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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독회
-의문들
김연종
의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의사시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시인의사라 칭하기도 하는 누명 같은 명함을 나는 왜 버리지 못할까. 문학과 의학의 연리지 같은 욕망의 실체를 어떻게 해체하고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문학비전공자의 특징인 '닥치고 책읽기'의 후유증이랄까, 나는 논리의 부재에 민감하지만 논리의 비약에도 관대하지 못한 편이다. 그런 나에게 독회를 청한 의도는 타자의 입장에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아무려나 포지션의 늑골 사이에 청진기를 들이댄다. 오진의 후유증은 책임질 필요가 없겠지. 그것은 돌팔이 시사에 청진을 맡긴 포지션의 몫일 테니까.
검은 표지의 포지션 봄호를 펼친다. 권두언이 실려 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션이다. 그냥 건너 뛰려는데 예사롭지 않은 제목 <나태주라는 슬픔>이 눈길을 붙든다. 이렇게 직설적이고 대담한 화두를 책머리에 던져 놓는 이는 다름 아닌 포지션의 차주일 주간이다.
'나태주는 우리 시대 시문학의 슬픔이다.' 명제의 진위와 상관없이 나는 흡인력 강한 진술에 이끌려 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 시단의 현실에 대한 명쾌한 슬픔과 마주친다. 그는 우리 사회의 공통화 현상을 비판하면서 특히 문학 현장에서 수월성과 다양성, 개성성, 창조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기 드라마 주인공이 낭송한 시집이나 대통령이 인용한 작품이 공통화의 기준이 되어 작품 선정을 유도한 프레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본격과 통속의 논쟁이 사라졌고 장르 소설과 웹툰마저 논란의 대상에서 제외된 지 오래다. 웹 소설만 시장에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시집은 훨씬 더 심각하다. 공통화 현상이 기준인 서점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비좁은 매대에 유명 시인의 시집 몇 권만 놓여 있다. 문학의 현장이 이럴 진데 자존감과 품격을 지키며 시 전문 잡지를 발행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암울한 현실을 익히 알고 있다. 내가 등단했던 모지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던 터라 더욱 그렇다. 아직도 정통 문학에 꼿꼿이 심지를 박고 유감없이 제 몸을 불사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나는 그 글을 읽는 내내 차주일이라는 또 다른 결의 슬픔을 느껴야 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명기된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는 항목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 걸 보면 적당히 세태에 기대어 사는 나의 비겁함도 단단히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블라인드 시 읽기'로 서둘러 자리를 옮긴다. 이름을 가린 시인과 이름을 내건 평론가와의 기 싸움이 치열하다. 블라인드 시 읽기가 내건 슬로건처럼 명성이나 인맥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시를 평하는 자리이다. 시인은 오로지 작품으로 말하는 기회를 얻었지만 한편 부담스러울 것이다. 왜곡된 비평정신을 곧추어야할 평론가 역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 나는 양쪽의 감정을 모두 이입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은유를 전당포에 맡겼다" 첫 작품의 첫 행이 주는 어감처럼 대부분 메타시로 느껴진다. "은유를 찾을 수 있는 기한은 26일 남았다" 「지상의 밤에」 화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창작의 고통을 호소한다. 시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지만 현실 또한 외면할 수 없다. 마감시한을 정해 놓으면 시는 더 멀리 사라져 버린다. 소월의 시<차안서선생산수갑산운>을 패러디한 「소월에게」, 말라르메의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이 찢겨나간 사실을 알고 동일 제목으로 쓴 시 「목신의 오후」도 문학의 고단함을 역설적으로 그려낸 것이리라. 「바늘」역시 현대 사회에서 수놓기처럼 효용가치가 떨어진 문학을 일컫는다. 이 시들과 달리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딸기쨈」은 광주 항쟁과 연관이 있을 거란 추측이 든다. 내가 직접 목도하고 느낀 광경이라 그랬을 것이다.
시는 처음 읽고 느낀 감정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거기엔 옳고 그름이 없다. 따라서 정답도 없다. 깊은 사유가 깃들 수도 있지만 운율 속에 스며들어 촉촉이 감성을 적시면 그만이다. 하지만 블라인드 시를 읽으면서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난해하고 호흡이 긴 시들은 가슴이 답답하다. 시평을 읽으면서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숨은그림찾기 같은 시적 논리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전체적인 이미지나 풍경은 사라지고 만다. 마치 해부학처럼 신경과 근육과 뼈와 살을 분류하면 유기체적 기능은 사라지고 앙상한 형태만 남는다.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미로에서 홀로 떠돌기도 한다. 그 길은 내비게이션 없는 초행길처럼 불편하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문학이란 불편을 감수해야 새로운 전진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행길이 주는 설렘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 아닐까.
