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박군 묘갈명(上舍朴君墓碣銘) 병서(幷序)
나는 전날 선산부 동편 해평 고을에 숨은 선비인 용암龍巖 박택지朴澤之가 있다는 것을 들었으나, 아직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 뒤 박군은 사람들에게 잘못 듣고 나를 마음으로 상통하고 학문으로 상의할 만한 자인가 하여서, 먼저 글로써 주고받고 이어 자기가 편찬하는 책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는데 한번은 특히 방문하려다가 중도에 물에 막혀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가 나와 사귀려고 이처럼 부지런히 노력하였는데, 나는 병이 들어 한 번도 그의 집에 가서 서로 만나는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뜻을 저버린 것이 매우 부끄럽다. 그러나 일찍이 그가 만든 《격몽편(擊蒙編)》과 《자양심법지론(紫陽心法至論)》이란 것을 얻어 보고 그가 이 학문에 종사함이 오래되고 정주(程朱)의 말에 힘쓰기를 더욱 깊이 하였음을 알았고, 또 그가 편집한 《경행록(景行錄)》ㆍ《삼후전(三侯傳)》ㆍ《위생방(衞生方)》등의 책을 보았는데, 다 성현의 사적을 사모함과 충의의 격동함이며 정욕을 막는 것이었으니, 그 사람의 학문과 실행이 반드시 근본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임술년(1562, 명종17)에 군이 병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에 그 장자嗣子 연(演) 등이 군의 세계(世系)와 지행(志行)을 갖추어 기록하여 편지로 명(銘)을 청하였다. 아, 나는 군과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았지만 정신으로 부합함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무슨 말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군은 젊을 때부터 뜻이 범상하지 않았다. 기묘년(1519, 중종14)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이어서 송당(松堂) 박 선생(朴先生)을 서울에서 뵙고 학문하는 큰 방법을 물어 알았다. 뛰어난 자질에다 옛날의 학문을 믿고서 그것을 몸에 실천할 것을 생각하여 세상의 속된 습관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나날의 행실에 나타난 것이 기록할 만한 것이 많았다. 그 몸가짐은 용모와 안색이 단정하고 언어가 믿음직스럽고 고인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토론하고 날로 부지런히 힘써서 닦고 살피는 공부가 갈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는 안색을 살피고 뜻을 맞추어 한결같이 어김이 없어서 주리면 배불리 하고 차면 따스하게 함을 다 알맞게 하였다. 상주 노릇을 할 때는 애통함이 예(禮)에 극진하여 1년 동안이나 죽을 먹고 3년을 마치도록 시묘(侍墓)하여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여위어 뼈만 남았고 담제[禫] 후 길제(吉祭)에 이르러 비로소 정침(正寢)에 돌아왔으며, 그 제사에는 삼가 제계(齊戒)를 조심히 하여 친히 찬을 갖추고 자제와 비복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게 하여 그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삭망(朔望)의 전(奠)은 반드시 고조 증조에까지 미치고, 기일(忌日)에는 의관을 희게 하여 곡읍(哭泣)을 예법대로 하였다. 그 가정을 다스림에는 은혜(恩惠)가 있고 의리(義理)가 있어서 처와 첩이 각기 분수를 편안히 하여 다투지 않았으며, 그 동리의 친척에게는 곤궁하면 도와주고 환란을 당하면 구휼해 주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남의 집에 초상이 난 것을 들으면 각각 정분을 따라 차등 있게 소찬(素饌)을 먹었다. 착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며, 과실은 덮어 주고 아름다움은 드러내 주며, 일을 만나면 재량하여 처치함이 도리에 합하기에 힘썼었다.
내가 앞에서 말한 《격몽편(擊蒙編)》이란 글을 보니,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로 부분을 나누어 도에 들어가는 요지(要旨)로 삼았다. 군이 학문에서 얻은 바가 이와 같으니 이것은 진실로 모든 착한 행실이 여기에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 공자가 자천(子賤)을 말하되, “군자답구나,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으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덕을 얻었으리요.” 하였다. 선산(善山) 고을에는 앞에는 길재(吉再) 선생의 풍절(風節)이 있고, 뒤에는 박송당(朴松堂) 정 청송(鄭靑松)의 도의(道義)가 있었다. 비록 군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웠으나 만약에 이런 분들이 남긴 공이 아니었더라면 어느 곳에서 취하여 성취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고 가상히 여기게 하는 점이다.
