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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 | 조각 | 행위 | 설치 |
매체 | 화면 | 공간 | 신체 | 환경 |
질료 | 안료 | 재질 | 행위 | 대상 |
이제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의 전망을 논의하기 전에 이들의 배경과 사상과 개념, 활동상황을 점검해보기로 하고 먼저 행위라는 이름으로 묶여지고 있는 미술의 한 양상을 살피면서 설치미술과 연관을 지어보기로 하자.
퍼포먼스와 행위미술
심우성은 로슬리 골드버그의 퍼포먼스를 번역하면서 서문에서 “ 지난 해 창립을 본 <한국행위미술협회> 의 명칭 가운데 <퍼포먼스> 라 했음직한 단어를 <행위미술> 이라고 하고 있음은 서구취향의 <퍼포먼스> 라는 외래적 개념에 국한되지 않겠다는 취지이기도 하다” 라고 쓴 바 있다. 여기에서 행위미술은 퍼포먼스의 번역어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그다지 정확한 지적이라고 볼 수 없다. 퍼포먼스는 행위미술의 한 양상일 수 있지만 행위미술에는 이벤트, 해프닝, 바디 아트, 플럭서스, 퍼포먼스 아트등의 양상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행위미술= 퍼포먼스라는 용례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상식화되어 있어서 오히려 그 배경을 따지는 것이 이상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행위미술이 퍼포먼스로 불리게 되면 그것은 논리상으로 부당주연의 오류에 속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위미술이라는 보편적이고 통시적인 개념이 퍼포먼스라는 특정시대의 미술양상과 동일한 양상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원래 퍼포먼스(Performance)라는 말은 ‘대중 앞에서 행하는 연기’ 의 뜻을 가지는 보통명사이므로 이 맥락에서는 행위미술이라고 번역을 하더라도 무리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엘렌 죤슨은 미술전문지인 애벌랜치(Avalanche)에서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행위의 한 양상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 70년대로 적고 있고 로슬리 골드버그는 퍼포먼스가 1970년대, 컨셉튜얼 아트의 전성기에 싻튼 예술표현의 매체로써 예술이 창작을 통한 예술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이며 예술이란 매매의 대상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행위’ 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콜린스판 미술사전에는 “퍼포먼스 아트는 가끔 해프닝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해프닝에 비하여)보다 연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이벤트로써(해프닝이 특별히 창안된 환경속에서 관객참여를 허용하는 데 비하여)관객참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라고 설명되고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형태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퍼포먼스라는 말로 묶어지는 행위의 양상과 시대를 들어보면 부르스 노만(Bruce Nauman)의 <퍼포먼스 복도 Performance Corridor> 가 1971년, 비토 아콘치(Vito Aconci)의 작품이 1971년,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의 <보관함 Locker Room Piece> 이 1971년,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작품이 1980년으로 적혀 있다. 그러므로 1970년대 이전의 행위미술은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은 이러한 대목에서도 보인다. 행위미술의 역사를 따로 떼어 생각해볼 필요가 여기에 있다.
행위미술의 고형태
역사적으로 행위미술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양상은 명말, 절파(浙派)의 계보인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도적인 인물은 오위(吳偉),장로(張路), 왕악(王愕), 주단(朱端), 종례(鐘禮)로써 이들은 만취하여 동료의 머리에 먹물을 묻힌 후 화지위에 끌고 다닌 후 그 흔적을 보면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유럽에서 이와 유사한 양상으로는 타쉬즘(Tachisme)과 앵포르멜(Informel)을 떠올릴 수 있다. 타쉬즘은 투묵법이라고도 하는 데 먹을 묻힌 솜뭉치를 던지거나 격렬한 행위의 결과로서의 붓자국이 작품이 되고 있다. 솜뭉치를 던지는 행위는 이후 구타이 그룹에서 다시 시도되고 있고 앵포르멜에서 마튀에(Georges Matieu)의 행위로 이어지고 있다. 마튀에는 소방복을 입고 바닥에 불을 지른 후 대형화면에 긴 막대의 붓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비록 행위의 결과로서의 화면이 목적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쇼맨 쉽이라고 빈축을 받기도 했던 행위를 보여준 바 있다. 또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는 앵포르멜에 대하는 미국미술의 양상이며 잭슨 폴록의 드리핑(Dripping)은 행위와 행위의 결과로서의 흔적이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나 광태사학파에서 드리핑까지의 행위는 화면을 위한 보조수단이었으므로 행위에 의한 미술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행위미술이라고 일컫지는 아니한다.