사연사림(詞筵詞林)의 숲 속으로 들어간다. 최근 문단의 경향과 시집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집이 속칭 주류 출판사에서 간행한 시집들이라 좀 의아했다. 나는 언젠가 '상징자본을 획득한 소수의 문예지들이 문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한국 문학장의 맨 위에 배치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포지션 콜로키엄에서 강의를 들은 바 있다. 당시 상징자본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전망을 제시한 바 있는데 간략히 요약하면, 출판 자본주의와 연결고리를 탈피할 것, 기존 문예지를 중심으로 구축된 동일적 공동체성을 탈피하고 민주적 공공성을 지향할 것, 자본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문화운동의 연대를 모색할 것 등이다. 꼭 이런 논리가 아니더라도 상징자본이 지배하는 시집을 다시 조명한다는 것이 포지션의 의도와 부합하는지 의문이 든다. 뛰어난 역량을 보유했지만 어렵게 시집을 간행한 숨은 시인도 함께 조명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호의 특집은 ‘동물이라는 타자’이다. 네 명의 전문가가 다채로운 관점으로 주제에 접근한다. 각자 고유의 영역에서 쓴 글이라 전문성이 돋보인다. 너무 깊숙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동물 전문 잡지인지 문학잡지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문학적 접근을 바라는 독자에게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다. ‘펫코노미’라 불리는 반려동물 시장을 이용하는 인구는 천만에 이른다. 그렇다면 질적 양적으로 성장한 비인간동물(반려동물)의 삶은 어떨까. 이제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가다듬을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글을 읽다보니 동물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생명이라는 단어로 대치된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서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국한하면 생명의 존엄성으로 치환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얼굴의 윤리학’에서 “얼굴은 하나의 명령”이다. “나를 사랑하라, 나를 죽이지 마라, 형제여 자매여...” 모든 얼굴이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얼굴 있는 것을 먹는 꺼림칙함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동물이라는 타자에서 타자는 애완동물과 반려동물로 그 범위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반려동물에 대한 책은 많지만 인문학적 관점에서 논의를 펼치는 것은 흔치 않다. 그런 면에서 들뢰즈의 관찰은 흥미롭다. 그가 동물에게 매혹되는 이유는 동물이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많은 인간이 세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죽음에도 영토가 있다. 죽는 법을 아는 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인간이 죽을 때는 동물처럼 죽는다고 주장한다. 동물이 자기 고유의 영토를 가진다는 사실을 '예술의 탄생'으로 보는 들뢰즈의 식견은 놀랍다 못해 존경스럽다.
반려 동물에 대한 문학적 고찰도 관심을 끈다. 내 '반려종'들에 대한 소고에서 애완동물은 반려동물로, 반려동물은 다시 반려종으로 그 지위를 격상한다. 인간과 개는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안에서 서로의 '반려종'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몇 편의 시와 산문을 통해 반려동물에 대한 문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혜안이 번득이는 이번 특집은 '반려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다.
시 전문 잡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신작시'와 '집중 조명' 코너가 아닐까. 신작 시에서는 치열하게 시작을 전개하는 16인의 시가, 집중조명에서는 중견 시인의 작품과 평이 나란히 실려 있다. 가슴 따뜻한 시도 있고 냉철한 사고를 요하는 시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선지 시들은 점점 길어지고 산문화 되어 간다. 취향과 독법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그래도 간혹 내게 말을 걸어온 시들이 있어 행복하다. 역시 나는 시 감상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 시를 분석하거나 비평하는 자리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다. 그 어색함을 감추려는 것일까. 특집 속 반려동물에 푹 빠져있는 인간동물에게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거야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람 아예 말고
함께 나이 들지 않을 목숨 진즉 보낸 빈 방
허물어진 허벅지를 내어주는 유리창 건너
몇 생을 건너서라도 찾아와 줄
나의 고양이여 제발
-임희숙, 「나의 늙은 고양이」 부분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리던 고양이가 한 마디 덧붙인다.
너무 깊어서가 아니라 너무 얕아서 못 건너겠다 그대 마음 속
-김경미, 「마음」 전문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마시며 버진로드를 걷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진로드까지 따라가 보는 것
날씨와 놀던 단풍나무가 자신의 뼈를 만지고
길양이가 연인을 따라 숟가락을 들고 나서는
숲속 야외 예식장
- 김지명, 「버진로드」 부분
새롭게 추가된 세션 ‘당신들의 말’은 기획과 편집이 유독 새롭고 신선하다. 새로움에 집중하는 즐거움마저 새롭다. 이것은 다시 세 가지 코너로 세분화 된다. 한 명의 예술가에게 지속적 자양분이자 결정적인 영감이 되어준 것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 비평가 고유의 시선으로 지금-여기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자리,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써나가는 시인의 육성을 들어보는 자리이다. 구체적인 편집 의도를 밝히고 쓴 글이라 주제가 명료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하다. 덕분에 소저너 트루스를 알게 되고 그녀의 연설문을 읽으며 가슴으로 울게된 것을 감사한다.
