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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과 보상 [눅6:27-38] 신p.99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저와 여러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1:28-30]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모든 것을 다스리고, 소유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것! 그것이 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주신 복입니다. 이것인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로 가득한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차마 보실 수 없게 되자 심판하십니다. 그것은 40일간의 비를 내리심으로 방주에 탄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을 제외 한 땅 위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후 방주에 탔던 모든 생물을 땅으로 인도하신 후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9:1-3]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3.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천지를 창조하신 후 복을 주셨음에도 불순종의 죄로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노아의 홍수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복을 누릴 은혜를 주셨지만 자손이 번성하자 또 큰 죄를 저지릅니다. 죄를 지었지만 용서와 은혜를 주셨음에도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늘 죄만 짓었습니다. 사람들은 벽돌과 역청을 이용하여 큰 성을 하늘까지 닿게하는 교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내는 죄를 범합니다.
[창11:3-4]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할 권리, 은혜를 주셨지만 첫 아담부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악과, 술취함과 방탕함, 높은 탑과 같은! 물질의 욕심, 권력의 욕심, 명예와 쾌락으로 행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사랑의 유무에 달려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을 잃어버리자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고, 방황하고, 사망과 저주의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사 사람들을 하나님의 완전한, 가장 완벽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예수의 몸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흠 없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만이 저와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따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가요? 이 세상은 사랑이 식어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24장을 보면 많은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난리와 난리, 소문이 넘쳐나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많이 보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곧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까요? 8절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이미 시작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작으로..
[마24:9-13]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많은 사람의 사랑이 어떠해진다고 하시나요? 식어진답니다. 지금 시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않기에 사랑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인생이 되었고,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일까요?
1.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27-28절)
1.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는 것입니다.
-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향해 미움으로 받아치면 어떻게 될까요? 미움이 커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움이 더 커지게 되고, 걷잡을 수 없게 상황이 되면 모두가 큰 상처를 입고 평생을 미움속에서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선대하는 것입니다. 미움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아멘!
2.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 부정적인 언어는 긍정적인 언어보다 10배 이상 힘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저주는 사람을 죽이는 언어입니다. 우리가 저주하면 상대방도 저주하겠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하면 그도 살도, 나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언어가 긍정적인 언어보다 10배 이상 힘이 있지만 또 다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면 100배 이상의 축복이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저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면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결코 아무런 해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저주하던 자가 오히려 해를 입거나,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날 것을 믿으시면 아멘!
3.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 왜 모욕할까요? 때론 부부끼리, 부모 자식이, 성도 간에 서로 모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함부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잘났다고, 내 맘대로 하겠다고 휘두를 때 모욕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모욕한다면 그 이유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요16:2-3] 2.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하리라 3.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무엇이 무지하다고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지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무지한 이들을 깨우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 힘든 대상은 원수일 것입니다. 원수는 그야말로 나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입니다. 절대 내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고, 만난다면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줘야 할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은 정말 큰 고통을 안겨준 원수로 인하여 시험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흔들릴만한 아픔을 갖고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혹스럽고, 좌절스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도 순종하는가 지켜 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게 다 내려놓고, 기꺼이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실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생의 주인으로 확실히 붙드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자비로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29-36절)
1.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을 돌려 대는 것입니다.
- 다른 뺨을 맞아라!가 아니라 다른 뺨을 맞을 각오로 덤비지 말고, 참아라!
하나님께 맡기고, 약속의 말씀을 믿어라!는 말씀이십니다.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결하는 인생이 아니라, 해결받는 인생이 되라!”
[시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원수의 뺨을 치시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뺨을 치는 원수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같이 뺨을 친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복수로 모든 인생을 허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고 참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의 뺨’을 한방에! 내 손에 더러움을 묻히지 않고 해결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2.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는 것입니다.
- 강제든, 속여서든 빼앗기면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고,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법정까지 가려하지 말고 손해를 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노상 강도들은 겉옷을 걸친 사람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속옷까지도 빼앗아 가는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예수님은 저항하지 말고, ‘다 가져가쇼~~, 어이쿠 시원하다~~’ 반항도 하지 말라니...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수치스럽고,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배후에는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깡패에게 빼앗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불쌍한 자를 향해서 어떤 마음을 소유하는지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불행을 외면하지 말아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감내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까지도 희생할 줄 알아라!’ 라는 불쌍한 자들을 위한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3.구하는 자에게 주며 내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달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예)장발장은 자기를 재워 준 신부의 집에서 은 접시를 훔칩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장발장을 잡아 온 경찰 앞에서 장발장을 두둔하며 왜 은 촛대도 주었는데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가 장발장을 변화시켜 버립니다. 도덕이나 법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자비로운 사랑뿐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는 도둑놈이고, 이유 없이 때리는 이는 깡패입니다. 사회에서는 이들을 악한 자들로 구분합니다.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악한 사람, 우리의 원수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분노합니다. 보복하려 합니다. 왜요? 우리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사람에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분노, 보복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악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 교회와 나라를 분열시키려는 사탄에게 속아서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악한 마음이 늘 스물스물 기어오르고, 사탄에게 속아서 행동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유일하게 사탄마귀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는 마귀는 아닙니다. 