행위가 미술이 되다
그리하여 우리가 행위미술이라고 부르는 미술양상은 1956년 토쿄의 오하라 홀에서 열린 구타이 그룹의 카즈오 시라가, 사부로 무라카미, 지로 요시하라의 행위, 1957년 알란 카프로의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진다. 특히 알란 카프로의 행위는 해프닝(Happening)으로 명명되는데 죤 케이지의 1952년 블랙 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에서의 이벤트(Event)와 함께 행위미술로 간주되지만 묘하게도 행위미술의 원조는 해프닝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구타이 그룹은 국력과 세력에서, 이벤트는 죤 케이지가 작곡가이기 때문에 원조의 자리를 뺏긴 반면 카프로는 마이클 커비(Michael Kirby)와 함께 해프닝의 이론적 배경의 궁구와 개념의 정립에 진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행위미술은 지역이나 지향하는 바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데 바디 아트(Body Art), 플럭서스(Fluxus), 비엔나 그룹의 행위들이 비교적 거론이 되고 있는 양상들이다.
1970년대에 들어 미국의 서부와 동부에서 퍼포먼스 아트라는 이름의 행위미술이 나타난다고 American Artist on Art 225페이지에 명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근거가 확실한 지적이다. 그러나 애당초 이 퍼포먼스라는 말은 ‘연기(演技)’-박정진은 「한국문화, 심정문화」에서 연행(演行)이라고 부르고 있다-라는 보통명사이며 로슬리 골드버그조차 퍼포먼스 아트와 퍼포먼스라는 말을 시대와 양상의 구별 없이, 또한 아무런 개념의 설명이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렇게 무분별한 용례에서부터 퍼포먼스= 행위미술이라는 도식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행위미술의 원조- 해프닝
여기에서 다시 행위미술의 제 양상들에 대한 개념의 정리가 필요함을 느낀다. 먼저 해프닝을 다룬 책들에서 요약해보자.
해프닝은 마이클 커비가 내린 고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논리적인 맥락과 무관한 연기를 포함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공존구조를 이루고 있는 극장의 형태(Happenings might be described as a form of theatre in which diverse elements, including nonmatrixed performing, are organized in a compartmented structure)이다. 여기에 안토닌 아르토드(Antonin Artaud)의 개념을 보태면 보다 해프닝의 개념이 선명해진다. 즉 해프닝은 “움직임, 조화, 리듬의 요소가 동시에 중점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되 음악, 무용, 판토마임, 미미크라이(Mimicry- 흉내나 모방을 주제로 하는 극의 일종)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라는 것이다.
해프닝은 극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으며, 언어적인 요소가 최대한 배제된다. 말이 있다면 그것은 즉흥적으로 대본없이 내뱉어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마치 아쌍블라쥬(Assemblage)에서처럼 그것은 그냥 인간일 뿐이지 논리적인 필요에 의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기획이나 통제, 또는 목적이 없이 금방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며 단지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일회적인 공연을 목표로 하고 있을 따름이다.
해프닝은 환경적 요소를 포함한다. 공간배열과 통제, 관객과의 활발한 교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식의 문제이다. 그러나 환경이라는 개념에는 역시 선조가 있다. ‘발견된 환경’은 1921년 앙드레 부르통(Andre Breton)의 발의에 의해 처음 선보였기 때문이다.
1921년 생 페레이유(Sans Pareil)화랑에서 열린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꼴라쥬 번안행위가 해프닝의 직계선조로 꼽히고 있는 데 그 후손인 해프닝은 많은 분야와 연관 내지는 영향관계를 맺고 있다. 즉 해프닝은 무용에서 3차원의 공간을, 초현실주의에서 꿈의 활용방법과 컴바인 페인팅을 거친 환경의 개념을, 르네 끌레르(Rene Clair), 루이 브뉘엘(Louis Bunnel), 쟝 콕토(Jean Cocteau)영화들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루솔로(Russolo)의 소음음악(Noice Music), 죤 케이지의 우연기법과 불완전 및 불확정성이, 쟝 아르프(Jean Arp)의 우연의 법칙, 뒤샹의 우연, 피카비아, 만 레이, 트리스탄 짜라, 잭슨 폴록등이 영향권에 자리한다. 해프닝은 알란 카프로를 위시하여 짐 다인, 올덴버그등이 참여하였지만 보다 고차원적인 추상형태를 보여준 것은 비논리의 시적 의례를 주제로 삼고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해프닝을 이용했던 로버트 휘트만으로 평가하는 관점도 있다.
