 윤흥길은 「장마」라는 작품을 써서 분단 문제의 소설적 형상화의 한 유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앞의 시 「내 살던 뒤안에」나 그와 관련된 정양선생의 이야기에서 소설적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정양선생에게 작가 윤흥길은 “유난히 터놓고 지내는 사이”이고, 작가 윤흥길에게 정양선생은 “끊임없이 내게 영감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 「내 살던 뒤안에」의 화자와 소설 「장마」의 서술자를 교차하여 읽어보면, 정양선생은 어린 시절 혹은 청춘의 한때를 저 지긋지긋한 장마 속에 살고 있었다. 소설 속 ‘장마’는 가족사적 입장에서 두 할머니의 반목과 갈등으로 인한 한 가정의 지긋지긋한 불행을, 민족사적 측면에서는 ‘빨리 걷히기를 바라나 좀처럼 끝나지 않는 동족상잔의 비극 6.25’를 상징한다. 어느 쪽으로 읽으나 그 상징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전제되어 있다.
급한 만남을 위해 정양선생께 전화를 드려놓고 자료를 뒤적이다 나는 선생의 연보를 찾아 읽었다. 선생은 1942년 1월 전북 김제군 김제읍에서 사회운동가이던 鄭乙과 보통학교교사이던 魯咸安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마을의 배고픈 아이들과 어울리며 한국전쟁 기간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사회운동가’와 ‘한국전쟁’이 심상치 않게 읽힌다. 저 시 「내 살던 뒤안에」와 저 소설 「장마」는 문학이 아니라 삶이었다. 「내 살던 뒤안에」의 ‘뒤안’은 선생이 살던 고향집의 뒤안이면서 우리 역사현실의 뒤안이기도 한 것이다.
「내 살던 뒤안에」와 「장마」의 서사는 매우 흡사하다. 후반부에서 다시 얘기될 것 같지만, 선생이 추구해온 삶과 「장마」의 갈등해결방안도 매우 닮았다. 그러나 「장마」에서 외할머니의 안전한 배웅을 받은 ‘구렁이’가 “지금쯤 어디 가서 펜안히 거처험시나 사분댁 터주 노릇을 퇵퇵이 하고 있을 것”에 비해 「내 살던 뒤안에」의 화자인 ‘나’는, 어린 시절의 정양선생은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 구렁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선생은 구렁이를 따라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이라는 거칠고 메마른 땅, 팔매질이 따라오는 길을 걸어간다. 「내 살던 뒤안에」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감은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는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 「내 살던 뒤안에」5〜끝연
2. 폐촌 혹은 암실
선생의 연보에서 또 한 줄을 아프게 읽는다. “1974년. 어머니가 돌아가심 …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 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이 그것이다. ‘아직도’와 ‘별로’, 그 욕구와 결핍 사이를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직’은 이념대립의 혼란 중에 종적이 어두워진 부친의 자취를 선생이 찾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문화적 상징에 기댈 때 저 구렁이가 사라져 간 길과 부친께서 가신 길이 같을 것이고, 선생이 더듬어 간 흔적이 다르지 않을진대, ‘별로’는 그 험한 길을 선생이 더 걸을 것임을 암시해 준다.
선생은 “집도 세간도 팔아먹고 꿈이고 청춘이고 다 털어서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팔고”(「고향에 와서」)고향을 떠났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선생은 집이 없고, 떠도는 강산이 모두 선생의 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폐촌’이나 ‘암실’이었다.
