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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눅23:18-25, 39-43
제목: 거기 너 있었는가?
종려주일 하면 머리에 한 장면이 그려집니다. 무슨 그림 입니까?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장면이 아닙니까?
성경을 읽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글씨만 읽으면서 묵상 할 수도 있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상상력으로 읽는 방법도 참 좋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성경의 어떤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는 것인데 성경을 이렇게 읽으면 더 감동이 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오늘 종려주일을 맞으면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많은 유대인들이 길거리에 서서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보세요.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가 136장도 바로 이런 상상력을 갖게 해주는 아주 탁월한 찬송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연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즉, "옛날에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때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그 부활의 현장에 서있었다고 고백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주를 그 무덤 속에 뉘일 때, 주가 그 무덤에서 나올 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가사입니까? 그런데 한글 가사도 좋지만 영어로 된 가사가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crucify [|kru:sɪfaɪ(crucified) 1.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다 2. 호되게 비판하다) my Lord?"). 영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당신은 그들이 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거기 있었는가?"
저는 이 찬송을 쓴 사람이 특별한 영감을 받은 분이라고 생각해서 누가 작곡하고 누가 작사했나. 살펴보니 곡과 가사 모두 Traditional [trə|dɪʃənl], Spiritual [spɪrɪtʃuəl],
즉 흑인영가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끌려와 노예생활을 했던 흑인들의 한이 영감으로 승화(昇華)되어 이 놀라운 찬송을 만들어내고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겪은 그 고난과 억압을 분노로 폭발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영적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있기에 이 놀라운 영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체험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과 함께 영광 받는 체험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십자가 주변의 악역의 두 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은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바라바! 이는 주님 때문에 살아난 자입니다.
마27:15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잡혀 왔을 때 마침 예수님과 함께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또 한 명의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 보면 17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아주 흔히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마침 십자가형을 받을 두 죄수 이름이 다 예수였기 때문에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물을 때 두 사람을 구분해서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바라바 예수를 놓아주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마태복음은 이 바라바가 어떤 죄를 지은 죄인인지 설명하지 않지만 16절에 보면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 바라바라는 자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죄수였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은 죄수 길래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죄수였는가? 그 답은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나옵니다. 마가복음 15:7은 이 바라바가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라바를 '강도'라고 설명합니다. 즉 살인강도는 살인강도인데 단순히 돈을 빼앗으려고 남을 죽인 강도가 아니라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강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바라바가 당시의 셀롯(Zelotes) 당원이었다고 봅니다. 성경은 이들을 '열심당원'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정당을 뜻합니다.
이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히 로마에 대항해 폭력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옷 속에 칼을 품고 다니면서 로마사람뿐 아니라 로마에 협력하는 매국노 유대인들도 살해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바나바 역시 열심당원으로 누군가를 살해했다가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아무나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반역자들 수준의 죄수만 십자가에 달아 죽였기 때문에 이 바라바도 여느 평범한 살인강도가 아니라 바로 열심당원 테러리스트였고 그에 대한 소문이 유대인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감옥 속에서 유명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 속의 독립투사로로 치면 안중근, 이봉창 의사와 같은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이 유명한 독립투사요 혁명열사인 바라바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마27:15절로 다시 돌아가면 당시 명절 때 총독이 유대인들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경일 때 죄수를 사면해 주는 특별사면과 같은 것입니다. 때마침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은 죄 없다고 생각되는 예수님을 놓아주기 원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발이 너무 거세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날까봐 흉악한 죄인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라바가 그저 예수님 대신 풀려났다는 것으로만 끝나고 다시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가 말씀을 드린 것 같이 성경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도 이 바라바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바라바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많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스웨덴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 비스트라는 분이 예수님 대신 풀려난 죄인 바라바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설 <바라바>라는 작품을 써서 195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도 보았는지 모르지만 이 소설이 1962년에 유명한 배우 안소니 퀸을 주연으로 해서 <바라바>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살인 방화를 일삼다가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만 기다리고 있던 바라바, 예수님께서 이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어 사형을 모면하고 석방됩니다. 바라바는 자유를 얻었으나 도대체 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만 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으로 뛰어가서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며 감동을 받고 그 후에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 후 바라바는 평생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비록 이 소설 내용이 상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저도 충분히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으로붙너 11년 전 국민일보 2007년 3월 1일자에 <현대판 바라바, 스즈키 히로유키 목사>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 기사 내용을 좀 보면 "누구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바닥인생도 다시 시작했는데,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일본 야쿠자 출신인 스즈키 히로유키(51) 목사의 말에는 힘이 넘쳤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와 다시 산 자의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스즈키 목사는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야쿠자 조직의 중간 보스로 카지노 두 곳을 경영한 소문난 도박꾼이요, 두 번이나 교도소 생활을 했고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989년 예수를 영접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이 대신 짊어진 십자가로 인해 풀려난 강도 바라바가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역자가 된다는 현대판 바라바 스토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정말 현대판 바라바 같은 사람이 아닙니까?
