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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에서 엘림으로, 엘림에서 광야로(출 15:22~16: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고난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리라!”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수시로 닥쳐오는 고난 때문에 회의를 느끼고 중도 탈락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혹은 낙심한 나머지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고난의 문제를 잘 넘기면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길바닥에 돌이 튀어나와 있는데, 그 돌에 어떤 사람은 걸려 넘어지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 돌을 밟고 후딱 지나갑니다. 말하자면 같은 돌이라도 사람에 따라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지만 과연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단어가‘마라’입니다. ‘마라’의 뜻은‘쓰다’‘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원치 않는 인생의 마라를 만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마라의 장소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끌고 가실 때, 이스라엘은 광야 길에서 사흘동안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마라’의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었습니다.(25)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라도 마찬가지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다가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마라에 머물고 있을 때 사탄 마귀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라에서 무의미한 고통만 당하다가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마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축복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독자를 번제물로 바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요셉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간 감옥이라는 고통이 있었고, 욥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육체의 가시 같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한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금보다 귀한 믿음을 연단 받은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원천이 된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타는 갈증을 당하다가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고, 그리고 마침내 물샘이 열둘이나 있고 무성한 종려나무가 70그루가 있는 엘림이라는 큰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여정 가운데서도 마라에서 엘림까지 이르는 마라 인생의 반전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고난에 걸려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고난을 디딤돌 삼아 일어서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광야'에서 '마라'로 : 고난에서 고난으로, 오직 믿음으로 승리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하는 중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가로막혔던 홍해를 건너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힘든 곳입니다. 그들 앞에 고난이 계속 펼쳐집니다. 3일 동안 길을 가도 물이 없었습니다. 거리를 환산해 보면 약 53km쯤 됩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걸어가는데 마실 물이 없었으니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2백만 명 (장정만 60만 명이니까 전체는 2백만 명 정도로 추산)이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물, 물, 물 ...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며 물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도 물을 갈망하니까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다 허상이었습니다. 전전긍긍하는데 진짜 물이 보였습니다. 아마 동작이 빠른 사람들이 잽싸게 달려가서 허겁지겁 물을 마셔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원 일입니까! 아, 써!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퉤퉤 뱉어냅니다. 그곳 이름이 '마라‘ 인데 나중에 붙인 것입니다. 히브리어인데 무슨 뜻인가요? '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그들은 마음이 상해서 원망합니다.
24절“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코 원망이나 불평을 하면 곤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의 지도자 모세에게 원망을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고난이 있을 때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원망이 마음에 들어차지 않도록 믿음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나마 모세가 백성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하셨는데 한 나무를 가리켜 주시는 겁니다.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신기하게 단물로 변화됩니다.
5절(상)“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그 나무에 특별한 성분이 있어서 중화시켰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나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그 나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 한다고 해석합니다. 십자가는 죄로 인한 모든 저주와 고통을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힘쓰고 애써 봤자 마라와 같이 헛된 것입니다. 무언가 성취한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쓴물과 같은 고난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을 단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십자가부터‘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와서 새사람이 되어야 세상의 고난이 닥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기 이전에는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결국은 허사가 됩니다. 없어도 문제지만 있어 봤자 별게 아닙니다. 비유하면 이런 겁니다. 아무리 곱하고 더해도 맨 앞에 (-)를 붙이면 헛된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새사람이 될 때 비로소 승리의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승리의 삶이 펼쳐집니다.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기서 치료한다는 것은 질병을 고치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 쓴물 같은 저주와 고통의 삶이 새롭게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변화를 받고 이제는 자기 멋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모든 저주와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 딴에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 3장을 보면 그의 프로필이 아주 화려합니다. 귀족이요 박사요, 권세자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에 참 만족이 없었고 그 대신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했습니다. 마라와 같이 쓴물로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닌 척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더욱더 핍박하면서 악랄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남으로 쓴물 같던 인생이 단물로 변화됩니다. 오히려 환경이나 조건으로는 나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빌립보서는 옥중 서신으로 너무도 열악한 환경에서 기록했을 텐데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느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는데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면 이처럼 고난도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혹시 세상을 살다가 마라와 같은 고난을 만나면 원망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 나와 오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회복과 승리의 역사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광야 인생길에 어떤 고난을 만나도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마라'에서 '엘림'으로 :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승리한 후 출발합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 오아시스가 나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엘림입니다. 그들은 엘림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27절“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큰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결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에서 엘림 까지는 불과 11k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물 샘 12개와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12지파와 70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각 족장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각 지파와 부족 별로 물 샘 한 개씩, 그리고 종려나무 한 그루씩 제공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마시고 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측을 해 봅니다. 이스라일 백성들이 겸연쩍었을 것 같습니다.“이럴 줄 알았으면 원망하고 난리 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나님이 미리 다 준비해 놓고 계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괜히 그랬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광야 인생길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고 계십니다. 문제가 있지만 해답도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하나님의 위로를 준비해 두십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인내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살아가면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위로와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많은 광야라도 인내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광야 인생에서 우리가 실천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광야 인생일지라도 고달프지만은 않을 겁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인생길 중간 중간에 엘림과 같은 하나님의 서프라이즈, 그 놀라운 축복을 준비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120년 전 한국에 들어온 젊은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프랭크 윌리엄스 부부는 충청남도 공주를 기반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한국에서 첫 아들을 낳고 한국의 광복을 바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우광복'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후에 딸 올리브도 태어났습니다. 이듬해 2월 프랭크 선교사는 논산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큰 비를 만났고, 어느 초막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그 초막은 장례를 치르는 상여를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장티푸스 환자의 장례에 사용했던 상여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는 즉시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사의 아내는 갑작스럽게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년 후 아내 선교사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공주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에서 가르치며 이후 47년 동안 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딸 올리브도 풍토병에 걸려서 11살의 나이로 죽었고, 공주에 있는 영명 동산에 묻혔습니다. 공주 영명학교는‘영원한 광명’이라는 뜻으로 남편 프랭크 선교사가 1906년에 세운 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모태는 명선학당인데 이 학당은 유관순 열사가 공부한 곳입니다.
