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여백이 있는 곳] 에코백(Eco Bag)
며칠 전 길가에 걸린 현수막이 내 눈길을 끌었다. <빽 없는 사람 당원 모집>이란 글 옆에 웬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모 브랜드의 명품 가방 사진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어느 정당의 당원 모집 플래카드였다.
처음엔 참신한 아이디어에 피식 웃음이 났다. 말장난 같은 문구와 명품 가방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딱 들어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현수막을 한참 지나치고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게 빽없는 사람이라는 글귀가 떠오르며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빽’이라는 단어는 참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권력의 줄을, 누군가는 어깨에 멘 명품 가방을 빽이라 한다. 요즘은 시골 오일장 트럭 옆 가판대에도 구찌, 루이뷔통, 샤넬 가방이 즐비하다. 물론 진품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 모양새만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손을 멈추게 한다. 그런 걸 보면 백이라는 건 단순한 가방이 아닌 그 사람의 위치나 취향, 심지어 욕망까지도 담아내는 상징이 된 듯하다.
나는 명품 가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흔한 명품 가방을 내 돈 주고는 사본 적도 없다. 외국 여행 갈 때 면세점에서 마음에 꼭 드는 가방을 들고 계산대로 가보면 터무니없는 높은 가격에 놀라 망설이게 되고 그렇게 돌아선 일은 몇 번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명품보단 에코백이 더 편하다. 그 안에 지갑과 필요한 물건들을 가득 넣어도 되고, 가방이 망가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좋다. 가방은 겉으로 보이는 상표와 디자인보다는 여러 가지를 넣을 수 있는 기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백일까? 명품은 아닐 것이다. 내 외모는 화려하지도 않고 명품 가방처럼 비싼 로고를 대신할 만큼 돈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껏 수수하고 편안한 것만 고집하며 살았다. 유행을 타지 않는 에코백처럼 말이다.
바람이 있다면, 나름의 사연이 묻어 있는 낡았지만, 레토르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가방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너무 가볍다고, 허름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가 걸어온 시간이 진품이라고 믿고 싶다.
삶의 길목에서 어깨끈이 닳도록 이리저리 매고 다니던 손때가 묻은 가방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가볍고 실용적이되 속은 묵직한, 더러워지면 언제든 깨끗하게 빨아 쓸 수 있는 가방 말이다.
세상은 여전히 연줄을 따지고 백을 욕망하지만, 나는 내면이 꽉 찬 사람이 되고 싶다. 명품이든 에코백이든, 그 안에 담긴 삶이 곧 나의 가치를 말해줄 테니까.
비 내리는 어느 날, 카페에서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친구의 한쪽 어깨가 젖어 있었다. 우산을 쓰고 왔을 텐데, 옷이 많이 젖은 것이 이상해서 물으니,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아유, 이 애물단지 가방이 뭐라고 내 어깨 젖는 줄도 모르고 가방 젖을까 봐 우산이 자꾸 가방 쪽으로 기울더라고.”라고 했다.
그제야 친구의 어깨에 걸린 뽀송뽀송한 샤넬 백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친구와 가방의 서열이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주차장 입구에서 머리가 젖는다며 우산 삼아 비를 피했던 가방이 후줄근하게 젖은 채 걸려 있었다. 순간, 내 가방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가방은 손자가 초등학교 삼 학년쯤이었을까, 손자가 그려준 바다 풍경을 바탕으로 만든 에코백이다. 에코백에는 푸른 바다색 바탕 위에 형형색색의 물고기, 불가사리, 해파리, 거북이와 오징어가 해맑게 웃으며 헤엄치고 있다. 바닷속 생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데, 나는 그 웃음 속에 손자의 맑은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느꼈다. 가방을 쳐다볼 때마다 ‘우리 손자가 참 행복하구나’하는 마음에 안심되었다. 그 가방을 볼 때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직장 다니는 딸을 대신해 15년간 손자를 키우는데 그 가방의 그림이 내 노고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다.
나는 그런 에코백처럼 누군가의 하루를 담아주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 쓰여도 헤지지 않는 튼튼한 마음이 되고 싶다. 지나친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브랜드는 없지만 웃음이 번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사람, 겉은 소박하지만, 그 안에 무한한 사랑과 추억이 담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