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2) - 괴벨스의 전성 시대(소련 침공 전까지)
1. 제국의회 방화사건 이후, 모든 권력을 장악한 나치 시대와 함께 괴벨스의 전성 시대도 시작되었다. 그는 ‘제국국민계몽선전장관’이 되었고 주요한 선전활동을 장악하였다. 신문, 출판, 라디오 뿐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인 ‘영화’의 영역까지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언론인들이나 영화인들이 괴벨스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체코 출신의 젊은 여성배우와 연인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괴벨스는 획일화 정책으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하려 했으며, 그에 대한 수단으로 모든 언론과 미디어를 활용한 조작, 과장을 서슴지 않았다. 괴벨스의 주택과 관저는 점차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품을 가득차게 되었고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손안에 쥐게 되자 괴벨스의 욕망은 점차 커져갔다.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퇴폐미술 전시회“도 창조적인 미술을 부정하고 특정한 나치적 예술관을 주입시키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였다. 피카소나 샤갈과 같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도 여기에 포함되어 외국에 팔리거나 소각되었다. 괴벨스의 선전 활동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더욱 극성스럽게 전개되는데, 독일의 군사 재무장화를 경계하는 외국의 시선을 속이고 평화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교묘한 선전선동과 다큐를 통해 세계 평화에 일조하겠다는 거짓된 의지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2. 괴벨스에 대한 히틀러의 지원은 전폭적이었다. 히틀러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태도를 보였던 괴벨스에 대하여 매우 친근하게 부부의 일에 관여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신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분리하여 통치하라’라는 모토처럼 모든 선전활동의 권한을 괴벨스에게 전권위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몇몇 주요한 인물을 또다른 선전 활동 직책에 임명하여 괴벨스를 견제하게 하였고 주요한 군사적, 정치적 결정에는 배제하였다. 괴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결정된 결정에 대해 교묘하고 합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괴벨스가 갖고 있던 신념과 다른 히틀러의 결정(소련과의 협조, 전쟁의 결정, 유대인에 대한 유보적 결정 등)에도 그는 찬사와 함께 절대적 동의를 표하는 글과 연설을 만들어내어야 했다.
3. 괴벨스는 자신의 연애관계가 결혼생활에 위기를 가져오고 정치적, 윤리적 불안을 느낄 때마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반유대주의적’ 광신에 몰두하게 된다. 유대인 절멸정책은 히틀러가 갖고 있던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다.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점차 강도를 더해갔다.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에서 공무원에서 유대인들을 축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국국민법’을 개정하여 유대인의 법적인 지위를 박탈하였다. 유대인들은 재산신고의 의무를 갖게 되었고 강제로 유대인을 나타내는 표찰을 착용해야 했으며 탄압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피해배상금을 강제로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 박해는 한 유대인 청년이 프랑스 주재 독일 외교관을 살해한 사건에서 최고조로 폭발하였다. 흥분한 독일시민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심각한 테러와 살인를 저질렀고 상점은 파괴되었다. 일명 ‘수정의 밤’(포그룸의 밤)이다. 언론을 장악한 괴벨스는 사건의 규모를 축소하도록 지시했고 외국을 의식하여 사건을 은폐하였다. 나치가 갖고 있던 최종 계획은 일명 ‘마다카스카르 계획’으로 모든 유대인을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4. 권력을 잡은 나치는 선전활동과 독일의 확장을 통해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한 선전활동의 중심에는 괴벨스가 있었다. 괴벨스는 전 국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실업퇴치’, ‘민족적 명예의 재건’, ‘모든 사회적 장벽을 가로지르는 민족공동체’와 같은 구호를 활용하였다. 선전활동부의 실재적인 목표인 “그들이 우리에게 빠져들 때까지 개조하는 것”을 꾸준하게 실행하였던 것이다. 선전활동의 효과는 제국의회 선거에서 99%의 지지를 받았을 때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의 독일을 만들려는 나치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공격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식인들은) 불타는 이상주의적 심정보다는 깔끔하고 차가운 이성의 힘을 더 믿으며 여기저기서 악취를 풍기는 지식인들에게서는 이러한 능력(소박하고 건전한 신앙의 능력)이 어느 정도 퇴화되었다,”라고 비난하였다. 법률에 대한 괴벨스의 인식은 철저한 정치적 도구라는 관점이었다.