아이들을 피하여 / 겁결에 뛰어든 굴속에는 / 어둡고 으스스한 바람이 살고 있었다 // 어둠 속에서 온몸으로 / 눈을 뜨고 / 이빨에 물려 서걱거리는 / 흙냄새를 / 숨죽여 깨물고 있었다 // 몽둥이들이 돌팔매들이 / 여기저기서 벼르고 있었다 /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로 / 흙냄새를 살기찬 저녁나절을 / 두근거리고만 있었다 // 아이들의 살기찬 목소리가 /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 문둥이가 살고 있다는 굴 속을 / 들켜도 좋은 소리로 마구 / 울부짖고 싶었다 / 저녁놀 속 몰매 속으로 / 피 흘리며 달려나가고 싶었다 / 달려나가도 / 아무도 없는 한밤중 / 후들거리던 흙냄새를 / 솔바람이 빗어주고 있었다 -「폐촌에서 3」
“외롭고 고단한 허물처럼 무겁던 영혼”(「가을밤에」)을 데리고 “잠 안 오는 밤마다 모과나무가 찬비를 맞는 고향”(「모과나무는」)을 떠났지만, 세상은 폐촌이었다. “어둡고 으시시한 바람”과 “몽둥이들이 돌팔매들이 여기저기서 벼르고” “살기찬 목소리가 팔다리를 후들거리”게 하는 무서운 곳이었다.
선생이 확인한 세상은 흐린 하늘, 시린 외풍, 밤, 미친개가 돌아다니는 주린 마을, 지옥 등의 언어로 재생된다. 계절로는 겨울이고, 시간으로는 밤이고, 눈이나 비가 내리는 일기불순의 땅이었다. 간혹 새벽이어도 그 새벽은 바람이 불어 밀밭에 묻은 달빛이 흔들리는 불안한 새벽일 뿐이었다. 시인이 잠 못 드는 새벽일 뿐이었다. 하고 많은 날 바람불어 비오고 눈 내리는 밤을 선생은 견뎌온 것이다.
선생은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1979년까지 「암실일기」를 쓰며 지냈다 하신다. 꿈과 사랑과 공포와 절망이 범벅된 세상이, 빛과 아픔이 까맣게 타서 메워버린 세상이, ‘암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한 밤마다 불이 꺼져서 꺼진 불들이 넘치”는 현실은 저 일제 강점하를 노래한 신석정의 탄식 속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슬픈 構圖」)와 어찌 그리 흡사한가.
나는 “떡 한 조각만 주면 안 잡아먹겠다”며 사람들을 속이던 설화 속 호랑이의 알레고리를 통해 정강이도 허벅지도 엉덩짝도 젖퉁이도 우리 몸 어떤 것을 바쳐도 탄압과 착취의 세월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아프게 새긴 선생의 시 「수수깡을 씹으며」를 떠올렸다. 이런 현실에서 이 세상 별의별 아름답고 험한 것들이 마구 쌓이어 모질게 썩어가는, 시커먼 먹지렁이들이 우글거리고 몰래 파묻은 누룩 같은 것들이 무슨 독한 술로 괴어오르는, 궂은 역사처럼 감추어온 칼날들이 녹슬고 녹슬어 말 못할 그리움으로 썩어가는 가슴의 선생에게 단 하루의 편안한 귀가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3. 결코 무너질 수 없는 대동의 집
선생을 만나 뵌 날은 입동 다음날이었다. <탐방/시인의 집>을 내세워 댁을 방문하고 싶다는 내 말을 고민하시던 선생은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앞 ‘청국장 잘하는 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수능을 닷새 앞둔 일요일의 자율학습 감독을 마친 저녁 때 나는 음식점 ‘비빔소리’에 선생님과 함께 앉았다.
<탐방/시인의 집>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시를 읽는 것과 달리 이는 시인의 몸이 거처하는 ‘공간 읽기’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한 발 물러나 생각해도 이 꼭지는 시의 배태공간에 대한 탐방이어야 할 것이다. <탐방/시인의 집>의 임무를 잘못 수행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지려는 순간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갈 데라고는 집뿐”(「슬픔」)인 것을 슬퍼하는 선생에겐 이 땅의 고통과 소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가족이고 아들이고 딸이고 손주였던 것. 그래서 선생의 집은 집 밖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바닥을 짓이기면 신등을 시린 진흙만 묻어오르는”(「까마귀떼」) 세상일에 미쳐 가족과의 “빛나던 귀엣말들을 잊어버리고”(「금팔찌」) 살아 온 것 아니던가.