이후로도 영명 학교는 충청도의 청소년들을 독립운동의 인재로 키워내는 주요 거점이 되었습니다.
아들인 우광복 선교사는 영명 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한국은 미군의 하지 장관이 군정 책임자로 활동할 때였습니다.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했던 우광복 선교사는 하지 장관의 참모가 되어 정부 수립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 장관은 우광복 선교사에게 한국을 이끌어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광복 선교사는 어머니와 이 일을 상의했고, 어머니는 즉시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48명을 명단을 작성했는데,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으로 명단이 채워졌습니다. 결국 준비된 기독교인들이 대한민국의 곳곳에 들어가 나라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문교부 장관은 미신 타파에 힘썼고 국방부 장관은 군목제도를 만들어 군선교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의 속기록 첫 장에는 독립운동가이며 감리교 목사인 이윤형 국회의원의 기도로 개회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1% 도 되지 않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딸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에도 한국에서의 사명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선교사와 그의 아들 선교사를 통해 새로운 나라의 아름다운 주춧돌을 놓게 하셨습니다. 우광복 선교사는 1950년 한국 전쟁에도 장교로 참전했으며 1994년 87세의 나이로 한국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열한 살에 죽은 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영명 동산의 동생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지금도 영명 동산에 그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남편과 딸을 잃고도 다시 한국에 돌아와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47년간 가르치며 선교 사역을 하신 어머니와 우광복 선교사님의 삶은 마라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엘림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다윗는 평생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생을 승리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며 노래했습니다. 시23:1~3,5“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길에 여러 가지 고난이 있고, 무언가를 열심히 해도 마라와 같이 쓰라린 시련이 있어도 믿음으로 인내하면 엘림과 같은 큰 은혜를 주십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확신하며 인내하며 기도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광야에서 가나안 까지 : 믿음과 소망으로 전진하다.
다음으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엘림이 정말 좋지만 계속 거기에서만 더 머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다시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엘림에서 새 힘을 얻은 후 다시 출발했습니다. 16:1절“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은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엘림에서 좋았지만 다시 광야로 나아가니까 고생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원망합니다. 이번에는 먹을 양식 문제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었는데 이제 주려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16:3절“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들이 마라와 엘림의 경험을 통해 믿음이 중요함을 배웠음에도 다시 흔들립니다. 그래서 믿음의 연단이 필요한 겁니다. 계속 다치고 또 다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훈계하십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실 텐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16:4절“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정말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은 매일 이른 아침 일정 분량만큼씩 만나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사람은 만나가 남아서 다 썩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6일에는 두 배를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6:5절“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이 경우는 왜 그렇게 말씀 하셨는지 아시죠. 그다음 날인 안식일에는 거두러 가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며 지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광야 인생길에 오직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십니다. 아무 염려하지 않아도 그때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마6:26.28.30~33“26 공증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 하지 아니하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정말 그렇습니다. 지나온 세월 회고해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인생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느 가정의 간증입니다. 예전에는 자녀가 많았잖아요. 6남매였는데 부모님이 시골에서 고추 농사를 지었습니다. 무슨 돈으로 공부시키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6남매 전부 대학 공부를 다 시킬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계산이 안 되는데 어쨌든 그랬습니다. 가만히 회고해 보니까 자녀들이 대학 등록금 낼 때는 고추 농사도 잘되고 고추 값도 많이 올라서 학비를 다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6남매 대학 공부가 끝나니까 고추 값이 내리더라는 겁니다. 다 살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이 다 예비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그럭저럭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가 따로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열심히 통과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광야 인생길의 고달픔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광야와 같습니다. 물이 없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겨우 물을 구했나보다 했는데 마라와 같이 쓴물일 때도 많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십자가 앞에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엘림이 있음을 기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엘림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또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해야 됩니다. 가나안 땅에 가는 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면 하나님이 준비한 만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생길에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천국의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엘림을 우리가 몰랐어도 하나님은 미리 엘림을 아시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은 마라를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에 주저앉아 계신 성도들이 계신가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우리는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좋아하는 청교도들의 인사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견디고 당시의 사회 속에서 오해당하고 핍박당하고 소외당하는 고통의 삶을 견디던 시절 요즈음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인 명언으로 쓰이는 한 메시지가 탄생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The Best is yet to come) 이 말의 원조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외쳐 보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고단하게 사는 이웃들이 보이십니까? 그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렇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이 말을 오늘의 본문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자, 그러면 이제 일어나 다시 한번 외치고 신앙의 여행을 계속하십시오.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이렇게 오늘 우리는 마라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엘림에서 우리의 신앙을 확신하고 다시 광야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마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의 하나이고, 엘림도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하나인 것을 믿기에 다시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