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결단에 합법적인 외양을 부여하는 일”만이 법률가들의 역할이며 그것도 “독일로부터 아니 전유럽으로부터 유대인들의 추방이 확정되고 난 후에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5. 나치 아니 히틀러의 평생의 야심은 유대인 절멸과 함께 동부 지역에 독일의 ‘생활권 확보’였다. 즉 동부 지역에 거대한 독일 제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치는 하나씩 행동을 시행한다. 우선 내부의 방해물인 ‘돌격대’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나치당의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돌격대 세력은 ‘민병대’적 성격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전국민의 국방군 체제로 전환하려는 히틀러에게는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런 이유로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돌격대 지도자들을 습격하여 이들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다른 정치적 반대자들을 동시에 숙청하는 작업을 실행하고 의회에서 합법적으로 추인받는다. 일명 ‘긴 칼의 밤’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34년 여름에 일어난 그 사건의 참된 맥락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다시 한 번 부르주아적 보수 세계와 그 정치적 기구들과 오직 겉으로만 화합하여 그들을 더 확고하게 자신의 끝없는 권력욕의 단순한 도구로 격하시키려 한다는 것을 예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6. 나치는 군사력 강화를 위하여 ‘병역의무제’를 도입하고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시도한다.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다. 그런 다음 선전활동을 통해 체코와 폴란드의 독일인들이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과장하고 이들의 해방을 위해 공격의 명분을 축적하고 결국 공격을 정당화하였다. 히틀러는 베르사이유 협정에서 금지한 군사력 증강포기를 어겼고 로카르노 협정에서 금지한 지역의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또다시 침략전쟁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외교적이고 선전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평화’를 강조하는 정치적 위선을 나타냈다. 영국과의 비밀 협상을 통하여 영국의 식민지를 인정하고 현재의 서쪽 경계선을 유지하는 대신 동쪽 지역의 진출을 용인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가장 강력한 서방 국가인 영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점차 무력을 앞세운 침략적 정책을 강화시켰고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북방의 노르웨이, 덴마크에 대한 공격, 계속하여 벨기에, 네덜란드를 공격하였으며 결국 프랑스의 파리를 점령하게 되었다.
7. 히틀러의 동유럽을 향한 ‘생활권의 확보’ 정책 결정에서 괴벨스는 배제되어 있었다. 비밀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고 다만 결정된 사항에 대한 선전활동 임무만이 부여되었다. 전쟁의 확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괴벨스는 히틀러의 결정에 의해 진행되는 팽창정책에 대한 회의가 분명하였고 그 결정이 가져올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심은 기만적인 방식으로 히틀러의 행동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괴벨스는 전세계에서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의 위협에서 서양을 사수한다는 히틀러의 사명에 대한 망상적 신념의 세계 속으로 더욱 빠져들어 갔다.”
8. 히틀러는 ‘마드리드(스페인)에서 요코하마(일본)까지의’의 대륙블록 계획을 통해 영국을 고립시켜려 했다. 여기에는 프랑스와 소련도 포함되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통해 미국의 참전을 막고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동부의 생활권 확보를 안전하게 시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동부와 중부 유럽에 대한 야심을 점차 드러내자 “서부 전선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동부에서 ‘생활권’ 획득이라는 본래 목표를 위해 행동을 개시할 것이며 이를 통해 양면 전선 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것”이라는 은밀한 계획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소련에 대한 공격이 기정사실화되자 괴벨스는 다시 그 점을 합리화시켜야 했다. “소련은 우리가 허약해지면 공격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양면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 이제 예방작전을 통해 이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 나는 러시아인들의 전투력을 낮게 평가하는데, 총통 보다 더욱 낮게 평가하고 있다.”
9. 소련의 침공과 함께 실패를 모르고 진격하던 나치의 신화는 붕괴의 조짐이 나타날 것이다. 그와 함께 괴벨스의 몰락도 동반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괴벨스의 최후가 전개된다.
첫댓글 - 확신과 불안, 선동과 몰락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