선생은 목이 길고 굽은 듯한 어깨를 했다. 6.25 동란에서 오늘에 이르는 오랜 세월 이 땅의 어두운 곳 여기저기를 살피느라 목은 길어졌고, 그 역사의 아픈 무게를 감내하시느라 어깨가 굽었을 것이다. 막역지우인 작가 윤흥길은 선생의 문학의 요체를 ‘애정’이라 요약했는데, 이를 빌면 선생의 목이 길고 어깨가 구부정해진 소이는 역사를 함께 해 온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한 도시에 살면서도 그런 선생을 가까이 모시고 배우지 못한 부끄러움이 앞섰다. 나는 선생께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메모해 간 몇 줄을 보여드리며 이런 내용을 듣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뿐이다. 처음에는 우리 둘뿐이던 청국장 집에 이내 손님들이 모여들었고, 선생의 말씀을 새겨듣기에는 좀 시끄러워졌다. 우리는 테이블 여럿을 필요로 하는 단체 식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일어섰다.
선생의 말씀처럼 양념을 치지 않은 수수한 맛이 좋은 청국장집을 나와서 선생과 나는 소리문화의 전당 실내외를 잠시 배회했다. 선생은 공연장 ‘모악당’ 앞 계단에 앉자 하셨다. 말씀이 느리신 선생이 문득 요즈음 다산 선생에 심취해 지내신다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다산초당의 당호 ‘與猶堂’에 대해, 그 ‘與’와 ‘猶’에 대한 말씀으로 진지하시다. ‘與’와 ‘猶’는 둘 다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을 만큼 ‘의심이 많은 짐승’인데, 꼭 필요할 때는 목숨 걸고 살얼음이라도 건너는 종족이라 한다. 그 짐승의 특성을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필요한 때는 가장 정확하게 적극적인’이라 요약하시며 ‘필요할 때’와 ‘적극적’에 방점을 찍으신다.
나는 성마른 질문을 드리는 대신 선생의 말의 느린 호흡 틈으로 선생이 ‘가장 적극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해 보았다. 당연히 선생의 근작들이 도움이 될 터였다. 선생은 2005년에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를, 2009년엔 시집 『철들 무렵』을 내시었다. 선생의 고향인 ‘마재’에 대한 시편과 명절이나 이십사절기와 같은 ‘俗節’에 대한 시편들이 두 시집의 특징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에 대해 선생은 요 몇 년 동안 ‘고향’과 고향사람과 같은 민중들의 삶의 무늬가 새겨진 ‘俗節’에 물어 오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의 마재시편이 묻기 위해 돌아보는 정양선생의 시선이 향하는 곳(공간)이라면 『철들 무렵』의 俗節은 선생의 시선이 향하는 때(시간)였다. 그런 작업을 통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자각해 가는 시간을 ‘철들 무렵’이라 하시지 않았을까.
『철들 무렵』에 대해 여쭈었더니 선생은 ‘自序’와 ‘시인의 말’에 일렀듯 ‘세월의 마디를 짚어보는 것’이 핵심이라 하신다. 세월을 점검하는 선생의 뜻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게 철이 든 건지 실수를 거듭하려고 벼르는 게 철이 든 건지”(‘시인의 말’)에 엿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실수라는 전제의 ‘철듦’과 일반적/보편적 시각에서는 실수이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해야겠다는 ‘철듦’이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실수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것과 ‘실수를 거듭하려고 벼르는’ 것은 같은 것이다. 선생이 보기에 세상과 현실은 실수라도 저지르지 않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곳이다.
농경문화 속의 俗節에 담긴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의 삶과 대동공동체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소한(小寒)에는 꾸어다라도 추위를 겪으려 하고, 때가 되면 “감쪽같이 만날 사람”(「칠석」)을 기다리고, “머슴집 아이들 부잣집 아이들 함께 어울려 밥 빌러 다니는 날 아이들 소쿠리에 집집마다 아낌없이 밥을 퍼주는”(「정월대보름」) 俗節들을 선생은 “우리네 삶의 끈”(‘自序’)이라 생각하신다.