신비화의 의식- 플럭서스
반하여 플럭서스는 요셉 보이스, 스푀리(Spoeri), 영(Young), 딕 히긴스(Dick Higgins), 에메트 윌리암스(Emmett Williams), 로버트 필리우(Robert Filiou)가 주요작가이며 게오르게 마쿠니아스(George Macunias)가 쓴 선언문을 요약하면 “비예술이라고 부르는 플럭스 아트의 즐거움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없애고 예술가의 불가피성, 배타성, 개별성, 야망을 없애고 중대성, 다양성, 영감, 기술, 복합성, 심오함, 위대함, 제도적이고 상품적인 가치에 대한 허식을 없애는 데 있다. 반면 단순하고 자연스런 사건이나 오브제, 게임, 넌센스 퀴즈등에서 볼 수 있는 비구조적이고 반 극장적이고 반 바로크적이며 비개성적인 성질을 구현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플럭서스 아트는 스파이크 죤스(Spike Jones)와 개그, 게임, 보드빌(Vaudeville), 케이지(Cage)와 뒤샹(Duchamp)의 혼합체” 라는 것이다.
음악적 단선구조- 이벤트
이벤트는 죤 케이지가 창안한 예술의 형태로서 “단선구조적 사건은 1960년대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혼합재료작가들의 규범적인 행위가 되었다. 이 행위들은 주로 작곡가인 한사람의 퍼포머가 등장하면서 환경적인 요인이 거의 배제되며 다른 유사한 사건중 콘서트의 일부로써 일어난다” 고 정의되고 있다. 단선구조적 사건이라는 정의에 걸맞게 단순한 전파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라 몬테 영(La Monte Young)이 가장 이벤트의 성격을 잘 구현해주는 추종자로 되어 있다.
환경속의 인체- 바디 아트
바디 아트(Body Art)는 주로 미국 동부의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의 양상이며 짐 맥레디(Jim McReady)가 만든, 네 명의 여자가 빛나는 나일론을 뒤집어쓰고서 카펫 위를 걸어가면서 만들어지는 바 1970년 작 <소리나는 조각 Sound Sculpture>, 부르스 노만 작품인 <바람의 방 Wind Room>, <회전하는 구체 Spinning Spheres>등의 거대한 환경작품과 아울러 남녀의 일그러진 표정이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포르노 前派- 비엔나 스클
비엔나 학파(Vienna School)는 가학적 환상을 만들어내는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류의 폭력적 예술이 판을 치는 그룹이다. 니치의 OM 극장은 1957년에 구상되었으나 1961년에 대중에 공개되었다. 이 그룹은 유서 깊은 비엔나의 예술전통에 힘입어 세인의 눈을 끌었는데 아르눌프 레이너(Arnulf Rainer), 아르트만(H.G. Artmann), 게르하르트 룸(Gerhardt Ruhm)그리고 쿠벨리카(Peter Kubelika)와 라닥스(Ferry Radax)의 영화등의 영향권에서 귄터 부르스(Gunter Brus)의 드로잉이 제작되고 오토 뮐(Otto Muhl)의 리비(Libi(1969)), 엑스포트(Valie Export)의 <O 양의 이야기(the Story of O>가 보여 졌다. 이들의 작품에 대하여 가학적 환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포르노영화도 예술이다 라고 주장하는 류의 똥뱃장으로 해석하여 틀리지 않을 것이다.
행위의 환경화 - 퍼포먼스 아트
퍼포먼스는 데이비드 크림프(David Crimp)의 글에 의하면 “그림을 무대에 올리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 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의 퍼포먼스는 그것은 작가자신이 작품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지적된다. 여기에서 예의 사건은 그림을 무대에 올리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서 재현을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재현이라는 것 또한 재현되어진 것들을 명료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 이 지적의 핵심이 될 것이다.
