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 : <통영 오광대>
1. 경남 지역 ‘가면극’은 낙동강을 경계로 ‘수영과 동래’의 들놀이(야류)와 ‘고성, 가산, 통영’의 ‘오광대 놀이’로 구분된다. 이들 가면극은 대부분 합천 초계의 밤마리 장터에서 벌어졌던 ‘대광대패’의 놀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영오광대 또한 초계의 오광대가 마산의 오광대로 전승되었고 다시 통영으로 이어졌으며 통영 오광대는 고성 오광대 놀이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들 가면극은 중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승려’에 대한 비판이나 조롱은 별로 보이지 않고 주로 양반의 허위나 위계에 대한 공격이 중점을 이루고 있다. 특히 ‘통영’은 17세기 삼도수군 통제영이 이전됨으로써 중요한 방어지역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들과의 마찰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항상 새로운 것의 유입은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2. ‘통영 오광대’는 크게 5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었지만, 대부분의 마당이 양반에 대한 공격과 양반을 극복하려는 민중의 의식이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다. 첫째 ‘문둥이’마당에서는 조상들의 죄업으로 문둥이가 된 양반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고통과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흥과 신명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에게는 고통의 원인이었지만, 양반의 허위의식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모양 이꼴이 되었으니 양반인들 무엇이며 재산인들 쓸데있나 이 세상을 파탈하고 살아 생전에 마음대로 놀다가 죽을라네.”
3. 두 번째 ‘풍자탈 마당’에서의 양반은 더 심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7명의 양반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말뚝이를 불러 놀리려 한다. 하지만 말뚝이는 오히려 양반들의 근본이 갖고 있는 내력을 밝혀내어 그들의 신분적 허위 및 비정상적인 모습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신분과 근본이라는 혈통주의를 내세운 양반들이 결국 허접한 신분(기생, 노비, 떠돌이, 두명의 아비 등) 출신이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다. 말뚝이는 7명의 양반의 공격에도 혼자서 굳건히 상대하고 그들을 압도하는 힘과 위세를 보여준다. 민중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다. 결국 말뚝이는 자신의 신분을 과장하여 양반들을 무릎꿀린다. 혈통을 바탕으로 한 신분상의 우위는 거짓된 허세임에도 더 큰 신분의 과시를 통해 무너지는 것이다. 말뚝이가 양반들에 대한 훈시는 비록 백일몽적인 상황이지만 민중들에게 커다란 쾌감을 선사했을 것이다. “나 이놈 말들어라. 너어가 행사 볼진대는 능지처참을 할지로되 인간의 도리로서 차마 죽이지 못하노니 너게 용서할 것이니 너거(의) 마음 개심하여...”
4. 말뚝이는 재치있는 언변과 위협적인 동작을 통해 양반들을 제압하고 양반들을 숭고한 존재에서 비속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풍자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양반들에 대한 공격이 혈통의 우위 및 신분적 과시를 통해 반격되고 있다는 점은 근본적인 인간 해방에 대한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신분적 향상에 대한 욕구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동학의 근본정신인 ‘사람이 곧 하늘이다’와 같은 평등적인 사고보다는 양반 신분이 내면적으로 보잘것없다고 공격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말뚝이 자신의 높은 신분을 과시하는 모습은 여전히 양반과 상민의 계급적 우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적 사고는 결국 현실에서도 수많은 백성들이 양반으로 신분세탁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웃지못할 사회적 현상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5. 그럼에도 ‘통영오광대’에서 표현되는 양반에 대한 풍자와 공격은 민중들이 평소에 지녔던 억압과 불만을 해소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가면극에 등장하는 양반들은 지조도 신념도 베짱도 없는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영노탈 마당’에서 비비양반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영노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감추거나 다른 대상을 희생양으로 내세우는 비겁하고도 찌질한 존재이다. 어떤 위엄이나 용기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양반은 영노새에게 잡아먹히면서 민중들에게 쾌감과 복수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6. ‘통영오광대’는 승려에 대한 풍자는 없지만, 가부장 제도 속에서 할미가 겪게 되는 아픔은 적절하게 표현된다. 세상을 떠돌다 힘겹게 만난 영감과 할미는 영감이 얻은 첩 ‘제자각시’가 낳은 자신 때문에 다투게 되고 결국 할미는 제자각시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할미가 겪게 된 민중적 설움에 대한 공감과 해원을 보여주는 동시에, 낡고 병든 것은 새롭고 생명력 넘치는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자연적 진실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7. 경남 지역 가면극에서 등장하는 특별한 존재가 ‘포수’이다. 중부 지역 가면극에서 나쁜 것을 쫓아내는 역할을 ‘눈끔적이나 연잎’과 같은 신적 존재나 사자와 같은 맹수가 보여준다면, 경남지역에서는 ‘포수’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통영오광대에서도 담보와 사자가 싸워 사자가 담보를 잡아먹지만, 포수가 등장하여 사자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포수의 모습은 무당굿에서 사악한 것을 제거하는 군웅신이나 장군신 같은 신적 존재의 세속적인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며 민중들이 직면하는 자연적 재난이나 사회적 고난을 제거하는 하나의 영웅적 모습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포수는 어쩌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을 제거하는 새로운 영웅상의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8. ‘통영오광대’의 핵심은 양반에 대한 풍자이자 공격이다. 여기에서의 풍자는 중부 지역 가면극의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방식과는 달리 더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고 근본적인 혈통의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공격적인 태도의 성격도 강하다. 더 직접적이고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양반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과거 본격적인 가면극을 하기 전에 ‘사또놀이’라고 하여 민중 중에서 한 사람을 사또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괴롭힌 양반들을 징죄하는 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이 지역에 강한 양반에 대한 적대감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지역의 전설 중에서 말뚝이라는 마부가 양반들의 내력을 조사하여 양반들을 공격했다는 것도 이 지역의 민중적인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9. ‘통영오광대’는 후대에 양반과의 갈등을 좀 더 유연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변모되었는데, 그것은 시대적 변화와 신분적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유연해진 점이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통영오광대’ 속에서 표현되는 양반에 대한 비난은 성장하고 있는 민중들의 의식과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으며 비록 제한된 상황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변화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양반을 압도하는 말뚝이의 기세와 말뚝이를 통해 터져 나오는 신분적 상승에 대한 가열찬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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