군의 이름은 운(雲)이요, 택지는 그의 자(字)이며, 용암은 그의 호(號)이다. 그 선대는 밀양(密陽)으로부터 두 번이나 옮겨 해평에 이르렀고, 먼 조상은 화(華)이니 고려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고조의 휘(諱)는 상온(尙溫)이니, 내시중랑장(內侍中郞將)이요, 증조의 휘는 운실(云實)이며, 조의 휘는 효무(孝武)이니 다 숨어서 벼슬하지 않았다. 고(考)의 휘는 종원(宗元)이니 성균 진사요, 비(妣)는 허씨(許氏)이니 생원(生員) 양(諒)의 딸이며, 가락군(駕洛君) 창(敞)의 후예이다. 공은 홍치 계축년(1493, 성종24) 6월에 나서 임술년(1562, 명종17)에 이르렀으니 향년이 70이며 모년 모월 모일에 모산 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군의 전취는 사인(士人) 김백(金栢)의 딸이요, 후취는 교수 김헌(金瓛)의 딸인데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장남 호(灝)는 생원으로 공보다 한 해 앞서 죽었고, 둘째는 연(演)이요, 딸은 생원 이인수(李仁壽)에게 출가하였는데 전취가 낳았고, 막내는 담(湛)이니 후취 임씨가 낳았다. 호와 연은 모두 아들을 두었으나 아직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힘썼도다, 용암이여 亹亹龍巖
스스로 세속에서 빼어났도다 自拔流俗
뜻을 분발하여 배움에 향하니 奮志向學
성현을 본받으려 하였도다 謂聖可則
동향에 선진(先進) 있어 邦有先達
묘결(妙訣)을 열었도다 導啓玄鑰
벼슬길에서 물러와 몸을 닦고 退修于躬
다시 경전에 근거하였도다 重驗經籍
효제와 충신이 쌓여서 孝悌忠信
숨은 덕이 되었네 蓄爲潛德
아름다운 동산 숲에서 有美丘園
한가로이 스스로 즐기었네 婆娑自樂
세월이 저물어지니 歲月晼晩
동지를 생각하도다 寤寐同好
이 글을 나에게 부탁하니 謬屬於我
외람되어 부끄럽네 深愧叨冒
얼굴은 못 보았으나 顔範未覿
마음은 서로 통하였네 心期相許
군이 손수 편찬한 책이 있어 君有手編
그 단서를 내게 보여주었네 示我端緖
깊은 의미는 해처럼 환하고 微言揭日
성인되는 길은 손바닥 보듯 하였네 聖途指掌
혹시나 의심이 있으면 其或有疑
충고의 말을 주고받았네 苦言還往
허심탄회하게 나의 말을 듣고 俯聽虛襟
고치기를 꺼리지 않았네 不憚其改
그대에게 힘없어 君惟麗澤
나 역시 얻은바 있도다 我乃受采
난초 같은 정분이 永擬蘭契
영원할 줄 믿었더니 無替其芬
하늘이 어이 무심한가 天胡不憖
나의 근심 크고 크네 使我殷殷
아름답다 그 고을이여 懿彼鄕邦
사우(師友)가 빛나네 師友彬彬
가상하다 용암이여 我嘉龍巖
학문에 연원이 있도다 學有所因
용암은 갔으나 龍巖之逝
유풍은 완연하네 宛其遺風
후인으로 하여금 尙俾來者
영원히 계승하여 흥기하게 하리라 嗣興無窮
[주1] 길재(吉再) 선생 : 1353~1419. 본관이 해평(海平)이고, 호가 야은(冶隱)이다. 조선이 개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고향 선산에서 은거하였다.
[주2] 박송당(朴松堂) : 박영(朴英 : 1471~1540)을 말한다. 무인으로 이름이 났으며, 성종이 죽은 뒤에는 선산의 낙동강변에 집을 짓고 학문에 힘썼다. 저서에 《송당집(松堂集)》이 있다.
[주3] 정 청송(鄭靑松) : 정붕(鄭鵬 : 1469~1512)을 말하다.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인데 청송 부사를 지냈으므로 정 청송이라고 한 것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는데 박영(朴英)은 그의 문인이다.
[주4] 난초 같은 정분 : 《주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냄새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其臭如蘭]”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