하지만 여러분, 성경은 이 야쿠자 출신 일본인 목사가 바라바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바라바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왜냐? 정말로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살인죄수는 바라바 아닙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진짜 죄인은 바로 이 바라바인데 바라바 대신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바라바는 무죄로 풀려난 것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진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정말 죄와 허물고 죽어 다시 살수 없는 내 자신, 뿐만 살면서 죄를 많이 지어 죄인 중의 괴수는 나 자신인데, 주님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는 대신 풀려나고 살아난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 융악한 죄인 바라바가 바로 내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감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바라바를 볼때에 무심코 지나가거나 "이런 죽일 놈이 있나?" 하고 느끼셨다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성경에 왜 바라바의 사건을 기록해 놓았을 까요? 바라사건을 하나의 역사로 기록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 대신 풀려난 이 죄인 바라바가 바로 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죄인인 너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중의 괴수인 우리는 예수님 대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죽어야만 하는데 예수님 덕분에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고전6:19-20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내 모든 소유는 누구 것입니까?
내 안에는 과연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이 시간 결단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주님 것이라고, 내 평생 주님 위해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평생 만나는 사람마다 바라바처럼 이렇게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2. 두 강도 :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두 강도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함께 못 박힌 좌우편의 강도들이 있습니다.
이 강도들 역시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바라바 같이 정치범 혹은 열심당원 같은 저항 운동가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이름이나 신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성경에 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두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과 오른편에서 십자가에 달려 함께 처형당했는데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군중들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27: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오늘 본문눅23:39 이하를 봅시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먼저 두강도가 같이 예수님을 욕을 합니다. 어떤 욕을 했을 것 같아요?
"우리도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너처럼 바보 같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무기력하게 죽지는 않는다."고 조롱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래도 반란이라도 일으켜보고 사람이라도 죽이고 이렇게 처형당하지만 너는 뭐냐? 이 바보 같은 인생아!" 하고 조롱했을까요? 아무튼 이 강도들은 처음은 예수님의 양옆에서 비참하게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을 보면 이중 한 강도가 욕을 하다가 예수님과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39을 보면 두 강도 중 하나는 정말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하며 조롱하다가 죽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맞냐고, 그렇다면 어디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강도는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비방하는 동료 죄수를 꾸짖는데 그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큰 죄를 지었지만 지금 이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만한 죄는커녕 아무런 죄도 없는 의로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름 없는 강도는 지금 중요한 핵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그러나 예수님 죄가 없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아무 죄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다른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라고 부탁합니다. 이 죄수는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로 이미 인정한 것이요, 그 분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도 구원해달라고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선포하십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나중이 아닙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다음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늘, 네가 신앙고백을 하고 나를 구세주로 인정한 그 순간,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는 비록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죽었지만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미 낙원을, 천국을 허락 받았습니다.
갈라디아 2:20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한 강도는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내 믿음과 고백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낙원을 허락받았으니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고,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 내가 다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내 주인도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내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니 나는 이제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톰 휴스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해골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그날 세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죄를 위해 죽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죄 가운데 죽었는데, 예수님을 모욕하고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죽은 강도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는데, 그는 비록 이 땅에서 살날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영원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의 십자가, 나의 부활
사랑하는 에덴의 성도여러분, 오늘 살펴본 바라바와 강도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반란도 일으키고 얼마든지 사람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구를 만납니까?
바라바는 자기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납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순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납니다. 물론 바라바는 십자가형을 모면했고 강도는 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두 사람이 똑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했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의 십자가, 내 영혼 속의 십자가입니다. 바라바와 강도 모두 주님이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체험을 했습니다. 똑같이 내 옛 자아가 죽고 옛사람이 죽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주님과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도 <바라바>라는 소설처럼 바라바도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이제 두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한 사람 강도는 비록 십자가의 형틀로 사라졌지만 그는 확실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죽는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라면
예수님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아난 바라바는 오늘 우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 생명을 얻은 자는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전에는 오직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살았습니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내 목적 이루기 위해 남도 죽이고 희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산후에는 내 삶의 목적이 세상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내가 죽고 내가 희생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이 체험을 한 후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이 체험을 하고 삶이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 체험이 정말 중요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거기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고, 예수님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처럼 내 인생이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참으로 체험하고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바로 여러분이 이런 체험을 하는 소중한 기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