전통의 속절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미국이 이 땅의 삶을 간섭하기 전의, 자본주의가 ‘사람’의 자리에 ‘돈’을 앉혀놓기 전의, 신자유주의가 경쟁과 대립을 부추기기 전의 순정한 ‘우리’의 것들이다.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분단 63년 해방 63년 미제 63년도 다 그게 그거다 일제 36년도 미제 63년도 숫자쯤 뒤집어도 안 뒤집어도 조상한테든 자손한테든 쪽팔리기로는” 마찬가지이다.
선생은 모든 부조리의 근원을 ‘미국’이라 생각하신다. 저 설화 속 ‘호랑이’처럼 “이지스함 사주면 파병만 해주면 안 잡아먹지 핵 개발만 안 하면 안 잡아먹지 안 잡아먹지” 끊임없이 속이고 요구하는 미국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우리끼리 평등하게 화합하는 세상을 꿈꾸느라 선생의 잠은 고단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 되는 대동(大同)의 세계, 대동세계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시에 잘 형상화되어 있다.
동서로 남북으로 갈가리 찢어져
쫓기고 피 흘리고 빼앗기고 굶주리는 땅에
사람들이 참말로 사람답게 사는
황금빛 찬란한 평화를 평등을 화해를 터 잡고 싶은
어여쁜 아내의 어여쁘고 간절한 소원을
- 「결코 무너질 수 없는」부분
왕후장상이 양반이 쌍놈이 따로 있느냐
어울려 대동세상 만들자던 꿈이
이렇게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두런거리며 모여들었구나
- 「大同契 집터」
우리 민족 모두가 살아나는 길이 (민중적) 전통에 있다고 믿는 선생의 생각은 의미심장하다. 저 윤흥길의 「장마」가 무속신앙이라는 재래적 문화가치를 통해 외래적인 이념이 심화시킨 갈등을 메우고 극복했다면, 정양선생은 ‘고향’이라는 우리 정서의 원형적 공간과 ‘俗節’에 나타나는 공동체감각의 회복을 통해 분단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위해 선생은 저 ‘與’나 ‘猶’처럼 적극적이고자 하시는 것이다.
4. 따뜻한 집, 홈페이지
정양선생을 ‘그늘이 큰 나무’라 비유했던 누군가의 말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늘이 깊은 느티나무’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선생은 많은 사람들에 싸여 사신다. 그들은 주로 시인, 소설가, 극작가를 망라한 문인들이고, 선생의 제자들이다. (이름만 대면 세상이 다 알 만한 시인과 작가들이 그 아래 붐벼 나 같은 이는 감히 다가갈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선생이 팔을 벌려 그들을 품고, 그들은 다시 가지가 되고 바람이 되어 나무는 더욱 무성하게 우거지는 형국이다.
선생을 존경하는 한 젊은 작가가 사이버공간에 선생님의 집을 마련해 드린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소문을 듣고 몇 번 들어가 본 그곳에는 수많은 과객들이 묵어 간다. 언어로 남는 그들과 선생의 만남의 흔적에서 우리는 연모와 존경과 그리움과 사람 사이의 정을 읽는다. 그 흔적에서 우리는 선생의 눈에 읽히는 시를 쓰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제자들의 고통이 자랑으로 남아 있음을 본다. 갈피마다에서 선생의 미소하는 얼굴을 만난다.
선생의 시는 우리의 슬픔을 대신 슬퍼해주고, 먼저 분노하여 우리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선생의 명쾌한 시론은 우리의 이성을 일깨워 지성으로 이끌어 준다. 선생의 유머는, 그 판소리적 풍자의 톤으로 우리를 처음엔 웃게 하고 나중에는 오래 속울음을 울게 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젊은작가포럼에서 선생께 드린 ‘제1회 아름다운작가상’은 선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준다. 큰 나무가 되신 선생은 그러나, 늘 유연한 마음으로 타인에게 몸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지금도 선생을 따르는 후배문인들과 제자들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를 찾는다. 다음 시는 그 한 단면을 보여준다.