퍼포먼스는 60년대 중반, 뉴욕의 화랑제도가 구사하는 헤게모니를 도매금으로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배경이 되고 있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며 전혀 상품가치도 없어보이는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의 행태중의 일부가 퍼포먼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퍼포먼스의 성격은 70년대 미술의 양상 중 신체를 이용한 작품이나 자전적인 주제와 내용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의식 부흥 그룹에 참여를 하건 안하건 벽장 속에서 나와 요가를 하고 건강식품을 먹고 조깅을 하며 수영을 나간다는 등의 관심과 같은 류의 관심이 바로 퍼포먼스의 관심이라는 것이다.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의 작품 <보관함속에서의 5일간 생활<The Locker-Five day Locker piece> <사격 Shoot> <이카루스 Icarus>, 비토 아콘치(Vito Aconci)의 <손과 입 Hand and Mouth, Grass and Mouth>,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빙상의 이중주 duets on ice> <이동하는 미국인(Americans on the Move)>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특히 앤더슨의 퍼포먼스 중에서 바이얼린, 노래, 전자제품과 영화의 이미지를 쓴 작품들은 오늘날의 미술양상에서 가장 시적이고 감동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앤더슨은 시각예술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든 작가로 일컬어지는 데 여기서 음악이란 뉴 웨이브(New Wave)와 펑크(Punk)의 음악을 말한다.
상황과 환경의 변주- 설치미술
설치미술은 퍼포먼스와 동일한 상황과 환경을 필요로 하는 미술양상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작가나 관중, 혹은 작가와 관중이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서 일정시간의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형식에서 동일한 접근방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피터 캠퍼스(Peter Campus), 댄 그레이엄(Dan Graham), 부르스 노만의 작품을 비디오 인스털레이션,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작품을 음향 인스털레이션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이 꼭 같이 관중을 하나의 분위기로서, 작품의 활력을 돋구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구축하기 위해서 관중이 필수적으로 현장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가진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설치미술이란 화면에 부착되거나 화면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대상의 주장력이 극대화된 공간 혹은 환경에서 최종적으로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마무리되는 분위기를 자연발생적으로 펼쳐보이는 형태의 미술이라고 정의를 하더라도 크게 물론 설치미술의 정의이려니와 퍼포먼스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제니 홀저의 설치미술이 대상을 수상했다고는 하나 아직 설치미술은 개념의 정의가 진행중인 바 비교적 젊은 미술의 양상이다. 그것은 창창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일면이 있는 대신 아직 관망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뉴욕의 낙서나 폐기물에서 영감을 얻어 몽환적 분위기와 확대된 스케일로 치환해나가는 바 죠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작품인 <망치질하는 사람 Hammering Man at 2,772,489(JB sculp> 에 대하여 보로프스키 자신은 조각으로 소개하고 있고(Sculp), 엘렌 죤슨은 설치미술로, 그리고 루시 스미스는 전통조각에 미니멀적인 의미를 담은 개념미술의 형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로프스키가 고백한 내용으로 보아 2,772,489는 적어도 1만 4천장 이상의 종이에 써나간 숫자임에 분명하므로 충분히 개념미술로 간주될만하고 겔로폼(Gellofoam)으로 만들어진 형체의 단순화로 보아 미니멀적인 의미체계로 볼 수 있으므로 결코 스미스의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직 설치미술의 범주를 설정하는 것이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료는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정은 바다 밑 풍경을 오브제와 환경으로 바꾸어나가는 쥬디 파프(Judy Pfaff)의 경우에도 틀리지 않고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로프스키나 파프와 같은 대표성을 띈 작가들의 작품내용에서부터 설치미술의 개념과 정의가 내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행위와 설치- 미술사 진화의 극점인가.
혹시라도 역사가 진화하는 것이라면 행위와 대상으로 표상되는 미술사에서 최근에 나타나 세력을 굳힌 바 있는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은 인류사에서 말하는 바 현생인류와 비슷한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최소한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진화한 인류가 현생인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생인류가 오늘이라는 시점을 살기에 비교적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가 되어온 것처럼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이 비교적 최근이라고 부르는 당시의 미술환경에 적합한 양상으로 부각되었을 뿐이라는 관점을 빠트리게 되면 마치 현생인류가 바로 인류의 이상형이라는 식의 오류에서 헤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우기 신표현, 신구상이 1900년대 초기의 미학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행위와 설치가 미술사에서 더 이상 진화할 여지를 주지 않는 미술양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표현, 신구상이 미술사에서 답보와 퇴보의 양상이라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이 진화와 진보의 극점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행위나 설치나 단지 기존의 미술양상에서 매체와 질료가 기존의 상식적 범주에서 보아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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