속아서, 무지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향해 보복한다면 사람에게 보상을 받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기고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상을 받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들에게 그들이 마귀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자비로운 사랑을 하기를 요청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마치 바보가 하는 행동입니다. 맞아도 ‘헤헤헤~~’, 빼앗겨도 ‘헤헤헤~~’ 아마 ‘미친 사랑, 바보같은 사랑, 어리석은 사랑’입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북한 공작원이 국내에서 활동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김수현은 북한의 남파특수공작 5446부대에서 간첩으로 한국으로 보내졌습니다. 공화국에선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고, 분대장까지 맡았습니다. 그런데 간첩으로 보내진 그의 역할은 동네 바보입니다. 누가 때려도 ‘헤헤헤~’, 굴러 넘어져도 ‘헤헤헤~’, 힘든 일을 시켜도 ‘헤헤헤~’ 하면서 참고, 참고, 맡겨진 바보 임무를 몇 년이나 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영접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임무를 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쉽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도 이러한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한참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비로운 사랑이 사람들간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면 당연한 듯 하고, 한 대 맞을 때 두 대를 때리면 속이 시원하겠죠? 그런데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 속은 시원하고 잠시 기분은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통쾌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불쾌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 임무, 사랑을 할 때만이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3.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까지 포용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 가족이든, 형제든, 직장 동료가 되던,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특별히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은 함께 지내는 공동체, 교회 안의 성도들을 향해서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 안에서 옳고 그름을 배워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깨닳게 되고 선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소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과 악을 알아가다보니 나에게 적용을 하면 은혜가 넘치겠지만, 사람들은 나보다 다른 이에게 이것들을 적용하기가 쉽습니다. 즉,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함으로 다른 이들을 향해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죄해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저러면 안되지! 목사님이 저렇게 행동하시면 안되지! 장로님은 왜 저러실까? 권사가, 집사가 저래도 되나?’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아주 엄격하게 적용하여 비판이 난무하고, 자기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아주 죽을 죄인이 되버립니다.
그러나 심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따라해볼까요?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설령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더 중요한 법입니다. 과거에 한 행동을 가지고 아직도 부여잡고, 현재 하지도 않은 것에 선입견으로만 쳐다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미 판단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판단은 자신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댓가 없이, 공짜라서 공짜가 아닌! 너무나 비싸서, 내가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거저 받음으로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 사람도 용서를 받았고, 나도 용서를 받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면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날카로운 비판력이 아닌 거룩한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판단은 영혼을 무너뜨립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성도간에 불신과 다툼을 불러 일으키는 마귀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별력은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그 거룩한 분별의 결론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비판을 받아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지 않았습니다. 오직 거룩한 분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 희생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특히 교회 안에서 선택해야 할 결론은 판단, 정죄가 아닌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39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어느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리키 잭슨이라는 미국인이 1975년 5월 클리블랜드에서 구멍가게 주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체포됩니다. 당시 열두 살인 에디 버넌이라는 소년이 “잭슨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봤어요”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꼼짝없이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실 그 소년은 현장이 아닌 인근 스쿨버스에 타고 있었고, 거짓 증언을 한 것입니다. 당시 배심원들은 이 증언을 토대로 잭슨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사법 당국이 형을 감해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거짓 증언을 한 버넌은 오랜 세월 동안 양심을 가책을 받아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목사님을 만나 39년 동안 숨겨 두었던 이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나아가서 자신의 증언이 거짓 증언임을 고백합니다. 이로써 잭슨은 39년만에 무죄로 풀려납니다. 두 사람은 39년 만에 교회당에서 만나 서로를 뜨겁게 끌어 안았습니다. 잭슨은 39년 동안 감옥에 있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그런데 오히려 거짓 증언을 했다고 실토한 버넌에게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잭슨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피해자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성령이 운행하시는 공동체라면 비판과 판단의 잣대는 우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흠이 없거나, 비판받을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실수가 없고, 완벽해서도 아닙니다. 흠이 많고, 실수 투성이지만 용서와 용납이라는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허물을 덮고, 정죄하지 않을 때 비판과 판단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시민의 삶을 이야기하실 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듣다보면 정말 예수를 계속 믿어야 할지 말지 고민되시지 않나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보다는 내가 희생만 해야 할 것 같고, 왠지 손해가 넘칠 것 같고, 억울해서 잠못 이루는 밤으로 지새우다가 지쳐버리는게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식 이상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냥 너도 해! 군대 용어로 까라면 까! 뭔 말이 많아? 하고 희생만하다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결론 내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요청에는 희생도 따르지만 그 이상의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받기를 원하시면 아멘?
4.주님께서 보상하십니다.
1.큰 상을 주십니다.
- 여기서 말하는 상은 구원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구원은 주어집니다. 그런데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한 순간 구원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끝까지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가야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상으로,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가는 온전한 완성을 이룰 줄 믿습니다.
2.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됩니다.
-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누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를 공짜로 사용합니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의 유산을 거져 물려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의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3.비판과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 우리가 다른 이를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판과 정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 평안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4.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을 것이 무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사한다고 우리의 죄가 무조건 다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용서를 주실 것이고,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5.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입니다.
- 우리가 가장 기대하는 상, 복일 것 같습니다. 판단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것은 너그러움, 베푸는 마음입니다. 물질을 나누는 것처럼, 마음을 나누고 베풀면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보상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눌고 베푸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겨우 먹고 사는 것이 아닌, 더 남에게 베풀 수 있도록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 3가지
1.원수를 사랑하라! 2.자비로운 사랑을 하라! 3.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
이러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복을 소유하고,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