이번 호 부터 새롭게 추가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21세기 외국시를 소개하는 ‘해외 현대시 읽기’는 퓰리처상 및 전미도서상 수상시집을 중심으로 미국시를 소개해 준다. 세상, 시, 언어를 대하는 독특한 방식을 식별함으로써 우리와 어긋나는 지점을 찾아가려 한다는 설명에도 가방끈이 짧은 나에게 외국 시는 여전히 낯선 정서이다.
‘나를 위한 시 쓰기’도 새롭게 선보이는 코너이다.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어떻게 써야 잘 쓰는 시일까? 시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지만 아무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선문답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이번 호에서는 '시는 나를 쓰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총론적인 답변을 주었지만 앞으로 더 구체적인 방안을 주리라 기대해 본다.
두 글자의 사유는 즐겨 보는 코너이다. 이번 주제는 모방이다. 문학의 숙명과도 같은 모방을 사회, 경제적 측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 풀어나간다. 예술은 자연의 미메시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창조성보다도 훨씬 오랜 세월에 걸쳐 지배적 이념의 자리를 지켜왔다. 필자는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가 예술적 미메시스를 실천하거나 천착했다고 기술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창조적인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모방하는 존재다. 이 두 가지 명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그것도 자본이 시도해 온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늘 고민하는 문제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자본에게 탈취된 창조력을 되찾아 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시인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 계절의 첫’ 같이 첫 시집을 출간한 시인의 목소리는 신선하고 당당하다.
"지도에 없는 파도처럼 지도를 바꾸는 파도처럼. 나는 나로부터 계속 밀려나면서 이름 모를 이름이 된다. 바깥의 물결보다도 내 안의 물결이 강하고 섬세하고 입체적이고 짙어지고 생동해야만 나는 읽힌다- 나를 쓸 수 있다."시로는 다 말하지 못한 시작에 대한 갈증이 산문을 통해 해소되는 순간이다.
언더그라운드가수를 경연장으로 끌어내 숨은 끼와 실력을 뽐내게 함으로 대중의 사랑을 이끌어 내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역할이다.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간절함을 소중히 여기는 문학잡지의 몫이 아닐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포지션의 겉표지는 왜 계절에 상관없이 늘 검은 색일까. 포지션에는 왜 광고 지면이 없을까. 버젓이 신인 추천 안내가 있는데도 왜, 어찌하여 매번 신인은 나타나지 않을까.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불러온다. 아무 이유 없이 사라졌다가 아무 일 없는 듯 나타난 령도자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죽었다고 기사를 써도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령도력을 어쩔 것인가 항변하는 언론의 속셈은 무엇일까.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었는데 환자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책을 읽든, 친구와 바둑을 두든, 아내와 설전을 벌이든 나는 왜 단번에 끝을 보지 못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할까. 익숙한 길에도 내비게이션을 확인하고 시동을 켜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마간산으로 읽고 건성으로 쓴다. 코로나블루를 앓느라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실한 독회를 이렇게 변명으로 마무리한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 이후 세상은 온통 잿빛 전망이다. 코로나 이후의 문학판을 상상해 본다. 비틀어진 세상의 틈새로 문학은 더욱 왜소해지고 왜곡된 문학 판에서 시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얄팍한 감상으로 포장된 싸구려 문학이 전면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럴 때 일수록 독자들은 정공법으로 돌파하는 문학잡지에 목말라 한다. 글쓰기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지만 타자의 정체성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인식의 깊이와 강도는 무척 다르다. 소외된 타자를 들여다보는 자리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날카롭고 묵직하고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포지션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 척박한 토양에 꼿꼿이 심지를 박고 유감없이 제 몸을 불사르는 포지션이 문학의 난세를 잘 극복해 나가길 기원한다. ‘포지션이라는 슬픔’은 오래 간직해야 할 문학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포지션』 2020년 여름
첫댓글 포지션에 처음 '독회'라는 꼭지가 돋보인다. 그걸 읽는 독자들은 김연종 시인의 안내서를 읽으며 한권의 잡지 읽기가 수월했으리라 생각한다. 세션마다 부여된 메시지를 오로지 독자로서 글을 써내려갔지만 평자 수준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다가 포지션에 대한 그동안의 의문을 독회에 실어 독자로 하여금 독회의 속살을 볼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는듯 하다. 저도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