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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의 맹더위가 언제인가싶게 이미 초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계절입니다.
빽빽히 줄지어 싱싱한 부추처럼 튼실하게 자라던 벼는 한달 남짓한 사이에 벌써 올리브 빛 벼이삭으로 익어가고, 성질 급한 나뭇잎들이 낙하 채비를 하는 중에도 만개한 베롱나무 꽃은 9월 뙤약볕 속에서 아주 발랄하네요.
오늘은 우리 순례단의 열혈당원(?)들이 대거 신앙의 길 도보순례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해서, 남은 단원들 30명이 단촐하게 멀리 마산 교구로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대산 성지 성당
대산 성지 성당은 복자 구한선 타대오(1844-1866년)의 순교 성지입니다.
복자의 유해가 모셔진 무덤 경당에서 곽준섭 요셉 주임 신부께서 우리 순례단을 위한 미사를 봉헌해 주셨습니다.
강론 시간에 구한선 복자와 경상 지역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소개하셨는데요. 소개에 앞서,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라는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선뜻 답하지 못하고 생각이 깊어지던 중, 누군가가 "집으로 가고 있다"고 외치셨지요. 모두가 웃는 가운데 신부님께서도 흡족하게 동의하시며, 우리가 집을 나서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며, 이는 하느님이 마련하신 영원한 거처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순례를 하는 이유, 길을 떠나는 이유는, 내가 언제나 가고자 하는 곳, 즉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구한선은 경남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유학 서적과 잡서를 많이 읽었고,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자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어른이 된 후 소촌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가 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하게 됩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에서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으며,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했고, 관장은 이에 격분하여 더욱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으나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참아내자, 죽음 직전까지 매질하여 거리에 내다 버렸습니다. 이후 교우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7일 만에 장독으로 선종하게 됩니다.
23세 꽃같은 나이에 순교한 구한선 타대오의 묘가 확인된 것은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입니다. 복자께서 선종하자 가족들은 마을 입구 신 씨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그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순교자의 묘는 고이 보전되기 어려웠고 기억 속에서도 점차 사라졌으나,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인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그의 묘소가 발견되었습니다.
제찬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순교자의 묘를 찾던 중, 대산 공소회장인 윤성학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됩니다. 구한선의 처조카인 최성순이 순교자의 묘가 “신 씨라는 사람의 묘소 안에 있다.”,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 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나와 장독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라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그리하여 신 씨들의 묘소를 살펴본 결과 묘소 한쪽 구석에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 하나를 발견하였고, 발굴 결과 구한선 타대오의 묘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대산성지성당 어머니들이 마련하신 맛있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정찬문 안토니오 복자의 묘로 이동합니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복자 정찬문(1822-1867년) 안토니오의 묘가 있습니다.
정찬문은 진양 정 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 집안 여식인 칠원 윤씨와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으며, 부인 윤씨의 권면으로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1849-1863년) 재위 기간 14년과 고종(1863-1907년) 즉위 직후, 즉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비교적 어려움 없이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정찬문도 그해 가을 체포됩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 들어간 어느 밤에 숨을 거두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정찬문이 장사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으며, 거제의 사도 복자 윤봉문 요셉이 순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가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합니다. 이후 사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고복(옥중 죽음이 합당한지 재심하는 제도)에 연관된 시신이라는 이유로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고, 결국 몸체만 수습해 와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촌리의 '무두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염할 당시, 몸이 굳지 않고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하네요. 안타까운 것은, 정찬문 복자가 선종한 이후, 아이를 업은 채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던 부인 윤씨의 행적이 사라지며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족 친지와 동네 이웃들의 멸시 속에 고향을 떠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라고 하는데요. 문중에게 해가 될까 여긴 정찬문의 가족친지들이 그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매번 읍소하며 관청에 항의한 탓에 온전한 시신조차 받지 못하고 시신 일부만 받은 것을 보면, 부인 윤씨에게 자결을 강요했을지, 죽임을 당했을지, 문중과 고향에서 쫓겨났을지, 아니면 스스로 생을 하직했을지는 모르나, 순교자의 남은 가족들의 핍박 또한 순교자 못지 않은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거제도를 방문하며 만났던 유항검의 어린 딸 유섬이의 기막힌 삶처럼 말이지요.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잊혀지던 중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베르나르도 신부가 굼실 공소 회장에게서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1948년 3월 30일 무촌리에 살고 있던 ‘텃골 마누라’라는 광산 김씨 할머니(당시 94세)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게 됩니다. 이후 유해를 발굴하면서 순교자 묘역과 순교비가 건립되었고,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정찬문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3일 순교자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 사봉 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진 후 순례자들을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문이 잠겨 성전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사봉 공소는 넓은 산비탈 위에 조성되어 고즈넉한 가을 정취 속에 고요하고 한적한 안식처로 인상에 남네요. 성지를 감싸듯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을 한바퀴 돌아 올라가면, 마치 설치 미술 작품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예수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십자가상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깁니다. 그 끝에 정찬문 안토니오 복자의 묘소가 평온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산 성당
성지 일정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인근에 위치한 120년 역사의 문산 성당에 잠시 들렀습니다. 성지는 아니었지만, 성당 초입부터 그 아름다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는데요. 고풍스러운 기와집 건물 뒤로, 아름다운 백색의 성당이 그림엽서처럼 자리하고 있었는데, 잘 정돈된 성당 경내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어린 신자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그 정경이 더욱 감동스럽지 않았나 싶습니다.
복원된 120년 역사의 기와 성당 건물은 현재 교육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네요. 한적한 시골이다 싶은 곳에 왜 이리 많은 아이가 뛰어노나 했더니, 진주가 혁신도시로 지정되면서 젊은인구가 유입되어,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끊이지 않는 활기찬 도시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타이밍 이펙트라 하지요. 때마침 어린이 미사시간 전 아이들이 한껏 뛰놀던 시간에 방문한 문산 성당. 눈부신 파란 가을 하늘과 짙푸른 초록의 잔디마당, 흑단같이 검은 기와지붕 뒤로 찬란하게 빛나던 백색의 성당 건물. 제가 본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오늘 장거리 순례를 든든히 시작하도록 아침 떡을 찬조해주신 김춘홍 소피아님 감사드립니다. 여러 차례 더블 찬조를 해주셨네요! 또 하루 전에 일산으로 미리 와 숙박을 하시면서 순례에 동참해주신 단원들이 계십니다. 그 정성에 무한한 존경을 표합니다. 앞 좌석에 간식 과자를 쏟아붓고 사라지신 날개 없는 천사 단원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매번 성지에 묵주를 봉헌해주시는 매듭묵주팀에게도 절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풍동팀이 애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0월에는 현재 신앙의 길 순례에 참여하고 계신 단원들의 의견도 있고 해서, 장거리 순례가 아닌 단거리 순례로 단장님이 고민해보겠다고 하십니다. 계획 잘 짜서 공지해 드릴테니, 환절기 건강 관리 잘하시고, 추석 명절 복되게 보내시고, 10월 순례에서 반갑게 뵙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의 길 도보 순례 중인 우리 단원들과, 오늘 마산교구에 다녀온 우리 순례단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새벽에 일어나는 과정에 유혹을 많이 받지만 일단 집을 나서면 참 잘했다고 자신에게 칭찬을 합니다.
선조님들은 얼마나 많이 매번 유혹을 받았을까요....
이 분들이 있었기에 높고 푸르는 하늘과 바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신앙선조님들 오늘도 감사합니다.
순례길에서 오롯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 좋습니다.
좋은 사진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