80년대 운동권이던 그는 오랜 수배생활에도 끝내 잡히지 않았으므로 민주화운동 보상도 못 받고 이십 년이 훌쩍 넘도록 이런저런 문화단체들을 떠도니더니 요즘은 그런 일들 그만두고 자정 무렵에나 퇴근하는 신문사 윤전실 일에 매달려 산다 밤잠이 없는 나는 인적이 뜸한 자정 무렵 가끔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나자는 그의 전화를 받는다 그가 쫓기며 살 때 접선하듯 만나던 일이 번번이 새롭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시끈거리는 그의 남도 사투리에 팔려 담뱃불을 비벼 끄면서 건성으로 손을 휘둘러보면 이십 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태풍을 기다리는 여름밤 모기들이 그때처럼 눈깜땡깜 손에 잡히곤 한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커피 맛도 담배 맛도 열대야도 모기 잡히는 손맛도 어찌 이리 비슷하냐고 어찌 이십 년뿐이겠냐고 외국 군대들이 당연한 듯이 돌아가며 이 땅을 짓밟는 게 육십 년도 백 년도 넘는다고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아도 백 년 넘도록 조국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백 년 넘도록 조국에는 한 번도 태풍다운 태풍이 오지 않은 것 같다고 지금이 어느 시댄데 태풍이 그립냐고 그놈의 시대 얘기 좀 하지 말라고 그 얘기만 나오면 야코가 팍팍 죽는다고 내가 한마디 하면 그도 열마디도 더 시끈거린다
고물차 전조등으로 인적 없는 공원을 훑으며 그가 떠난 뒤 접선을 기다리는 간첩처럼 어둠 속에 혼자 남아서 또 비껴간다는 태풍의 길을 가늠해본다 이십 년이 훌쩍 넘도록 어둠 속에서 질기게 접선을 기다리는 우리의 80년대가 빈속에 마시는 소주처럼 세상을 훑으며 쓰라리다
- 「접선을 기다리는」전문
공연 없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뜨락의 어둠 속에서 ‘접선하듯’ 선생을 만나 말씀을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포근하기는 했지만, 초겨울의 밤은 냉기가 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선생이 감기에 걸리실 것을 염려하며 일어서시기를 권했다. 따뜻한 찬 한 잔 대접할 생각은 못하고 더 듣고 싶은 말씀을 마음속에 묻었다.
선생과 헤어져 돌아오는 밤하늘에 선생이 뿜어 올리시던 담배연기가 뿌옇게 퍼져 있었다. 지난 10월 말 남원 실상사의 ‘실상사 작은 학교 문학강연’에 갔었다는 선생. 그곳의 작고 낮은 건물과 불편한 의자에 앉아 강연을 듣는 어린 아이들에게 참 미안하더라시며, 어른들이 좀 잘했으면 이 어린놈들이 좀 더 편했을 텐데… 하시며 피워 무시던 담배, 마치 당신의 일을 염려하듯 깊게 뱉어내시던 한숨과 담배연기,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이라는 거대한 건물 앞에서 선생은 ‘평등’하지 못한 세상의 책임이 당신 것인 양 자책했었다.
대학교수 정년퇴임 때 무슨 훈장을 받으면서, “그 어려운 시절 또박또박 월급 받은 사실이 창피했다”시던 선생이 앞으로 ‘또박또박’ 걸어가실 발길들을 그려보았다. 막 시작한 겨울도 언젠가는 끝나고 봄이 올 것을 새삼스럽게 믿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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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렬 : 1963년 전북 남원출생. 전북대 대학원 졸업([석정 시 연구]로 문학석사)
1999년 [시안] 신인상. [시의 땅] 편집위원장 역임. 시집으로 [농게의 발이 붉다], [서로 따뜻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